107. 엔돌핀
뉴욕 롱 아이랜드의 고급 아파트엔 엄청 큰 침대가 있다.
킹사이즈 넓은 침대.
다행이다.
나와 핀빙빙이 나란히 누웠고, 그 사이에 예하가 누웠다.
음... 어떻게 잘하면 3ㅍ...... 생각하지 말자.
예하와 핀빙빙이 영어로 떠듬떠듬 수다를 떨며 까르르 웃는다.
예하는 영어가 부족하고 핀빙빙은 쉬운 단어를 조합하느라 느리다.
그런데도 대화가 되는 게 신기하네.
한참 누워서 떠들다가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화장실을 들락날락하고.
...... 난 왜 여기 있는 거야.
예하가 나의 영웅적일대기를 힘겹게 설명하고, 핀빙빙과 비슷한 처지의 본인과 루비를 구한 이야기를 하며 나에 대한 허상을 한참 키워준 후 잠이 들었다.
...... 아놔 잠 안와.
다음날 일어나보니 예하가 핀빙빙을 매미가 나무 안듯 안고 있었다.
나보다 핀빙빙이 좋냐? 좋으냐?
“몸조리 잘해요.”
“네. 다음엔 혼자 와요. 혼자.”
핀빙빙이 살포시 안으며 귓속말을 했다.
신기하게도 이 말은 쏙쏙 이해가 되네.
서른 명의 경호팀과 함께 들른 곳은 MS 본사.
비행기를 다섯 시간이나 타고 시애틀로 갔다.
이곳에 온 이유는 데이터 문제 때문.
미래 앱에는 중앙 서버가 없다.
사용자 각자가 본인의 데이터를 제공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며 토렌트 방식으로 공유한다.
덕분에 정치적 이유로 본사가 압수당하고 회사가 사라져도 앱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구조를 이해한다면 회사가 정치적으로 공격당할 일이 줄겠지.
탈중앙화를 위해선 공식 서버가 없어야 한다.
하지만 데이터 공유는 개인의 자유다.
본인의 데이터 가치를 제공하면 보상으로 미래블록을 받지만, 많은 이들이 거부할 경우 데이터 과부화가 올 수 있다.
또 시드의 보유문제도 있다.
메신저가 활성화되고 각종 사진과 동영상, 라이브 방송이 시작되면 데이터를 퍼트리기 위한 최초의 시드가 필요하다.
작성자 본인은 항상 갖고 있어야 하지만, 추가로 시드를 제공할 최초 제공자가 많아야 인터넷이 끊기지 않는다.
블록체인으로 엮는 것도 문제다.
모든 데이터가 블록체인과 엮이기 때문에 기본 데이터 자체가 커진다.
그래서 MS에 왔다.
원래는 아마존과 협상했었다.
핀빙빙을 만나기 전에 결론이 났는데, 그들에게 미래 쇼핑은 적대적 라이벌이다.
클라우드 1위 업체인 아마존은 데이터 사용비용을 되려 높게 불렀다.
꺼지란 소리.
“멍청하네. 갑질의 말로는 사망이야.”
“응?”
아마존과 협상에 실패하며 중얼거린 말을 예하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순간 아마존의 멸망이 결정되었다.
2014년, 한국의 방송사들은 4:6으로 수익배분을 하던 유투브에 수익 배분 9:1을 요구했다.
방송사가 다 먹겠단 소리다.
유투브는 당연히 거부했고, 직접 컨텐츠를 만드는 한국의 방송사들은 한국 토종 OTT에 9:1 배분계약을 맺었다.
50분 방송을 30초~ 4분으로 자르고 영상 시작 전 스킵 불가능한 30초 광고를 넣어 광고를 다 봐야 보고 싶은 걸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유투브 채널에선 방송사 방송을 내보낼 수 없게 되었고, 방송 사진조차 올릴 수 없었다.
위풍당당한 갑질.
그리고 4년 후.
9:1 수익배분과 30초 풀광고로 큰돈을 벌 것 같았던 방송사의 다시보기는 모든 시청자가 떠났고, 방송국은 유투브 일개채널의 광고매출도 벌지 못할 정도로 수익이 악화되었다.
지금 방송국들은 유투브에 직접 채널을 만들어 직접 유투브에 들어가서 봐달라고 광고하고 유투브의 광고비용을 얻어먹으며 살고 있다.
수익 배분은 대략 1:9. 광고매출의 1/10정도만 방송사에 들어간다.
이것이 한국 방송사의 위상이다.
갑질해서 고객이 떠나면 망한다.
서비스 기업은 언제나 고객 편의가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방송사의 멍청한 짓을 아마존이 똑같이 했다.
미래쇼핑을 견제하려는 생각이겠지만, 아마존은 막장선택을 했다.
“반갑습니다. 엠에스 아주리 사장 안데르송입니다.”
사장이 직접 나와서 반겨준다.
한때의 영광을 뒤로하고 오랜 기간 적자를 겪은 MS는 클라우드로 새 날개를 펴고 있다.
클라우드 1위인 아마존을 따라잡고자 가격도 반값에 제공하고 있고.
그들로썬 우릴 놓쳐선 안 된다.
“바로 사인하죠.”
조건들은 이미 협상이 끝났다.
시드 클라우드 조건으로 매년 최소 천만 달러를 지불하고, 추가로 데이터 사용량에 따라 값을 내되 사용량이 많을수록 할인율이 커진다.
프로그램 설정 상 데이터처리를 하면 미래블록이 생성되는데 생성되는 미래블록을 전부 미래그룹이 가져가고 대신 사용량만큼 현금을 주는 것이다.
MS와는 사업영역이 겹치지 않으니 가능한, 매우 화기애애한 협상이다.
밝게 웃으며 악수하고 사인을 했다.
MS는 최소 천만달러의 고정수익이 발생하는 고객을 잡았고, 우리는 사용량이 늘수록 미래블록을 벌어들이는 남는 장사에 안정적 서버를 얻었다.
MS를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일정에 없던, 급한 연락을 받고 간 출장이다.
실리콘밸리에 올해 초 지분 49%를 투자한 바이오 업체가 있다.
“벌써 완성됐다고요?”
“네. 이미 FDA에 보냈습니다.”
예아아아아~
전직원 9명인 중소기업의 사장이 활짝 웃으며 자랑했다.
뒤에선 전직원이 환호성을 부르며 만세를.
“저기요. 이게 기뻐할 일이 아닌데......”
“기뻐할 일이 아니라니요? 이제 돈 방석에 앉는 겁니다. 전 세계 마취시장을 석권할 작품입니다.”
우와아아아아~
30대 스킨헤드 사장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를 보다가 모여 있는 직원들을 봤다.
다들 흥분해있고, 대머리고, 좀비 같다.
팔에는 주사자국이 가득하다.
“혹시 본인들에게 실험하셨어요?”
“예? 예. 어쩔 수 없죠. 그래도 효과는 확실히 입증했습니다. 최고예요. 우리는 최고의 약을 만들었어요!”
베스트으으으으으으~
아우 시끄러.
스읍, 하.
스읍, 하.
그래. 최고가 맞다.
하지만 최고여서 문제다.
효과가 너무 좋아서 문제.
엔돌핀이라는 호르몬이 발견되었을 때 전 세계의 약쟁이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뭐! 몰핀의 800배? 몰핀보다 800배 좋다고?’
‘인체가 자체 생성하는 호르몬? 그럼 마약단속에 안 걸리겠네? 존나킹왕짱!’
기존 마약보다 수백배 강력하고 마약 단속에 걸리지 않는 약이라니.
모든 약쟁이가 엔돌핀 약이 나오길 기다렸고, 실험했다.
수많은 실험 끝에 끝내 만들어냈다.
여기 이 회사가.
ALL바이오.
진통제를 연구하던 바이오 벤처기업인데 어쩌다보니 엔돌핀 합성에 성공했다.
사실 합성에 성공한 예는 몇몇 있다.
인체에서 생성되는 단백질 합성물이며 분자구조도 전부 밝혀졌으니.
문제는 엔돌핀의 커다란 분자가 뇌막을 통과하지 못해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다.
ALL바이오에선 혈관주사로 단백질을 주사하면 혈관을 떠돌던 분자가 뇌막을 통과한 후 엔돌핀으로 합성되는 것을 발견했다.
혈관에 주사하면 뇌가 엔돌핀으로 가득 차 팔다리를 잘라도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진통제 작용을 하게 된다.
마취의 안정성이 지금보다 수십 배 올라간다.
추가로 몰핀보다 800배 강력한 각성효과, 끝내주게 행복한 하이상태로 만들어준다.
맞아보고 싶다.
스읍, 하.
스읍, 하.
진정하다.
내 안에도 가득차있어.
“엔돌핀 위험한 건데.”
“위험하긴요. 세계최고의 진통제입니다. 마약처럼 비싸지도 않고 중독현상도 없는 인체화합물.”
예아아어어우어어어~
뒤에 나열된 직원들을 보세요. 중독현상 없어 보여요?
“에휴. 다들 합성법은 알죠?”
“네. 당연히 알죠.”
크화화하하하~
이게 문제다.
심각한 중독성 때문에 5년간 끌던 FDA는 끝내 불허방침을 내렸다.
그 사이 알 수 없는 경로로 같은 물질이 공개되었다.
엔돌핀 제조법은 세상에 널리 퍼졌다.
그때부터 세계는 엔돌핀과 전쟁을 시작했다.
이미 뿌려진 제조법은 너무도 간단했고, 재료를 구하긴 더 쉬웠다.
엔돌핀마약을 없애겠다고 모든 콩과 닭고기를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다.
세상에 뿌려지면 수없이 많은 희생자를 만들 악마의 약.
그렇다고 없앨 수도 없다.
이미 만들어졌고, 이들 중 누군가, 혹은 다른 개발자가, 혹은 FDA의 누군가가 마약업자에게 제조법을 팔지 모른다.
막을 수 없는 흐름.
“뭘 그렇게 고민해요. 파티합시다 파티!”
우웨에에에에에~
아 시끄러워.
이 매드사이언티스트들아.
“일단 최대한 빨리 FDA의 승인을 받도록 합시다.”
핵폭탄이 만들어진 이상, 그 제조법을 지구에서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엔돌핀 합성법도 마찬가지.
핵은 국가단위 권력이 긴 시간을 투자해 만드니 감시가 가능하지만 이건 만들기도 쉽다.
최대한 안전하게 써야지.
막을 수 없는 해일은 타고 넘어야 한다.
변호사를 모으고, 로비를 하고, 위험성을 대대적으로 알려야지.
아닌가. 관계자 전부를 죽이려나.
살해당하지 않으려면... 그러려면...
“뭘 멀뚱히 그러고 있어요? 오늘 고민은 내일 하고 일단 놉시다. 거기 예쁜 아가씨! 이리와봐!”
쉐이이잉이이익킷~
“시끄러. 좀 닥쳐 이 매드사이언티스트들아!”
아 짜증나.
엔돌핀이 솟구친다.
9년차 경찰 김운출은 김상철 피습사건을 담당하는 형사다.
모든 경찰이 그러하듯 김운출 또한 공무원이다.
시키는 대로 하고, 큰 문제 생기지 않으면 정년을 보장받는 공무원.
영화나 드라마에서 부패한 견찰이 반이고 범인을 미친 듯이 잡고 싶어하는 정의로운 형사가 반이지만, 실제로는 그냥 공무원이다.
보통 한국사람처럼 퇴근 후 삼겹살과 소주를 즐기는 보통 사람.
하루에도 열개씩 형사사건이 쏟아지고, 그걸 하나하나 처리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공무원이 될 수밖에 없다.
피해자 가족은 매일 찾아와 닦달하고, 가해자 가족은 매일 달려와 질질 짜고, 위에선 빨리 해결하라고 쑤셔대는데 어디 제대로 수사할 시간이 있나.
자신에게 배정된 수많은 사건을 매뉴얼대로 처내고 검찰에 송치하는 걸 반복하다보면 감정 없는 공무원이 될 수밖에 없다.
누구나 그렇게 된다.
의심스러운 사건이 있다고 그 사건 하나에 일 년을 매달려 있으면 처리할 일이 쌓여 주변 동료가 과중한 업무를 떠맡게 된다.
그만큼 갈굼 받는 것도 심해지고, 인사평가도 안 좋아져서 기대 월급도 줄어들고.
공무원이 될 수밖에 없다.
잡혀온 정신병자는 혼자 중얼거리기만 하니 무엇도 알아낸 게 없다.
정신 나간 미래그룹은 자기네 계열사 사장이 피습 당했으면서도 공명정대한 판결을 원한다며 피해자에게 변호사를 붙였는데 그 변호사가 없었다면 조서도 꾸미지 못했을 것이다.
미래그룹.
딱히 원한은 없지만, 못된 놈들인 것 같다.
신문, 방송, 의사 등 각계각층이 모두 싫어한다.
그래도 사심을 넣지 않고 공무원의 마음으로 매뉴얼대로 처리했다.
본인확인을 위해 지문을 떠 감식을 의뢰하고 결과를 받았다.
지문감식.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띠디디디, 탁! 하고 결과가 나오지만 현실은 다르다.
가해자의 지문과 패턴이 비슷한 지문을 범죄자 데이터베이스에서 뽑아주는데 그 리스트가 수백 개다.
패턴이 비슷한 수백 개의 지문과 얼굴을 받은 후 눈으로 대조해야한다.
20대 초반에 얼굴이 찌그러진 가해자.
나잇대가 완전히 다르거나 성별이 다른 이를 제외하다보니 100여명이 남고 그걸 일일이 눈이 빠져라 지문패턴을 비교하며 하나씩 지워나갔다.
그러고 보니 아무도 없었다.
“아 짜증나. ...... 제시라는 애가 참 예뻤는데.”
사건 수사를 위해 참고인으로 부른 제시는 변호사와 함께 왔다.
얼굴이 미친 듯 예쁘고 목소리도 미친 듯 예뻤다.
너무 예뻐서 말을 더듬다가 준비한 질문도 제대로 못했다.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다시 불렀더니 이번엔 변호사만 왔다.
젠장할 변호사새끼들.
니들땜에 내가 결혼을 못하는거다.
지문감식으로 범죄자의 신원을 확인하는데 실패한 김운출은 매뉴얼대로 위에 보고한 후 감식 범위를 일반인으로 확대했다.
수만 개의 지문리스트가 왔다.
이걸 눈알로 확인해야 한다.
제길.
김운출은 몰랐지만, 리스트에 조승학은 없다.
조승학은 사망신고 되서 주민등록이 말소되었고, 백제그룹 해체 후 조승학이 아닌 김유현이 살해당했다며 법적공방이 이어지고 있지만,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기에 말소가 취소되지 않았다.
수만 개의 지문.
김운출은 리스트를 받아놓고 야근할 때마다 쉬엄쉬엄 대조하고 있다.
야근비 타먹으려 남는 시간에 일하는 척 하는 것이다.
사실 사건은 미등록 무연고자의 일탈로 종결할 수 있다.
범죄사실 확실하고, 미친것도 맞으니 검찰에 올리면 알아서 정신병원에 가둘 것이다.
그런데도 잡아두는 건 콩고물 때문.
정신병자의 변호인은 가해자를 만날 때마다 자신에게 와서 고생한다며 밥을 사주고 고기를 사주며, 사심 없고 공명정대한 수사를 강조하고 떠났다.
정신병자를 조져달라는 건지, 아니면 풀어주라는 건지 애매하지만 소고기 얻어먹는 게 좋아서 질질 끌고 있다.
미래그룹이 피해 입은 사건이기에 언론에서도 일부러 무시하는 사건.
질질 끌며 배때기에 기름칠 좀 하다가 정신병원에 처넣지 뭐.
그랬는데 사건에 반전이 생겼다.
“뭐? 영덕?”
- 작가의말
미래 이야기는 전부 픽션... 이 말도 지겨우시겠다
엔돌핀 주사의 의학적 효과는 모르겠어요
그저 기술발달로 통제 불가능한 마약이 언젠가 나오겠거니 하는 상상으로 구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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