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에너지
1도씨의 물은 가만히 있는다.
99도씨의 물도 가만히 있는다.
하지만 100도씨가 된 순간 물은 수증기가 되어 맹렬히 팽창하며 이때의 힘은 거대한 기관차를 움직일 정도로 강력하다.
12월 23일.
내가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대통령과 대담을 한 후 사람들이 광화문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엄중수사 촉구한다!”
“매국노를 잡아라!”
“흑색선전 거짓선동 감옥으로 들어가라!”
준비되지 않은.
일치되지 않은.
그냥 나온 순수한 인파가 분노의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해체되었다.
코로나 시국.
집회 금지.
게다가 사전에 신고하지 않은 집회.
경찰과 방역당국의 말도 이해가 간다.
경찰 발표 3만여, 미래그룹 추산 35만여 집회 인파가 해산되었다.
다음날.
크리스마스이브다.
예하와 친구들과 덕유산으로 캠핑가기로 예약해 놨다.
100명 이상의 경호원이 함께 가야 하니 캠핑장을 통째로 전세 낸 상태.
“예하야. 부모님 좀 뵈야 할 것 같은데. 먼저 갈래?”
“아니아니. 같이 가아.”
응, 그렇게 답할 줄 알았어.
이건 답정너였지.
아침 일찍부터 예하와 함께 양평을 찾았다.
부모님께 절하고, 사죄드렸다.
“네 잘못 아닌 거 알지. 내가 뭐 맞아죽어도 한국인이어야 한다는 애국자도 아니고.”
“아이고 우리 아들 고생 많았어. 고생했어.”
국적 포기에 대해선 ‘이렇게 될 수도 있다,’ 정도로 말했다.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으니 많이 놀라셨을 텐데 오히려 날 위로하신다.
근처에 사는 친척들도 모였다.
이제는 예전처럼 살 수 없다.
타우바트섬에서의 습격과 총격전 이후 깨달으셨을 거다.
다들 본래 살던 곳 인근의 대저택으로 이사했고, 미래그룹과 상관없는 회사 하나씩 맡아 소소하게 운영하고 계신다.
소소하게 1조 규모로.
증여세 다 내고 차려드렸다.
“그 놈들이 잘못한 거지.”
“우리한테도 얼마나 지랄인지.”
“잘했어! 아주 속이 다 시원하더라.”
“원래 높이 솟은 나무가 바람을 많이 맞는 거지.”
“그런데 미국인이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우왕! 예쁜 언니이이이.”
민서 얘는 7살인데 아직도 우왕거리고 있네.
“국적 바꿨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건 없어요. 미국인이 한국에서 장기 거주하는 경우 많잖아요. 한국에서 번 세금 한국에 내는 거고, 해외법인 수익은 미국에 세금 내고. 그 뿐이죠.”
걱정만 안심시켜드리고 바로 덕유산으로 출발하려고 했는데 말하다보니 점심까지 먹게 되었다.
점심 먹으며 반주 한잔씩 걸치고.
평일이고, 공휴일 아니지만, 이게 뭐! 부자가 이정도도 못해?
잔을 나누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앞으로 정치권이 받을 보복을 이야기하고 예하는 민서 안고 바둥거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직통 전화.
채인수다.
고생했으니 쉬라며 되도록 전화 안하겠다고 해놓고.
“네. 채형.”
-어. 전화 안하려고 했는데... 유혈사태 발생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
“에... 왜요?”
-무수골 앞 시위대. 늘상 와서 계란 던지는 할아버지들과 여성단체 아줌마들. 거기에 니 지지자들 천여명이 추가됐다. 서로 찬성, 반대구호 외치다가 말싸움하고, 그러다가 폭발. 때리고 물고 뜯고 난리 났다. 경찰이 뜯어말렸고, 100여명이 찰과상으로 병원에 갔다.
“어... 이겼어요?”
-어. 크크크크. 나쁜 놈들이 두고 보자 하며 도망갔다.
“잘 됐네요. 착한 편만 치료비 지원해줘요. 나쁜 놈은 지옥으로.”
-어. 그래. 법적 조치까지 도와줄 거야. 알아만 두라고.
전화를 끊고 친척들에게 말하니 다들 승리를 축하하며 한잔 들이켰다.
“가볼게요.”
“그래. 어여 가봐.”
오후 느지감치 덕유산으로 출발했다.
오늘의 차량은 3호기 대형버스 개조 캠핑카다.
닥똥가오리들 먼저 도착했으니 가서 그놈들이 구운 저녁 먹고 캠핑카에서 자면 딱.
예하와 약속하기를 일부러 일하지 않기 위해 핸드폰도 하지 않기로 했다.
노래 들으며 경치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했다.
덕유산에 도착했을 때 채인수에게 또 전화가 왔다.
아따 이 양반이 진짜.
“아 왜요. 쉬라며요.”
-미안한데, 큰일났다.
“안녕하세요, 특별방송을 진행하게 될 민지민지.”
“뉴비예요.”
두 명의 진행자가 출동했다.
“저희는 광화문 현장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 왜 나왔죠?”
민지가 묻고 뉴비가 대답했다.
“네. 제가 나온 이유는 모닥불 누나가 날랐기 때문이죠. 이 여자가 글쎄 캠핑장 가겠다며 떼쓰다가 특집방송 하라니까 사표 휙 던지고 떠났어요. 덕분에 힘없는 제가 땜빵나온 거죠. 크흑. 여친님과 첫 크리스마스가......”
-ㅋㅋㅋㅋ닥부리
-울언니빠꾸없는거너무조아
-진심사표펀치
-ㅋㅋㅋ갠 ㄹㅇ컨셉아님
민지가 당황했다.
“아뇨. 너님 말고 우리. 우리가 나온 이유. 대본을 읽으라고 쉬캬.”
“아차. 예. 우리가 나온 이유는 광화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취재하러 왔어요.”
“그럼 함께 가 볼까요?”
광화문에는 아침부터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 있었다.
둘은 카메라 조명 등을 줄줄이 이끌고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방송에 나가도 좋은 지 미리 허가받은 사람에게 가서 마이크를 들이댔다.
“광화문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거죠?”
여드름 많은 고등학생이 해맑게 웃었다.
“솔로라서요. 할일 없어서요.”
“꽝이네. 다음사람.”
“잠깐만요. 애인구해효~”
-ㅋㅋㅋ
-너가솔로인이유가궁금하니?
-ㅇㅅㄱㅇ
-커플은 지옥으로 솔로는 광화문으로
-ㅇㅅㄱㅇ
-asky
조연출이 잡아놓은 다음 사람에게 갔다.
“광화문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거죠?”
“제가 공장에서 일했어요. 야근이나 주말수당 못 받고 월220받으면서 쌔빠지게 고생했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야근 수당 주말수당이 꼬박꼬박 나와요. 알고 보니 윤동욱이 바꾼 거였죠. 지금은 월 400 찍는 달이 많아요. 그랬는데...... 윤회장님이 정치권에 괴롭힘 당하는 거 뻔히 보이는데 아무것도 안 한 게 부끄럽더군요. 내 일 바쁘다, 내가 오지랖 부릴 처지냐, 그런 생각에 그냥 구경만 했죠. 그랬던 내가 부끄러워서 나왔어요.”
“네. 그럼 혹시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윤회장님, 어떤 회유가 오더라도 한국 국적 회복하지 마십시오. 미국 국적 달고 있어도 저희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다른 이를 인터뷰 하러 갔다.
"여친이랑 데이트 하러 나왔어요. 여기서 데이트요? 뜻 깊잖아요."
"못된 놈들 치우겠다고 개인 돈 수십조를 쓰는데 간첩죄로 몰아가? 똥물에 튀겨죽일 놈들 같으니."
"어촌에 대규모 양식장이 들어왔을 때 반대시위를 했어요. 결과적으로 고기가 더 많이 잡히고 이런 저런 혜택을 받고, 마을 분위기가 살아날 때도 반대시위를 했어요. 그... 머시냐, 코디네이터라는 녀석이 와서 반대시위를 계속해야 돈을 받을 수 있다며 시켰어요. 시켰지만 우리가 한 거고 우리가 잘못한 거죠. 이번에 고기 죽는다고 전부 풀어주고 덕분에 낚시배만 신났는데, 아니 어쨌든 그 어린 친구가 돈 벌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지역경제를 살리겠다며 자기돈 퍼붓던 일이었는데 거기에 돈 뜯어내겠다며 반대시위 하던 게 너무 부끄럽더라고요. 어제 방송을 보고 반성하고 무작정 올라왔어요."
"정권을 바꿔야 나라가 삽니다! 제가 바로 탄핵소추안 발의하겠습니다! 나 이사람! 믿어주십시오!"
"윤회장 힘나도록 노래 불러도 되요? 한번만한번만."
"사실 지금까지 남의 일이라고 무시했습니다. 내 앞가림이 바쁘니까요. 이래봤자 돈 나오는 것도 없고 나만 손해라는 거 아니까요. 그게 현명하다고 생각했죠. 그 결과 옳은 사람이 떠났네요. 다시는 이런 일 생기지 않도록 막아야죠. 그러기 위해 나왔습니다."
엄중수사 촉구한다! 촉구한다! 촉구한다! 촉구한다!
“네 그럼 다음 사라... 꺅!”
민지민지가 대사를 치다가 사람에 밀렸다.
주위를 둘러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지금 몇 명이야?”
피디가 노트에 잽싸게 썼다.
“200만? 정오인데? 벌써?”
크리스마스이브는 평일이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광화문에.
-보고 있으니까 나도 나가고 싶다
-군고구마 팔러갈까?
-여러분 세상엔 솔로가 이렇게나 많습니다아아 힘을 내십시오오오
-ㅋㅋㅋㅋ 나도 출발한다
-가야지 오늘은
-예수탄생? 우린 동욱님을 잃은 날이다
-현장 도착. 인증합니다
사람은 ‘매순간’ 최선의 선택을 한다.
이건 모든 지배자가 알고 있다.
그래서 ‘매순간’을 조절한다.
잘 참는 성격이네? 그럼 여기까지 참겠지?
서로 이빨 날아가면서 싸울래? 아니면 니가 한 푼 덜 갖고 둘 다 다치지 않을래?
상대가 참을 수 있는 선까지 뜯어낸다.
부부관계도 그렇다.
여기까진 괴롭혀도 참겠지? 여기까지 적응했으니 이제 살살 때려도 참겠지? 여기까지 욕하고 때리고 돈 뜯어도 적응했겠지?
가스라이팅을 하는 사람은 상대가 어디까지 참을 지 선을 확인하고 그 선을 낮추는 데 능숙한 사람이다.
100원만... 한입만... 싫으면 서로 죽어라 싸우고. 뭐가 최선의 선택이지? 한발 물러설 거지? 그래. 내놔.
매순간의 최선의 선택을 하다보면 어느새 참고 견디고 뺏기고 뜯기는데 적응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은 그렇게 노예가 된다.
이건 정치인의 착취에도 매우 중요한 스킬이다.
선을 보며 심하게 저항하면 본보기로 죽이고, 잘 적응한 노예에게 특혜를 줘서 노예의 계층을 나눠 지배한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인류가 갖고 있는 기본 특성이다.
이렇게 뺏기다 보면 폭발한다.
자연발화점이라는 게 있다.
스스로 불타오르는 온도.
그 온도를 넘어가면 불꽃이 없어도 불이 붙는다.
괴롭힘 당하고 뺏기고 뜯기다 보면 속에서 열불이 들끓다가 끝내 자연발화하게 된다.
한국인은 이 자연발화점이 매우 낮다.
419, 부마민주화운동, 518 등등등.
스스로 불붙어 들고 일어났다.
목숨 걸고 시위하는 것과 생업을 이어가며 구경하는 것 중 최선의 선택은?
나 말고 다른 이들이 시위에 참가해 세상이 바뀌면 나는 내일 하면서 돈 벌다가 바뀐 세상에서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되니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다.
모든 사람은 최선의 선택을 하는데 외국은 발화점이 높다.
한국보다 열 배 가혹한 수탈과 대학살이 일어나도 침묵하고 시키는 대로 했다.
반면 한국은 발화점이 낮다.
지켜보고 침묵하는 대신 떨쳐 일어나 정치를 바꿨다.
이건 굉장히 훌륭한 특성이다.
덕분에 현재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나라가 되었다.
“일어나! 일어나! 모두 한 번 해보는 거야!”
“끝내~ 이기 리 라~”
“울 오빠가 도와줄 거예요. 모두 힘을 내면 이겨낼 수 있어요.”
노래가 통일되지 않고 여기저기서 구호가 제멋대로 울린다.
정치인, 학자, 학생, 넥타이, 노동자, 주부, 모든 종류의 사람이 모두 모였다.
현장에서 확인된 국회의원만 100명을 넘는다.
“여러분 해산하여 주십시오. 전염병을 생각하십시오. 건강을 생각하십시오.”
“꺼져 정권의 개!”
“강남클럽이나 재수사해라!”
“치워! 버스 들어!”
경찰도 손을 못 쓴다.
지금 강제로 해산하려 했다간 맞아 죽을 분위기다.
200만을 넘긴 시위대가 계속 늘어났다.
민지민지와 뉴비는 거대한 소음에 휩쓸려 인터뷰를 포기하고 현장 분위기를 찍기 시작했다.
-되도록 전화 안하려고 했는데 큰일 났다. 광화문 거리에서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는데... 추산 200만 명이다.
“...... 좋은 거죠?”
-어. 전부 네 지지자들. 끓는점을 넘겼다는 거지.
“잘 됐네요.”
-더 모여들고 있어. 퇴근한 넥타이 부대가 뛰어들고 있다. 원주 광주 부산에서 관광버스 대절해서 단체로 상경하고 있고.
“...... 상징적인 사건이 되겠네요. 경찰은요?”
-강제로 해산하려 했다가 경찰이 맞아죽을 뻔 했다. 사람이 워낙 많아야지. 누가 지휘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혼자 나왔다고 일관되게 말하니 강제해산도 안 돼지. 어쩌면 500만 명 넘길 수도 있겠다. 각 시도에서도 사람들이 모이고 있어. 커뮤니티 분위기를 보면 천만 넘길 게 확실해.
“어. 좋네요.”
-문제는 코로나지.
“아. 아놔. 좆 됐네.”
-자칫하면 환자 백만 명 발생할 수도 있다. 넌 코로나의 아버지가 되는 거야.
말을 해도 진짜.
코로나의 아버지는 중국이지 왜 나야.
- 작가의말
작년 크리스마스이브 날씨가 어땠었죠? 방구석에서 글만 써서 날씨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네 훟훟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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