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변하지 않는 가치
메신저에 들어가 사진을 보고 난 후에야 기억났다.
대학교 1학년 때 술 마시던 친구.
질투 많은 놈. 부러워 하는 놈. 내가 망했던 과거엔 놀리고 뽐내던 쯧쯧충.
딱히 나쁜 놈은 아니지.
그냥 보통 사람이다.
남들 하듯 그렇게 적당히 젠체하고 적당히 뽐내고 적당히 질투하는 보통사람.
집안을 말아먹었던 나보다 나은 사람.
“어... 딱히 만나고 싶지는 않은데......”
-꼭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대학 동기들 모두의 의견을 가져왔다고도 하고... 벌써 1주일째 찾아오고 있습니다.
비서실도 고생했겠구나.
내가 성공한 후 수많은 인연거지가 달려왔고, 그를 컷팅하는 게 비서실의 일 중 하나였다.
찾아오는 사람 하나하나 다 만나면 아예 내 시간을 낼 수가 없으니.
비서실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의도를 파악한 후 나에게 보고하거나 그들 선에서 적당히 빠꾸시켰다.
전 재산 정리가 끝나고 비서실의 도움을 얻지 못하면 직접 쳐내야 하나.
“만나볼게요. 정자로 안내해주세요.”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뇨. 일 잘하시는 거 알아요. 제가 해결할게요.”
이 누나랑도 벌써 4년째 일하는 구나.
오상욱 같은 인연거지보다 훨씬 가까운 사람.
“오빠? 나가? 대학 동기?”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예하가 물어봤다.
“어. 너도 예전에 한 번 봤을 걸.”
“그래? 그럼 나도 나갈까?”
“아니. 쉬고 있어.”
“나도 나갈게. 내가 옆에 있으면 말 쉬이 못하지 않을까?”
우리예하는 예쁜데 생각도 깊지.
“태교에 안 좋아. 집에 있어.”
“아. 태교. 집에 있어야겠다.”
“나보다 애가 먼저구나. 나야 애야, 똑바로 말해봐. 나야 애야.”
“푸흡. 당연히 애지.”
“넹. 쉬셍.”
“넹.”
예하를 방에 두고 집을 나섰다.
푹푹 찌는 무더위가 나를 감싼다.
새소리 매미소리를 들으며 연못가 정자로 갔다.
안내를 받고 온 오상욱이 대학 때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맥주랑... 간단한 핑거푸드 좀 갖다 주세요.”
근처에 있는 비서실 직원에게 말을 했다.
“예.”
대충 주문을 하고 오상욱을 보니 연극하듯 활짝 웃는다.
“야.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이번에 동창회도 했는데 말이야 왜 안 나왔어?”
굉장히 친해 보인다.
필사적인 연기를 보니 한숨이 나온다.
“우선 앉자.”
단풍나무 그늘에 자리한 정자는 꽤 시원하다.
바로 옆에 있는 연못은 자치양식을 하기에 항상 수온을 낮게 유지해서 더욱 시원하다.
허벅지만한 자치들이 사람이 오자 강아지금붕어처럼 몰려들어 밥 달라고 펄떡거린다.
평화롭다.
자치를 보는데 비서실에서 카트를 끌고 왔다.
병맥주 10여개와 이런저런 과자, 마른 안주류를 챙겨와 정자에 깔아주곤 떠났다.
“한잔 할까?”
“어? 어. 좋지. 야. 옛날 생각난다. 대학 1학년 때 수업 째고 대낮부터 낮술하고. 당구장에서 짜장면내기 죽빵치고. 캬. 좋았는데.”
어. 좋았지. 인생 통틀어 가장 열심히 논 시간이었지.
나도 평범하게 살았다면 대학 4년이 가장 잘 논 시간이지 않을까 싶다.
한여름 대낮에 맥주 한 모금 마시니 젊어진 것 같은 시원함을 느낀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오상욱을 바라봤다.
딱히 나쁜 놈은 아니다.
비서실이 관리한 자료에 의하면 단톡방에서 몇 번 뒷담화를 했다지만 그거야 일반적인 사람이니까 그런 거고.
“쯧.”
“왜? 왜?”
오상욱은 내 눈치를 보며 맥주를 맛있는 척 마시느라 체할 것 같았다.
“무슨 일로 왔어? 일주일째 매일 왔다며.”
“어. 어... 그게.”
“나 바쁘다. 시간 많이 못 준다.”
바쁠 건 없지만, 회장님의 시간표는 알 수 없겠지.
“그래. 빨리 말할게. 이번 동창회에서 말이 나왔는데. 우리 졸업생들이 모여서 도봉대학교 연영과 재단을 만들기로 했어. 회비를 모아서 후배들 장학금도 주고 한국 예술계 발전을 위한 각종 기부사업을 하기로 했어.”
결국 이거였네.
씁쓸하다.
“어. 잘해봐.”
“그게 아니라. 함께 하자. 들어와라. 이제 회장일도 그만둔다며. 재단일 하면서 다들 정기적으로 모이기도 하고 가끔 낮술도 마시고 그러자. 예전처럼 말이지. 다들 널 회장으로 추대하기로 했어.”
얘는 날 그냥 백수로 보는 건가.
구글에서도 날 반드시 영입하겠다는 기사를 내보낸 것 같더만.
마소에서 보낸 제안서를 보여줄까 하다가 너무 유치한 것 같아서 관뒀다.
“나 고졸이야. 졸업 못했어.”
“에이. 괜찮아. 아무도 반대하지 않아.”
“바빠. 외국 나가야 할지도 몰라.”
“어 그러면 이름만 올려. 너도 우리과였잖아. 그냥 이름만 등록해줘.”
한숨이 나온다.
은행 연대보증 서달라는 소리랑 똑같네.
비서실이 많이 고생했겠어.
“내가 이름을 올리면 내 이름 팔아서 후원금 모으고 그 돈으로 행복한 공짜 생활 하려는 건가?”
“아. 아니야. 이게 친구를 뭘로 보고!”
친구가 뭘까.
연대보증 서달라는 친구는 뭘로 봐야 할까.
“장학금이나 연기계 발전을 위한 기부는 매년 아트스쿨을 통해서 이천 억 이상 하고 있어. 그러니 따로 할 필요는 없어. 기부 방향도 정해졌으니 너희에게 집행할 이유는 없고. 만약 진지하게 기부금이 필요하다면 미래그룹에 신청해봐. 다른 어디 굶어죽는 사람을 돕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면 기부금을 빼겠지.”
“야. 아 진짜. 전부 기부한다며. 네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주느니 그래도 우리가 받는 게 낫지 않아? 1%만 줘라. 시발 우리도 동창 덕 좀 보자. 너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냐?”
“그래.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니까 낫네. 그런데 1%면 300존데?”
상섬전자를 사달라는 건가?
“아.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1억만. 아니 10억만... 너한텐 티끌만한 돈이잖아. 나 말고도 우리 동기들도. 야. 연영과 나와서 100받고 카메라 들고 다니는 애들 불쌍하지도 않냐? 대졸인데 외노자보다도 못벌어. 시발. 그것도 아니면 편의점 알바인생이고. 그것도 아니면 백수고. 솔직히 니가 20대의 희망이라는데 가장 가까운 우리부터 챙겨주는 게 맞지 않냐? 정작 친구는 내팽개치고 무슨 20대의 희망이라고! 너무하지 않냐!”
후우.
인간 관계는 게임에서처럼 0~100 사이가 아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가 0이라면 인간관계는 -100 ~ 100 사이다.
씁쓸하게도 절반 이상의 아는 사람은 차라리 모르는 사람보다 나쁜 관계가 되더라.
그냥 내쫓으려다가 맥주를 한모금 마셨다.
연못의 자치들은 먹이를 주지 않자 지들끼리 유유히 헤엄치며 놀고 있다.
평화롭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라. 일자리가 필요해?”
“어? 어. 그 그래. 그......”
“미래 건설에 신호수 자리 많아. 8시간 서서 교통정리하고 하루 14만원. 주 5일 20일만 일해도 280만원 벌어. 주 6일 일하면 300 훌쩍 넘고. 2시간 연장해서 하루 10시간 일하면 연장수당 7만원 추가되고. 연봉으로 따지면 3500 넘네. 괜찮지?”
언제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안 할 뿐.
“야 시발. 노가다잖아. 대학 나왔는데 노가다나 해야겠냐?”
“그렇지? 그래서 노는 거지.”
내가 만든 일자리가 50만개다.
미래애니메이션이 2000명의 작화가를 뽑는 등 수많은 자회사가 사람을 뽑았다.
하지만 가장 많이 뽑은 건 농어촌 일자리다.
과수원, 논밭, 양식장을 정비하고 사람을 밀어 넣었다.
지방을 살리고 삶의 질도 높이는 등 미래를 보고 한 사업이고, 수익성은 거의 없는 사실상 기부사업이다.
처음엔 말도 많았지만, 이제와선 그 어떤 정치인도 해내지 못한 거라며 찬사를 받고 있다.
문제는 사람.
매년 사람을 모집해 일자리를 주지만 하려고 하지 않는다.
청년 실업, 과도한 경쟁과 극한의 스트레스, 부동산 등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내놓은 일이건만 하려는 사람이 없다.
농부. 어부. 천대받는 직업.
그리고 노가다.
인생 망한 인간들이나 하는 쓰레기 같은 직업.
그런 인식이 사람들 뇌리에 깊이 박혀있다.
“야. 대학까지 나왔는데 노가다 하는 건 너무하잖아.”
배가 불렀네.
하기 싫으면 굶어죽든가.
더 이상 말 섞기도 싫다.
“그런 거 말고... 전공 살릴 수 있는 일 좀 없을까. 아니 사실 노가다는 미래가 없잖아.”
“미래가 없을까...... 한국 사람은 노가다 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외국인들만 가득한 거 알지?”
“어. 들었어.”
“철근 형틀 같은 건 아예 한국인이 없다고 하더라. 거기에 네가 들어가면 어떨까?”
“어떻긴. 짱개새끼들한테 치어 죽겠지. 불체자들이 칼로 찌르거나.”
센세. 당신은 대체 어떤 세상에 사시는 겁니까.
“...... 소장이나 직원이 도면을 설명해줘도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공사가 개판 된다더라. 그래서 한국인이 환영받는대. 1년만 일하면... 적당히 적응하고 도면 볼 줄만 알면 금방 반장되고 금방 월 600 찍는다더라.
신호수하면서 공사판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껏 적응하고, 형틀이든 철근이든 가로수 조경이든 청소든 어디 하나 전문분야로 빠져서 1년만 고생하면 회사에서 일을 맡긴다고. 전부 중국애들, 베트남 애들만 있으니 한국인 하나 들어오면 맡기는 거지. 1년 해서 연 6000찍고, 반장일 하다가 여러팀을 니가 돌릴 수 있게 되면 사장되는 거지. 나쁘지 않잖아.”
10년 전만 해도 설대 컴공의 신입생 모집이 연속 미달사태를 맞았다.
그 정도로 프로그래밍이 인기가 없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초봉이 1억을 넘기고 그마저도 없어서 못 뽑는다.
어느 직업이 좋을까?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직업이 좋다.
전부 대기업에 들어가려고 몰리니 대기업에서는 열정페이라면서 반 년 후 1명 채용하겠다며 최저시급 이하의 인턴을 잔뜩 뽑아 노예노동을 시킨다.
전부 공기업에 들어가려고 몰리니 공기업도 똑같은 양아치 짓을 하고, 심지어 국가마저도 좋은 경험 해보라며 공짜노예를 뽑는다.
그 와중에 사람이 없는 직종은 수익이 좋아진다.
농촌 어촌이 그렇고, 노가다가 그렇다.
영원할 건 아니다.
사람이 몰리면 다시 수익이 낮아질 테니.
그래도 지원자가 대가리 터지게 몰려든 일을 찾느니 고개를 살짝 돌리면 당장은살기 좋을 텐데......
“야. 시발 너무한다. 내가 그런 일 달라고 여기 온 게 아니잖아.”
쉽게 변하지 않지.
대학이라는 매몰비용이 있으니.
“어... 알지. 그런 일이야 나한테 말할 필요 없이 네가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겠지.”
“그치? 우리 재밌었잖아. 우리 그때처럼 놀자. 어? 대학교 1학년 때처럼 말이야.”
대학교 1학년 때처럼 이라......
정자 테이블엔 빈 병이 6병을 넘겼고 마른 안주와 과자도 꽤 많이 사라졌다.
“어. 여기 엔빵 고고. 본관에 전화해서 계산서랑 현금영수증 떼오라...”
“개새끼야!”
농담이 안 통하네.
“에휴. 야 너 돈 달라고 온 거잖아. 일하긴 싫고 부자로 살고 싶고. 그거잖아.”
“... 어. 야. 한번만. 친구잖아. 솔직히 너한테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이잖아.”
씁쓸하네.
얼음 속에 들어있는 맥주를 꺼내 마시는데 시원하지 않다.
“야. 세상이 아무리 바껴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 일을 하지 않으면 도와줄 수 없어.”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세대.
개중 정신 나간 노인네를 대표삼아 싸잡아 욕하고 틀딱이라 비웃지만 그들은 열심히 일을 했고, 힘들게 성장했다.
“300만 청년실업 어쩌고 대졸백수 어쩌고 해도 노가다 자리는 항상 남아돌잖아. 9급 공무원의 두 배 벌 수 있는 길이 언제나 열려있어. 그런데 일을 안 해. 어떡하라고? 300만 대졸실업자를 위한 멋진 자리 300만개를 만들어줘야 해? 국회의원 300만 명 뽑게 만들까? 공무원 300만 자리 만들어? 나라가 망하지 그럼. 일해. 일하면 도와줄게. 그런데 그냥 돈을 달라고? 불가능해. 협상 끝.”
오상욱이 딱히 나쁜 놈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매순간 최선의 선택을 한다.
오상욱은 지금 이순간 나와의 인연을 미끼로 최대한 많은 돈을 버는 도전을 한 것이다.
도전에 실패했을 뿐.
“아 시발. 진짜. 진짜 너무하네. 야. 니가 그렇게 잘났냐? 그렇게 잘났어?”
오상욱은 짜증이 치밀었는지 벌떡 일어나며 맥주병을 들었다.
타다다닥.
10m 밖에서 조용히 서있던 경호원 둘이 달려와 순식간에 제압했다.
경호원 둘이 어떻게 할지 알려달라며 날 바라본다.
“안타깝다. 상욱아. 씁쓸하네. 그냥 내보내 주세요.”
“예.”
경호팀이 질질 끌고 가는데도 오상욱은 한마디도 못했다.
근육형님들이 덥칠 때 이미 전의를 상실했겠지.
오상욱이 끌려 나가는 모습을 보는데 가오리와 한민선이 보인다.
“언제왔냐?”
가오리가 다가오며 답했다.
“중간부터. 우울하구만. 마셔야겠어.”
가오리가 맥주병을 잡으며 앉자 그 옆에 한민선이 나란히 앉았다.
“둘이 왠일로 같이 오냐?”
“미래대학 일 때문에 오랜만에 만나서. 일 끝나고 밥 먹으로 왔지.”
가오리는 태연하게 말하는데 한민선은 당황한 것처럼 보인다.
“둘이 사귀냐?”
푸합.
“엉? 어어? 아냐.”
“진짜 아냐! 그냥 밥!”
정글이구만. 정글이야.
- 작가의말
짜장면 - 자장면 바껴도-바뀌어도
고칠생각음슴 국어국립원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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