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근면성실한 한국인
다음날 아침 병원으로 갔다.
예하는 데뷔곡 준비 때문에 성수동으로 갔고, 채인수와 황영석이 함께 했다.
병원 입구엔 마스크를 쓴 의사들이 줄맞춰 앉아 있고, 각자 피켓을 들고 있었다.
-병원을 돈벌이로 생각하는 악덕 기업 물러나라
-환자를 위해 병원은 자치해야 한다
-제발 우리 환자만 보게 해주세요
참 좋은 말들이 피켓에 적혀 있다.
수십명의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수많은 유투버가 영상을 송출하고 있다.
귀뜸받기로는 미래그룹에 대한 성토가 줄을 잇는다 한다.
그런데 진실은 저게 아니잖아.
돈을 더 써서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겠다는데 왜 저런 헛소리를 할까.
물 타기.
여론전.
밥그릇 챙기기.
협회의 사주를 받았음은 불 보듯 뻔한 일이고, 교수급들은 분명 더 좋은 자리를 약속 받았겠지.
혐오스러운 꼴을 보는 와중에 채인수가 앞으로 나가 준비한 선언문을 읽었다.
“무엇보다도 밀린 진료가 우선이라 생각합니다. 대화가 진행될 수 있도록 한 달만 도와주십시오. 입원한 환자분과 예약된 수술을 진행해주시면서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는 시간을 주십시오. 업무에 복귀하되 한 달 후에도 협상이 완료되지 않는다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을 지원하겠습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협상 내용과 상관없이 한 달 후 모든 의료인께 천만원의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원만한 해결을 위해 모두의 목소리를 듣겠습니다. 우선은 해산하셔서 예약된 진료를 봐주길 부탁드립니다.”
최대한 저자세를 취한다.
차라리 백제그룹과 싸우는 게 낫지, 의사집단과 싸우는 건 백 배 힘들다.
의사 대표인 듯한 나이 지긋한 몇몇이 나와 의견을 냈지만, 기자들과 유투버의 눈을 의식해서인지 매우 점잖고, 건설적인 대화가 오갔다.
의료진의 파업은 시작직전에 극적 타결되었고 곧장 해산했다.
다만 이제부터 진짜 전쟁의 시작이다.
해산하는 의사들을 보다가 병원장실로 갔다.
“저는 파업에 반대했습니다. 앞으로도 파업할 생각은 없고요.”
최태수는 노인들의 제안에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늙은 교수들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자네가 나서야 면이 서지 않겠나? 백제 병원의 자랑이며 다음세대의 대표 아닌가.”
“그래. 상대는 대기업일세. 우리 같은 이가 나서봤자 돈에 눌릴 뿐이야. 자네도 이대로 두고 볼 수 없지 않는가.”
“병원이 망가지고 환자가 고통 받는 걸 두고 볼 셈인가.”
노인들의 집요한 재촉에 최태수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뭘 원하시는 겁니까?”
“그대로.”
“지금까지처럼.”
“알지 않은가. 병원이 망하는 걸 볼 셈인가?”
“환자를 위하게.”
“알겠습니다. 다만 두 시간 후에 수술이 있습니다. 할 말만 하고 내려오겠습니다.”
“그래. 그래. 환자가 최우선이지.”
“말만 전하고 오시게. 우리가 뒷처리를 하겠네.”
종합병원에서 40년을 구른 노교수들의 응원을 받으며 외과장 최태수가 대표로 나섰다.
큰 키에 사내다운 시원한 얼굴.
세계 십대 외과의사로 항상 뽑히는 최태수가 의사측 대표다.
“반갑습니다. 최태수입니다.”
병원장실에 들어선 30대 후반의 최태수가 당당히 인사하고 좌중을 둘러봤다.
병원장과 미래그룹 중역들, 자신의 펠로우였던 정한영.
그리고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짧은 머리에 잘생긴 미남 한명.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츄리닝 차림 때문에 더욱 눈이 간다.
차분히 살핀 그는 담담히 의사 측의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저희는 바라는 게 없습니다. 임금을 올려주거나 근무시간을 줄일 필요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것. 그게 유일한 요구사항입니다. 이것만 지켜주신다면 모든 의료진은 성실히 환자를 돌볼 테고 사측은 이익을 얻을 겁니다. 모두가 좋은 결말이죠. 부탁드립니다.”
잠시 침묵이 지나고, 사측에서 가장 젊은, 아니 너무 어려보이는 미남이 입을 열었다.
“파업에 참가하지 않으신 걸로 아는데 어째서 대표로 오셨죠?”
“환자를 봐야 하기에 파업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환자에게 피해가 가기 때문에 올라왔습니다.”
환자를 위해서였군.
“홍의사님이 자살했습니다. 그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안타깝습니다.”
“우린 그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람을 더 뽑는 건데 그걸 왜 반대하시죠?”
“정경이의 자살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혹여 누군가 심하게 괴롭혀서 죽음으로 몰고 갔다면 벌을 받아야겠죠. 하지만 그게 아니라 스스로 못 버텨 생을 포기한 거라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백일당직. 태움. 과중한 업무시간. 미래그룹은 이걸 악습이라 생각해 없앨 생각입니다. 여기에 반대하시나요?”
최태수는 어린이의 말이 너무 허황되다 느꼈다.
세상을 모르고, 그저 꿈같은 환상만 쫓는다.
대답할 가치를 못 느껴 미래그룹의 사장인 채인수를 봤지만, 입을 다물고 대답을 재촉할 뿐이었다.
“후우. 100일 당직. 힘들죠. 힘든데, 그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실력이 모자라 구할 수 있는 환자를 잃는 게 더 괴롭습니다. 한명이라도 더 환자를 살리려면 내가 더 노력해야 합니다. 100일 당직? 전 레지기간이 지난 후에도 언제나 그때만큼의 노력을 합니다. 하루 네 시간 수면. 적응하면 할 만합니다. 의사는 영원히 노력을 멈춰선 안 됩니다. 수술하고, 복기하고, 논문을 보고, 학습하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환자들을 둘러보며 혹시나 놓친 것을 찾아야 합니다. 항상 노력하는 의사만이 환자를 살릴 수 있습니다.”
윤동욱은 일장 연설을 하는 최태수를 가만히 바라봤다.
외과장 37세 최태수.
잘생겼고, 키 크고 몸 좋고 목소리도 성우처럼 멋있다.
30대 나이에 외과장이며, 세계적인 외과의로 뽑힌다.
백제병원의 간판이며 기본급만 10억을 넘는 스타의사이자, 하루 18시간 이상 근무하고, 매일 열 시간 이상을 수술에 매달리는 성실함의 표본.
그런데 정신상태가 글러먹었다.
아닌가.
열혈청춘만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근성캐릭터인가.
이런 인간을 볼 때마다
씁쓸하다.
“100일 당직 하듯 평생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는 건가요?”
“당연하죠. 의학은 아직 걸음마 단계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한명의 환자라도 더 살릴 수 있습니다.”
“세계 10대 외과의라고 하던데 아직도 부족한가요?”
“의학에 끝은 없습니다.”
“그럼 교수님 밑의 의사들은 더 많이 부족하겠네요.”
“그렇죠. 하지만 다들 열심히 따라와 주기에 고마울 따름입니다.”
마인드가 참 훌륭하네.
청춘만화 주인공이야 아주.
“세계 10대 외과의에 뽑히고서도 100일 당직할 때 만큼이나 긴 근무시간을 갖고, 그러는 게 당연하다라. 수술 스케줄을 보니 굉장히 성실하다는 것을 알겠더군요. 그렇다면 교수님 밑의 의사선생님들도 비슷한 스케줄을 소화하십니까?”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절 따르는 후배들이 스스로 노력합니다.”
강요하지는 않는다!
이 시발!
이런 개좆같은 소리를 들어야 하나!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즉, 홍의사님의 자살은 적응하지 못한 개인의 문제겠네요?”
“괴롭힘이 없었다면,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의사는 그 생활을 버텨내야 발전할 수 있습니다.”
“환자를 위해?”
“환자를 위해.”
짜증이 늘고 늘어 분노로 치솟기 직전이다.
스읍, 하.
스읍, 하.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한바퀴 돌고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로 갔다.
환자들이 차를 끌고 와 주차해 본원 접수실로 들어가고, 마을버스가 도착할 때마다 수십명의 환자가 우루루 내린다.
환자.
환자를 위해.
맞는 말인데 너무 짜증이 난다.
“의사가 되려면 수능을 잘 봐야겠죠. 전교급으로 공부 잘해야 의대에 갈 수 있으니까요. 초중고 12년을 죽어라 공부해서 의대에 갑니다. 이후 의대가 6년이지요? 6년간 죽어라 공부합니다. 그 후 인턴 1년. 그 다음엔 레지던트 4년. 군의관 3년도 버텨야겠네요. 26년 걸렸네요. 그 다음엔 전문의. 전문의 중에서 특출난 이는 교수. 최의사님은 그렇게 살아오셨죠?”
“얼추 맞습니다.”
“그 시간동안에 의사 선생님 본인의 인생은 어디 있습니까? 학교 다닐 땐 공부에만 매달려야 했을 테고 이후에도 공부만 하고, 그 후에도 잠도 못자며 환자를 보고 논문을 찾고 수술을 연습해야 하는데. 이게 의사의 삶입니까?”
“의사의 삶은 의술과 환자에게 바치는 겁니다.”
아 짜증나.
파업을 주도한 늙은 똥덩이들이 직접 안 오고 최태수를 대표로 보낸 이유를 알 것 같다.
짜증을 나게 만들어 암살하려는 수작인가.
꽉 막혀버린 열혈청춘만화 주인공이라서 말이 안 통한다.
원론적으로 옳은 말만 하니 막말하기도 힘들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차분히 말했다.
“저희가 하고자 하는 것은 의사 본인의 삶을 사람답게 만들어 주기 위함입니다. 인턴과 레지던트를 더 뽑아 업무 과중을 줄이고, 당직시간까지 포함해서 주 5일 40시간 근무를 맞춰주려는 일입니다. 의사에게 개인의 삶이 있는 직장을 만들어주려고 사측에서 아무런 이득 없이 손해를 감수하고 하는 일입니다. 주 40시간을 맞춰주되 스스로 공부하는 건 막지 않겠습니다. 근무 시간 아닌데도 병원에 나와서 환자를 살피고 공부하고 전문의를 따라다니며 배우는 건 막지 않는다고요. 오히려 연장근무로 인정해줘서 돈을 더 줄 거고요. 순수하게 사측에서 손해를 감수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막을 겁니까?”
최태수가 잠시 생각했다.
“안됩니다.”
아 씨발. 벽을 보고 얘기하는 게 낫지.
“왜요?”
“인턴 레지 합쳐서 5년. 그 시간동안 정말 많은 걸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전문의가 될 수 있습니다. 전문의란, 그 분야의 최고 명인이란 뜻입니다. 주5일 근무로 현재 전문의 수준을 갖추려면 20년은 레지던트 생활을 해야 할 겁니다. 환자는 의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벽이 말했다.
니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고.
“즉, 의사들의 실력향상을 위해선 현재의 과중한 업무가 옳다는 뜻이네요.”
“그렇게 되나요? 허.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군요.”
“훌륭한 의사를 키워내기 위해선 휴일 없이 매일 20시간 근무가 당연하다는 뜻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노력했으니 30대 젊은 나이에 그토록 훌륭한 기술을 얻었겠죠. 그런데 병원의 다른 의사들도 그렇게 사십니까?”
“그건 제가 말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의사님의 태도가 직렬 후배들에게 압박이 될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따라와 주는 후배가 있고, 못 따라와서 옮기는 후배가 있습니다. 그건 제가 어찌 할 수 없습니다.”
스읍, 하.
스읍, 하.
반박할게 산더미 같은데 자료가 부족하다.
“후우. 알겠습니다. 의사측의 의견은 알겠고요, 저희 입장을 정리해서 근시일내에 다시 대담하죠.”
“네.”
최태수는 주위를 둘러봤다.
혼로 입을 열던 잘생긴 젊은이가 제멋대로 회담 끝을 선언했는데 다들 가만히 있다.
‘직급이 높은가.’
뉴스 같은 거 잘 안 보는 최태수는 윤동욱의 정체를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수술이 있어서 가보겠습니다.”
“어어. 그래요. 가보시고, 입장을 정리해서 다시 만나죠.”
후덕한 병원장 김학춘이 최태수에게 굽신굽신 인사를 하고 내보냈다.
잠시 최태수가 나간 문짝을 보고 있다가 정한영을 봤다.
“정의사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우리가 하는 일이 잘 못 된 거라 생각합니까?”
정한영의 깊은 한숨.
“최 교수님은 참의사십니다. 전 세계 의료계 모든 이가 압니다.”
“그럼 모두가 최씨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무리죠. 자기 삶이 아예 없는 분인데, 다들 그렇게 살긴 힘들죠.”
“그럼 저희 미래그룹이 나아가길 원하는 방향은 알겠나요?”
“예. 이해했습니다. 돈을 손해 보더라도, 의사의 숙련도가 약간 떨어지더라도, 숙련의에게 인간답게 살 시간을 주겠다는 뜻이지요.”
“이해하셨으면 사람을 모아보세요. 우리는 기존 의사들의 협박에 굴하지 않을 생각이고, 의사 충원을 거부하는 의사들 대신 우리 뜻에 맞는 의사들로 채울 겁니다. 모두가 최씨랑 같진 않겠죠. 현재 의사의 세배수. 모아보세요. 물론 그룹에서도 따로 모을 건데 의사들 성향은 의사가 더 잘 알겠죠.”
“네. 알겠습니다.”
전문의 2년차 정한영에게 임무를 맡겼다.
“동욱아, 다음 일정 시간이야. 건축사무소 가야 해.”
“벌써요? 병원은 다음 주쯤에 다시 오죠. 그때까지......”
병원장과 정한영과 인사하고 병원을 나왔다.
그들 각자 할일을 잔뜩 부여받았고, 우리는 우리의 일이 있다.
채인수의 큰 차에 타 병원의 넓은 정원을 내려왔다.
돌아보니 저 멀리 보이는 종합병원은 너무도 컸다.
근면성실한 한국인 최태수.
지금도 저 병원 어딘가에서 세계최고의 의술을 발휘하고 있겠지.
- 작가의말
바들바들 떨면서 올림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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