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커튼뒤의 그림자
“후에엥. 미안.”
“아니 괜찮아.”
“오빠, 나 때문에 끌려가 고문당하는 거 아냐?”
“아니. 걱정 마. 한국에서 그런 일 없어.”
“그래도...”
예하의 방송사고와 동시에 온갖 기사가 쏟아졌다.
미래 그룹의 소유주.
방송된 목소리가 나라는 것이 여기저기서 증언이 쏟아졌다.
채인수의 목소리가 아님이 확인 되었고, 과거 조준선의 괴담으로 떠돌던 윤동욱 배후설이 사실이 되었다.
윤동욱의 초중고 생활과 형편없는 성적, 군대 선후임의 인터뷰가 줄을 이었다.
세계 최고의 부자.
24세 윤동욱.
너무 어이없어서 오히려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진실.
대통령과 통화해 휴가가 끝나면 만나기로 해 수습했지만 언론은 손 쓸 수 없다.
정부에선 미래쇼핑 출시 후 접촉해왔고, 지금까지 채인수가 조율해왔다.
다만 해외 본사의 주인은 펀드로 감춰졌기에 정부에서도 심증만 가질 뿐 몰랐는데 이번에 들켰다.
“오빠 이제 큰일 난 거 아냐? 잡혀가서 다 뺏기고......”
“에이. 민주주의 사회에 무슨.”
“아니면 대한민국의 배후지배자라는 하나회 군인들이 달려와서 총으로 위협하면......”
“그건 좀 무섭네.”
“그치. 힝. 이게 다 나 때문에.”
예하의 걱정과 자책이 끊이지 않는다.
이게 다 세뇌된 뇌 탓이다.
영화에서 매력적인 악역은 필수다.
악역은 강해야 하고, 선명해야 하고, 잔인해야 한다.
악역이 두루뭉술하면 인기가 없고, 착한 듯 나쁘면 흥행성적이 별로다.
다양한 악역 중 적자생존, 시청자의 선택에 의해 성공하는 악역공식이 탄생한다.
성공한 작품의 악역은 모두 무시무시하다.
만화도, 소설도 비슷하다.
모든 대중매체는 명확한 악역을 내세우며, 묘사의 한계, 등장인물의 한계 때문에 절대무적의 악역을 만들어낸다.
커튼 뒤의 그림자.
세계 뒷편의 진정한 지배자.
이런 매체만을 반복해서 보다보면 뇌가 세뇌되어 버린다.
“예하야. 절대 지배자는 존재하지 않아. 각자 돈 벌려고 최선을 다해 살 뿐이야.”
“그러니까. 한국의 지배자인 하나회가 오빠를......”
“예하야 한국 부자 순위 알아?”
“어?”
“한국의 부자 1위에서 100위까지 나열하면 거의 다 아이티 바이오야. 만약 소설에서처럼 신기술을 만들면 재벌이 몰래 잡아다 죽이고 소송 걸어서 빼앗았다면 부자순위가 이렇게 나올 수 있었겠어?”
“그런가? 아니지. 오빠가 말했잖아. 사주가 오래된 기업은 사장의 재산을 법인에 숨긴다고.”
예리하군.
똑똑해.
쓸데없이 현명해.
“재계 2위 태우가 부도 맞았고,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투산 그룹은 지금 사망 직전이야. 음모론처럼 재벌이 무조건 나쁜 놈이라면 새로운 재벌이 나와서도 안 되고, 기존 재벌이 망하지도 않겠지. 음모론은 없어. 각자 최선을 다해 돈을 벌려고 하다가 성공하면 더 큰 부자가 되는 거고 실패하면 망하는 거야. 무조건은 없어. 그러니까 겁먹지 마.”
“하지만 미국은 다르잖아. 수백 년간 세계를 지배한 지배자들.”
“그것도 음모론이지. 세계 원유를 장악한 세븐시스터즈? 양아치 짓을 하며 돈을 긁어모았지만, 유가파동 때 전부 망할 뻔했어. 그 중 절반은 망해서 흡수됐지. 그 때 죽을 뻔 했다가 겨우 살아남은 이들이 지금 돈을 많이 벌고 있을 뿐 영원할거란 보장은 없어. 로스차일드 지배설? 영국 로스차일드나 미국 쪽은 돈 잘 벌고 힘 쎄. 그런데 프랑스 로스차일드랑 독일 로스차일드는 2차 대전 때 망해서 인공호흡기로 연명하고 있어. 동유럽에 분가한 로스차일드는 시골 농부고.
누구 하나가 지배자가 아니야. 지금 재벌도 끝없이 경쟁하고, 경쟁에서 승리한 쪽이 더 큰 재벌이 될 뿐이야.”
“어...... 모르겠어. 내가 아는 상식이......”
“세계 6위 기업 페이스북이 매출도 없는 우리한테 죽을힘을 다해 소송을 걸었잖아. 자기네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상식선에서 움직일 뿐이야. 니 상상 속 음모론 같은 짓은 못해. 우리도 상대가 어느 선까지 싸움을 걸 줄 예측할 수 있었으니까 미리 대응할 수 있었고. 신흥부자? 죽이고 빼앗아야지. 이런 건 불가능해. 우리가 당해주지도 않지. 달동네 골방에 혼자 살며 100조원을 들고 있으면 가능할 테지만, 우린 벌써 너무 유명하고 너무 여러 가지 사업을 펼치고 있어. 옛날 군사정권처럼 내놔, 하면 드리겠습니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걱정 마.”
“어... 정부의 움직임도 상식선에서 움직일 거란 거야?”
“내가 위법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마구잡이로 잡아가둘 수 없어. 지금 언론사가 하는 것처럼 악담을 늘어놓는 게 고작이야. 그러니까 안심해.”
“어. 그래. 안심할게.”
예하가 껄쩍찌근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장들이 모여 회의하고 부모님과 친척들을 안심시켰다.
회사 기획실에선 이미 예전에 최악 혹은 최상의 시나리오를 짜놨다.
그 시나리오별 대응을 친척들에게 얘기하며 별거 아니라고 이해시켰다.
아놔 세이셀까지 와서 뭐하는 거야?
예하는 대응방안에 맞춰 별거 아니라고 해명하고 개인방송을 계속했다.
온갖 근심 걱정을 춤과 노래로 해소하는 예하.
멀리서 예하의 춤을 보며 뉴스를 보면 악담으로 가득하다.
“이 새낀 좀 심하네.”
고영구 기자?
예하의 방송을 프레임단위로 캡쳐해 굴욕사진, 접힌 뱃살, 접힌 엉밑살 등 별 개좆같은 사진과 기사를 5분 단위로 쏟아낸다.
“뭐하는 새끼지.”
기자를 검색해보니 미친놈이다.
10여 년 전 여가수 귤이 공연 중 가슴이 노출되었을 때 모자이크 없이 신문기사를 낸 미친놈.
놀랍다.
이런 짓을 한 놈이 10여년 후까지도 기자 짓을 하며 돈벌어먹고 산다는 게 놀랍다.
-네. 미래신문입니다.
“고용구라는 기자가 있어요. 그 새끼의 사돈의 팔촌, 9족을 전부 조사해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행한 죄나 불법적인 일을 모조리 조사해주세요. 신문기사 특집으로 내고, 고소할 수 있는 모든 걸 최대한으로 고소해요.”
음모론?
고영구 입장에선 내가 음모론의 지배자겠지.
실상은 아니다.
각자 가진 힘의 한도 안에서 때리고 싶은 놈을 때리는 거다.
다른 글로벌 기업들도 어떻게든 날 때리려 하고 있고, 난 상식적으로 방어하는 거다.
고영구씨, 조회수로 돈 벌려고 남을 죽이는 고영구씨.
막을 수 있으면 막아봐.
본사 상임이사 겸, 회계팀장 황영석은 휴가를 올 수 없었다.
다른 사장들은 놀지만, 회계팀이 가장 바쁜 12월에 사장이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모든 회계자료를 정리하고, 미래블록으로 거래되는 특성상 국가별 회계를 각국의 법에 맞춰 따로 산출해야 한다.
미래 그룹 전체는 총 2조원의 적자를 봤다.
미래 펀드에서 번 돈을 쏟아 붓고도 미래 그룹 본사, 정확히는 윤동욱 개인계좌에서 2조원을 빼서 투자했다.
미래 쇼핑과 미래 메신저에서 돈이 들어오고 있지만, 아직은 적자가 맞다.
“지랄할 거 같긴 한데.”
전 세계 정부가 다 지랄하겠지.
세금 한 푼 내지 않는다고.
사실인데 어쩌라고.
회사가 적자났는데 법인세를 어떻게 내라고.
“동욱이는......”
개인 명의로 쓴 돈은 거의 없다.
가족과 친척에게 준 돈은 코인으로 줬기에 동욱이 책임이 아니다.
받은 사람이 코인투자를 통한 투자이익으로 신고하면 된다.
그 외에 1년 간 개인이 쓴 돈은 1억 안팎.
대부분의 돈을 지분 100%인 본사자금으로 썼으니 문제될 건 없다.
문제될 건 없는데......
“지랄하겠지? 세계 1위 부자인데 세금을 이것밖에 안낸다고 하면. 세무서에선 분명 언론에 흘릴 테고.”
법적 문제는 없는데 지랄당할 게 확실하다.
압수수색이야 통과의례고 방어준비도 완벽하지만 언론에선 희대의 탈세범으로 몰아갈 게 분명하다.
“반 년 후 소득신고까지 돈 좀 쓰라고 할까? 얘는 왜 이렇게 겸손해서 자기 차도 안 사는 건지. 젊은 나이면 비싼 보석도 사고 차도 사고 현찰을 뿌리고 스웩도 좀 사고 그러고 싶지 않나.”
법인세를 정리하는 황영석의 고뇌가 깊어지고 있다.
세이셀 휴가를 1주일 연장해버렸다.
갑작스런 공개로 정신을 많이 썼으니 좀 더 쉬어야겠다.
사장들은 먼저 돌아갔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기자의 습격을 받아야했다.
채인수가 대표로 기자회견을 했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대답, 세계 1위 부자에 대한 속 시원한 답변은 나오지 않았고, 미래 그룹 사장들은 모두 집요한 파파라치의 표적이 되었다.
“한국 가기 싫다.”
형들의 하소연만 들어도 얼마나 끔찍한지 알 수 있겠다.
그래서 더 쉬어야겠다.
언론에서 내 초중고 사진을 짜집기 해 얼토당토하지 않는 다큐를 만들었고, 기억도 안 나는 인간들이 내가 어쨌느니 하며 별의별 인터뷰를 하고 있다.
군대 전역 후 1년 만에 미래그룹을 만든 데에 온갖 음모론이 돌고 있다.
외계인설, 록펠러 배후설, 미국 국적 취득 설 등등등.
그리고 예하에 대한 비난은 더욱 다채로워졌다.
꽃뱀, 보슬아치, 취집 등 듣기만 해도 열 받는 욕이 난무한다.
법무팀 힘내. 다 조져줘.
“불쌍한 예하.”
“오빠가 더 불쌍해.”
“아니야 니가 더 불쌍해. 넌 잘못한 거 하나 없잖아.”
“오빠가 더 불쌍하지. 이렇게 위대하고 선한데 세상 사람들이 몰라주잖아. 난 그냥 오빠가 하란대로 대본만 읽을 뿐이고.”
“...... 나에 대해선 우호적인 게 더 많은데?”
24살에 추정 세계 1위 부자.
욕도 많지만, 인터넷에선 엄청난 추앙을 받고 있다.
24살에 페이스북을 줘패면서 세계 최고의 회사로 발돋움하는 회사의 주인이라니.
한국인이라면 국뽕이 차오르고, 전 세계 젊은이라면 롤모델이 되고픈 남자다.
게다가 얼굴도, 외모도 나쁘지 않고.
언론사는 어떻게든 음해하려 하지만, 이미 수많은 팬까페가 세워졌다.
반면 예하는.
“내가 속상하다. 우리 불쌍한 예하. 남자 잘못 만나서 고생하네.”
“에? 헤헤헤. 그럼 더 잘해주기.”
“어.”
“더더더. 더더 잘해주기.”
“네.”
“더더더더더더더...”
“1절만 합시다요.”
“네요.”
쉬자.
상처받은 영혼을 달래야겠어.
부모님과 상의하고 비서실에 일정을 짜 달라고 해서 마다가스카르의 관광도 다녔다.
크리스마스를 마다가스카르에서 보내고 해가 바뀌기 전에 복귀했다.
와글와글와글.
기자들이 가득한 인천공항.
전세기에서 내려 따로 마련된 통로에서 곧장 차에 올라탔다.
‘기자님들 수고요.’
당연히 엄청난 비난 기사와 공항의 특혜 의혹 등 별의별 음모론이 튀어나왔다.
“경호팀과 함께 가도 되요?”
-접객실 앞까지 두명 허용하겠습니다.
“인터넷 방송해도 되요?”
-아니. 무슨 말입니까? 안 되죠.
“그럼 핸드폰 들고 가는 건 되죠?”
- VIP 앞에서 꺼놓으시면 됩니다.
“그럼 폰로이어가 작동하지 않는데.”
-각하와의 대담을 녹음할 생각입니까? 절대 안 됩니다.
“이게 날 지키려고 녹음하는 건데. 막말로 거기 가는 복도에서 납치해 내 전 재산을 내놓으라고 고문하면 어쩌려고요.”
- 지금 청와대의 명예를 무시하는 군요. 그런 일 절대 없습니다.
“절대는 절대 없죠. 포기. 안 만날래요. 법적 문제는 없더군요.”
비서실장과의 협상이 결렬되었다.
위에 보고하고 욕을 잔뜩 먹은 비서실장은 퉁명스럽게 핸드폰을 켜 놓는 걸 허가했다.
끝까지 반대하지. 귀찮게.
결국 청와대에 불려갔다.
대통령과 점심만찬을 하며 상식적인 대화와 겉치례뿐인 칭찬이 오갔다.
은연중 이권을 요구해왔지만, 특혜 받을 게 없다며 거절했다.
현대의 성리학자는 대통령을 위대한 분, 보이지 않는 포스가 넘쳐나는 고귀한 분으로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보통 사람이다.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보통 사람. 자기에게 최대이득이 되는 선택만을 반복해 살다보니 저기까지 올라간 보통사람.
똑똑한 사람이지만 어마어마하게 특출난 사람은 아니다.
현대 성리학자의 세뇌에 빠질 필요 없다.
대통령의 억지 요구에 들어줄 생각 없다.
세상은 상식의 한계 속에서 움직인다.
정부의 특혜는 기업의 비자금으로 보답 받는다.
일방적인 관계는 전혀 없다.
국민의 세금이 특정기업에 쓰이고, 그 기업은 일을 진행해준 공무원과 정치인에게 뒷돈으로 보답한다.
상부상조, 윈윈 전략.
전임 대통령이 기업들에게 후원금을 수금해 즐기다가 쫓겨났지만, 후원금을 낸 기업들은 정부의 비호를 보답으로 받았다.
정부의 비호를 원하지 않으니 정부에 바칠 것도 없다.
다음날부터 언론의 비난이 더욱 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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