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별이 빛나는 밤에2
예하와도 잔을 부딪치고 보니 한민선과 나만 말하고 있었다.
나이차가 세 살 나는 예하와 차정미는 조용히 고기만 굽고 있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나이 많은 사람들만 대화하는 이런 분위기.
싫다.
한국 사회에 깔린 이런 개떡 같은 유교문화는... 돈으로 못 없애겠지.
지글지글 익은 토마호크 스테이크를 예하가 꺼냈다.
요리사 아저씨가 주고 간 거대한 칼로 써는데 겉은 까맣고 속은 빨갛다.
“아아. 망했어요.”
“다시 불러올까?”
“아니야. 계속 해볼래. 재밌어. 도전!”
“그래라.”
예하의 기를 붓돋아주고 고개를 돌리다가 차정미와 시선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차정미가 벌떡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갑자기 왜?”
“아니. 그게... 도움을 줘서.”
“도움 준 거 아니야. 도와줄 거였으면 도봉대 전체에게 기회를 줬겠지. 내 동기들도 혜택 못 받은 애 많잖아? 그냥 재능이 있어서 도와준 거야. 우리 회사 아니어도 다른 데서 채 갔을걸.”
내 말에 차정미가 혼란스런 눈을 흔들었다.
“그 그래도 감사합니다.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어. 그래.”
편히 말하라고 하려다가 말았다.
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자주 만나야 편해질 텐데 그러기엔 예하가 너무 좋고.
“정미는 진짜 재능이 있어서 뽑힌 거야. 선생님들도 다 칭찬하고 현장에서도 좋아하고. 나야말로 옛 기억으로 뽑힌 거지.”
한민선이 끼어들었다.
거기엔 부정하지 못하겠다.
말없이 소주 한잔 마셨다.
“사실 있잖아. 이 말 꼭 하려고 불렀어. 사과하려고.”
노노노씨. 예하 앞에서 이상한 얘기는 하지 마.
“동욱아 기회 준거 고마운데...... 나 그만해도 될까?”
그런 말이면 해도 돼.
“왜?”
“그냥... 내 한계를 알았다랄까. 나 연기 참 못하더라.”
한민선이 씁쓸한 표정으로 술을 홀짝 마셨다.
차정미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에요. 선배님. 열심히 하면 될 거예요.”
응 그거 아니야.
위로라는 건 그런 싸구려가 아니야.
예하도 나도 아무 말 못했다.
남의 인생인데, 내 생각 없는 위로에 포기하지 못하고 질질 끌게 되면 망가진 인생은 니가 책임질 거야?
막무가내로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컴플렉스 때문에 대책 없이 잘 될 거라고 말하는 것만큼 못된 짓도 없다.
포기하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대책 없이 위로하려면 실패할 경우 보상할 2억 정도를 위로비로 미리 주면서 위로해야 한다.
우리가 침묵하자 차정미는 왜 안 도와 주냐는 표정으로 보다가 입을 닫았다.
난 그냥 말없이 술잔을 채워주고 잔을 들었다.
챙. 챙. 챙.
“어? 고기타는 냄새 난다.”
“히익. 탔다. 탔어!”
한참 고기를 뒤집고 탄 부분을 잘라내고 난 후 한민선을 봤다.
표정은 처음보다 훨씬 후련해 보였다.
“취직할거야?”
“어? 응. 그래야지. 그보다 너한테 미안해서 어쩌지. 나한테 쓴 엔터 손해만 1억 넘을 텐데 마음대로 막 그만둔다고 하고.”
“엔터는 원래 그런 거야. 그러다가 스타 하나 나오면 만회하는 거고.”
“그래도......”
“미안해 하지마. 니 의사 묻지도 않고 내가 떠안겨준 거잖아.”
“어... 좀 뻔뻔해도 되는 거지?”
“응.”
헤헤 웃으며 한민선이 랍스타 집게발을 들어 막 쑤시며 살점을 찾았다.
애써 활기차 보이는 모습이 어딘가 외로워보였다.
“그런데 원래 연기하려고 했어?”
“어? 어. 옛날에 말했잖아.”
“옛날 언제......”
아앗 타임! 얼음!
옛날얘기 하지마.
예하 넌 귀 쫑긋 세우지마.
“난 그때 말 기억해서 이런 기회를 줬나 싶었는데.”
그만해.
그만.
“해보니까 안 돼?”
“모르겠어. 고딩 때는 막연히 연기가 좋겠다 싶었고, 대학 와서는 나도 잘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직접 나가보니 안 되드라. 단역인데도 짧은 대사도 못 치고. 카메라 앞에선 피노키오처럼 춤추고. 아무리 연습해도 안 돼. 헤헤헤.”
처연히 웃는데 안아주고 싶다.
그래서 예하를 안았다.
“저런. 쯧쯧쯧. 안 됐네.”
“우이씨. 안 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러면 진작 그만두지.”
“너한테 미안하잖아.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도 알고. 그런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받았어야 할 기회라고 생각하니까 너무 미안하더라고.”
“그래 너도 마음 고생 많이 했다.”
“누군 1년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고 욕할지도 모르겠지만, 미안해서 못하겠어. 차라리 매니저나 실장님 없이 혼자 단역 찾아다니며 하면 몰라도, 회사에서 오디션 잡아주고, 훈련시켜주는데 못하니까 현장에선 미래그룹이 압력 썼다는 뒷말도 나오고 그래서 막 미안하더라.”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우연히 옆집 소꿉친구 여자가 알고보니 세계 최고의 재능? 이런 건 없다.
심지어 예하마저도 세계를 휩쓴 노래가 없다.
한민선을 도와주려고 별 생각 없이 밀어줬는데 그게 얠 힘들게 할 줄 몰랐다.
“나야말로 미안하네. 물어보고 했어야 했는데.”
“아냐. 신경써준 거 알아. 고마워. 완전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야야. 언제 버렸다고 그래?”
“1학기 끝나고 고향집 간다더니 연락도 안 되고 어느 날 갑자기 군대 간다고 하고. 이게 버려진 거지.”
“말했잖아. 올에프빔 맞고 아빠한테 맞았다고! 군대 가라고 해서 생각 없이 해병대 지원했는데 1주일 만에 끌려갔다고.”
“휴가 나와서 연락도 안하고. 사람 인연을 어쩜 그렇게 칼 같이 정리하냐.”
“아니 너 남친 생겼는데 전 남친이 연락하면 이상한 놈이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새남친을 만나냐.”
아.
노노노랑 싸우다가 옆을 보니 예하가 생글생글 웃고 있다.
“그만 할게.”
“왜? 재밌는데 계속 해.”
“아니. 그만하자. 민선아 그만.”
“어.”
“아냐. 두 분 되게 보기 좋아요. 계속 해요.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정말 행복합니다.”
“어, 어. 그래.”
예하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더 하라고 압박하는데 시키는대로 해야겠다.
“그래도 기회는 계속 될 텐데 더 해보지. 연기업계는 앞으로 계속 커질 거야. 우리가 찍는 드라마가 열 개 넘겼잖아.”
방송사가 망하는 거랑 상관없이 컨텐츠 시장은 계속 커진다.
미래 애니메이션이 확장하는 것처럼 미래 스튜디오는 제작에 들어간 드라마가 열 개를 넘겼다.
컨텐츠는 아무리 많이 찍어도 이득이다.
차정미가 끼어들었다.
“맞아요. 언니. 여기저기서 사람 모자라다고 난리잖아요. 연기라는 게 꼭 그렇게 한 가지 인물만 필요한 게 아니라서 다양한 개성이 필요해요.”
“알지. 그런데 연기 자체를 못하는데 거기 붙어있는 게 너무 미안해. 봐바. 괜찮아요? 마이 놀래쬬?”
푸흡.
후헤헤.
한민선이 갑자기 로봇 연기를 하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야. 잘하네. 로봇연기 일부러 하기 힘들 텐데.”
“진심을 담아 잘하려고 한 건데 전부 이렇게 로봇어투가 나와.”
숙연.
로봇 연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니었구나.
“어......”
에라 모르겠다 PPAP.
짠.
한잔 마시고 멍하니 숯불을 봤다.
붉은 숯과 가끔씩 확 올라오는 노란 불빛, 까맣게 타들어가는 고기.
연못가 여치소리, 때 이른 귀뚜라미 소리, 가로등 아래 정신 나간 매미소리, 그리고 개구리 소리.
“내 재능이란 뭘까. 혹시 난 육상에, 아니면 미술에 엄청난 재능이 있는데 놓치고 사는 게 아닐까. 이상한 길로 가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스물다섯이 된 게 아닐까. 뭐 요즘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아.”
아 몰라. 너랑 말 안 할래.
술잔을 들고 시야를 펼치는데 저 멀리 본관 쪽에서 사람들이 다가왔다.
“여~ 핸플~”
가오리와 닥똥부부다.
같이 퇴근했나.
“내 친구들인데 합석해도 돼?”
“어어. 너희집이잖아. 당연히 되지.”
한민선과 차정미의 동의를 얻은 후 불렀다.
“같이 먹자.”
“안녕하세요. 가오리입니다.”
동그란 가오리가 싱글벙글 웃으며 인사했고, 닥똥 부부는 낯을 잔뜩 가리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전에 본 적 있지 않아요? 핸플놈 전 여친 아니신감?”
“맞아요. 노노노.”
“맞네. 가가가가네. 노노노.”
뭔드립이냐 가오리놈아.
“일단 자기소개는 끝났으니까. 눈치게임 일.”
갑자기?
“이.”
“삼.”
가오리가 갑자기 선창하자 닥똥 길영주가 호로록 일어서며 외쳤다.
“사.”
“사.”
나랑 한민선이 동시에 일어났다.
“유후~ 러브샷이다 러브샷!”
가오리놈아. 하지마.
미친놈아.
예하가 너 째려보는 거 안 보여.
시야가 없는 가오리가 맥주잔에 소주 한잔, 위스키 한잔, 맥주 나머지를 채우며 벌주를 만들었다.
옆에서 닥똥놈은 숫기 없이 고개 숙이고는 똑같이 만들었다.
이 새끼들, 눈치도 없고, 시야도 없어.
“자. 어색할 땐. 러브샷!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가오리놈, 아직 첫잔도 안했는데 취한 것 같다.
나랑 한민선이 엉거주춤 잔을 들고 불안한 시선을 마주할 때 예하가 벌떡 일어섰다.
“언니. 제가 흑기사 해 드릴까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생글생글 웃으며 질문하는데 도저히 거부하지 못 할 포스가 흘러넘쳤다.
“어? 어. 부탁해. 고마워.”
“헤헷. 오빠랑 러브샷이다.”
예하가 날 확 껴안고 얼굴을 붙이더니 목 너머로 팔을 감아 술을 마셨다.
예하를 마주보며 원샷.
“크으. 쓰다.”
“오빠오빠. 안주.”
예하가 소고기를 입에 넣어주고, 나도 똑같이 해주고.
그 후에 예하가 테이블을 둘러봤다.
“언니. 제가 흑장미 했으니까 소원 들어주셔야죠?”
싫다고 하면 쫓겨날 분위기.
“어? 그래야지. 뭐할까?”
한민선이 뭐든시켜만주십쇼 하며 복종자세를 취했다.
“가오리 오빠를 연못에 던져 주세요.”
“어?”
한민선이 놀라서 가오리를 봤고, 가오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동그랗게 말아 내밀었다.
진짜 가오리 같다.
“무게는 걱정하지 마요. 톡 대면 슝 날아갈 거예요. 그쵸 가오리오빠?”
“어? 어. 그래야 하는 건가...... 핸플아. 내가 뭔가 잘못한거냐?”
“어. 뛰어들어.”
“넵. 노노노씨 나 톡 쳐줘요.”
톡 치니 가오리가 억 하고는 슈우웅 날았다.
풍덩.
가오리는 연못 바로 옆 정자까지 물방울이 튈 정도로 화려한 배치기 입수를 했다.
8월초의 저녁.
찬바람 나오는 에어컨 선풍기를 가져왔다지만, 숯통을 바로 옆에 가져와서 적당히 꿉꿉하고 적당히 덥다.
보기만 해도 시원하네.
잠시 후 가오리가 물에 젖은 시츄꼴로 기어 나왔다.
“후아. 엄청 춥다. 물 엄청 차갑네.”
“아 맞다. 겨울물 온도지.”
냉수성 어종인 자치를 키우기 위해 수온을 겨울물처럼 차갑게 유지한다.
거기 들어가는 전기값도 장난 아니다.
“시원하겠네. 정신이 번쩍 나지?”
“옙. 예하야 나 또 뭐 당하면 돼?”
“헤헤헤. 이제 됐어요. 불 옆으로 오세요.”
추위에 떠는 가오리가 불통 옆에 자리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고기집게가 가오리의 손에 쥐어졌다.
거국적으로 한잔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차정미가 날 마이크잭슨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또 빵 터졌다.
“오빠. 그 집에 살 때 말하는 거지? 쓰레기장.”
“야. 쓰레기장.... 은 아니라고 할 수 없네. 그땐 돈 버는데 올인 했으니까.”
어쩌다보니 돈을 번 경위를 말하게 됐다.
코인으로 돈 모으고, 그걸로 프로그램 제작.
“이야. 듣다보니 대단하네. 운 좋아서 2000배 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
닥똥이 말하니 차정미가 받았다.
“전 사실 좀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어요. 씻지도 않아서 번들번들한 머리로 뒤로 걸으며 편의점에 와서는 삼각김밥을 몽땅 쓸어 집으로 달려가시더라고요. 계산할 때도 유리 밖 자기 집만 보고 계시고.”
“그건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이상한 사람인거지. 솔직하게 이상했다고 말하셈 차정미양.”
가오리놈아 닥쳐.
“이상한 사람인 줄 알고 무서웠어요.”
“아항. 그래서 무서운 거였군.”
제길.
“그렇게 집중하면 2000배 벌 수 있어?”
한민선이 혹 했다.
연기를 그만두려니 생계걱정이 우선시되겠지.
“집중한다고 되면 세상 다 부자 되게. 이 놈이 특별한 거야. 이 놈은 미래를 읽거든.”
가오리놈이 왠지 지가 우쭐했다.
“미래를 본다고? 진짜?”
“어. 이놈이 참 허접하고 멍청하고 얼빠져 보이지만 미래를 분석하는 거 보면 기가 맥히지. 핸플. 하나만 해봐.”
“뭘?”
“미래 하나만 말해봐.”
“내가 예언가냐?”
“예언가 맞지. 2년 만에 세계 1등 부자 됐는데 그럼 아니냐? 니가 본 미래 하나만 말해봐. 어서.”
가오리가 부추기자 다들 눈을 반짝이며 본다.
예하의 눈이 참 예쁘다.
실망시킬 수 없군.
“교대 망해.”
- 작가의말
스포지송
교대 관련자 분들 ㅈㅅ ㅈㅅ... 어차피 다 아는 거잖아요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