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변하지 않는 가치2
“정자에 저녁 깔아주세요. 예 여기서 먹을 거예요.”
아직 해가 쨍쨍한 18시.
마시다보면 해가 지겠지.
비서실에 전화하고 나서 보니까 가오리랑 한민선 둘 다 전전긍긍하고 있다.
“죄졌냐?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마시자.”
대답 없는 둘을 버리고 예하에게 전화했다.
“예하야. 정자에서 저녁먹자. 축하파티야. 가오리랑 노노노랑 사귄대. 어어. 바로 나오면 돼.”
예하까지 나와서 축하해. 축하해요 언니 하다 보니 본관에서 음식이 왔다.
식비는 관리비에 포함이고, 관리비는 브라질 정부가 100년간 내기로 했으니 브라질이 쏘는 축하만찬이네.
“어쩌다 사귀게 됐냐?”
“어쩌다보니. 금단의 사랑이라는 족쇄 때문에 더 끌린 건가.”
술 한 잔 마셨다고 가오리의 입이 풀렸다.
“금단의 사랑은 지랄.”
“니 옛날 여친이라고 일부러 말 안 걸고 일부러 존칭쓰고 그러다보니까 그렇게 되더라.”
한민선과 함께 한 방탕한 시간...... 회귀 전이니까 25년 넘은 기억이지만, 얘들한테는 몇 년 전 기억이지.
“난 진짜 괜찮으니까 눈치 보지 마라.”
“알지. 그래도 좀 민망허네.”
가오리가 어울리지 않게 손부채질을 하고 있다.
작은 단추구멍 눈에 0형 입.
“여자가 아깝네. 잘해 임마.”
“아, 내가 뭐.”
“언니가 아까워요.”
예하의 지원사격.
“크윽. 예하 너마저도.”
가오리가 심장이 찔린 척 하자 노노노가 합세했다.
“사실 내가 좀 아깝지.”
“야. 너만은 그러면 안 돼.”
술이 또 한 순배 돌고 예하는 입맛만 다시다가 5종류 곡류음료수 중 하나를 골라 집었다.
“그런데 아까 금마 그냥 둘 거냐?”
“그냥 두지 뭐.”
“원한 품고 헛소문 퍼트릴 거 같은데.”
“내 이미지가 워낙 좋으니 그래봤자 소용없을 걸.”
“노노노한테 피해 갈까봐 그렇지.”
가오리가 한민선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오상욱이 퍼트리는 윤동욱의 옛날 여친 썰인가.
내가 ㄴㄴㄴ를 챙겨준 얘기랑 엮어서 날 양다리로 몰던가 한민선을 창녀로 몰던가.
“그럴 수도 있겠네. 입 열면 고소해야지. 내 명예훼손이면 수십억 나올 텐데. 법원에서도 고무줄 최대한 늘려서 때릴 테고. 인실좆 되는 거지.”
“그러느니 그냥 돈 좀 쥐어주고 닥치게 하는 건 어때? 결국 후조치잖아. 헛소문이 퍼진 다음.”
가오리의 말이 옳은 건 아니지만, 한민선이 피해 입는 걸 싫어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야. 감옥에 있는 죄수가 아프면 누구 돈으로 치료 하냐?”
“어? 어... 자기돈?”
“나라가 치료해줘. 감옥에서 아파서 죽으면 인권단체가 지랄할 테고 고문했다는 음모론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그러겠네.”
“그런데 죄수가 아닌 일반 사람 중에 아픈데 돈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까?”
“어? 어... 그러네. 불공평하네.”
“죄 지어서 갇힌 죄수는 치료해주고 선량한 일반인은 치료비가 없어서 낑낑 앓다가 죽고. 잘못됐지?”
“오상욱이 그 정도로 싫으냐?”
“적어도 오상욱 줄 돈이면 얼굴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을 도울래.”
3경이나 되는 돈이지만 허투로 쓰기 싫다.
제로보다 못한 관계에 돈 쓰기 싫다.
“그래라. 그럼.”
또 술이 한 순배.
“그런데 그놈 말도 일리 있는데 청년실업은 심각하잖아. 물론 니가 많이 도와준 건 아는데 추가 조치가 없는 게 이상하다. 기부금 3경인데 거기서 따로 빼지 않냐?”
“실업문제는 이제 끝. 내가 손댈 게 없어.”
“손 쓸 수 없다는 거야?”
“아니. 손 댈 필요 없다고.”
“어? 왜?”
“시대가 변했잖아.”
내 말에 가오리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예하 넌 알겠지? 하는 표정으로 옆을 보니까 냉채족발을 박살내고 계신다.
그래 임신했으니 많이 먹어라.
의외로 한민선에게서 대답이 나왔다.
“기축통화의 변화. 미래블록이 이끌어갈 세계.”
한민선의 말에 가오리가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어... 뭔 소린지 일도 모르겠습니다만?”
노노노는 저 저질표정이 웃긴지 풋 했다.
“나도 그제 미래대학 수업 인터뷰 하면서 들은 거야. 미래블록이 대두되고 양적완화의 시대가 끝나면서 노동가치가 정당히 평가받는 시대가 되었다. 교수님이 그러더라.”
“노동가치...... 그래도 모르겠습니다만?”
“어. 그러니까... 도와줘 윤똥몬!”
한민선이 옛날 별명을 부르며 SOS를 쳤다.
“양적완화 시대의 단점. 금융수익만 계속 오른다. 대표적으로 일본. 매년 주식은 오르는데 노동자 임금은 오히려 감소. 왜냐하면 양적완화 자체가 위조지폐를 뿌린다는 뜻이니까 고위급 돈놀이 하는 이들은 돈을 벌고 은행에 돈 맡기고 성실히 일하는 이들은 자기 재산가치가 희석되서 매년 거지가 되었지.”
“어... 기억나.”
“추가로 한 가지 더. 중국 제조업의 붕궤.”
중국이 망했다.
미래블록 체계에 대한 적절한 대응에 실패해 통제력에서 벗어난 기업들이 제 살길을 찾아 날뛰고 있다.
그리고 미래블록과 상관없이 미국과의 무역전쟁의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제제재를 피해 베트남, 인도 등으로 탈출한 글로벌 기업들이 단순 조립품을 출시하기 시작하면서 중국의 제조업파이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어... 그게 왜?”
“혹시 미꾸라지 물가론 알아?”
가오리가 고심해서 대답했다.
“음... 미꾸라지 어항에 천적을 넣으면 더 많이 살아남는다?”
“그거 말고. 한은 총재가 한 말인데 미꾸라지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중국이 무한 공급하니 가격이 오르지 않더라.”
“어... 그거 들어본 것 같다.”
“지난 20년간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써 무한한 공급을 했어. 원자재도, 완제품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싸게 무한히 공급했지. 덕분에 수요가 늘어도 가격이 오르지 않는 시간이 무려 20년 가까이 지속되었어.”
“어. 중국이 좋은 일 했네.”
“밑바탕에는 중국 사람들이 제대로 월급 받지 못하고 인생을 갈아 넣었다는 뜻이 들어있지만 어쨌든 그런 풍요로운 시대였어. 양적완화와 중국의 무한 공급 두가지가 합쳐져서 노동자의 노동가치가 오르지 않는 결과를 가져왔어. 한국에서는 일자리부족과 청년 졸업자가 쏟아지는 문제까지 합쳐져서 300만 대졸실업자라는 결과가 나왔지.”
“어. 그래서. 뭐? 그게 어떻게 해결된다는 건데?”
“중국이 무너졌고, 공산당의 통제가 사라지면 중국 노동자들도 제대로 된 월급을 받고 일하게 될 거야. 외국으로 퍼진 제조업 기업들이 경쟁을 불러올 테고. 미래블록의 대두는 파생상품을 통한 금융수익의 극대화가 줄어들게 될 거야. 이게 합쳐지면 사람들의 노동가치가 올라가.”
“일하기 좋아진다는 거야?”
“어. 물가가 오른다는 것은 서비스업 가격이 오른다는 뜻이고, 노동자의 70%를 차지하는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수익이 좋아진다는 말이지. 서비스업 가격이 오르면 최후의 최후엔 월급쟁이의 월급이 눈곱만큼이라도 오르게 될 테고. 물가 상승은 살기 힘들어지지만, 금융수익이 주는 만큼 노동자에게 가는 금액이 많아질 테니 노동가치는 느리지만 꾸준히 상승할거야.”
“어... 네... 잘 들었는데 잘 모르겠는데요? 그게 청년실업하고 무슨 상관이야?”
“월급 받느니 코인 한다! 출근할 시간 있으면 주식차트나 봐라. 이게 요즘 시대상이잖아.”
“그렇지.”
“미래블록 체계에선 코인이나 주식이 그렇게 신나게 뛰지 않을거야. 장난칠 수 없으니 가격이 꽤나 안정될 테고 재미 없을거야. 대신 식당일이든 노가다든 실제 일자리의 임금은 오르지.”
“아하. 금융수익이 줄어들테니 일하게 된다?”
“어. 물가는 한동안 오르면서 지난 20년간의 불균형을 해소하게 될 거야. 그 기간동안 노동자 임금은 오르고 금융수익은 줄어서 균형을 맞출테고. 그때가 되면 자연스레 해소돼.”
“그때가 되면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일하러 나온다?”
“노가다는 더럽고 천대받으니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하기 싫다, 이런 사람까지 챙겨줄 순 없지. 그래도 더 많은 사람들이 감내하고 나서면서 부족한 일자리가 채워지게 될 거야. 노동 그 자체의 가치. 이건 언제나 사회의 근간이 되어야 해.”
“어...... 그래도 미래블록이 그 모든 걸 해낸다는 게 졸라 개소리 같은데.”
“가오리 오빠. 바른말. 고운말. 태교.”
예하한테 혼난 가오리가 찔끔했다.
“어차피 한국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일자리는 없어. 300만 개의 대기업 정직원 자리를 만드는 건 나조차 불가능해. 그렇다면 그 사람들 전부 20년 간 백수로 지낸 후에 인구감소 시기부터 일하라고 하는 것도 안 되고. 하지만 미래블록을 통해 국가의 경계가 낮아진다면 외국에 나가기 쉽겠지?”
“어... 결국 일자리 찾아서 나가야 하는 거네.”
“어쩔 수 없잖아. 한국에 일자리가 없는데. 지방에 벌써 50만 개 일자리 만들었지만, 더 추가해봤자 수익만 깎아먹으니 지방에 살 메리트가 없어지잖아. 미래블록 체계가 안정되면 해외에서 일하는 것도 꽤 살만할 거야. 한국의 정직원만큼 잘 벌며 살 수 있는 자리는 꽤 많아.”
“맞아. 내가 요즘 하는 인터뷰가 저거였어.”
한민선이 에헤헷 하며 끼어들었다.
“일자리가 없어서 외국에 나간다라... 살벌하구만.”
“정치가는 정답을 알아도 내뱉지 못하는 말이지. 그저 공무원 300만 늘려서 지지표나 얻을 생각뿐.”
“아까 말한 노가다는?”
“그런 자리가 먼저 차겠지. 농어촌 지방에 자리가 차고, 노가다 자리 차고, 거기도 경쟁이 심해지면 외국으로 나가고, 그러다보면 저출산 인구절벽의 시대가 시작되니까 그땐 한국에도 공무원, 공기업 정직원 자리가 남아돌 테니 돌아오겠지.”
“어... 모르겠다. 어쨌든 니 돈 퍼주는 걸로는 방법이 없다는 거지?”
“내 생각은 그래.”
“씁쓸하네.”
“일자리 300만개. 이건 누가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가난하게 살려면 남는 거고 돈 벌려면 떠나야지 뭐.”
“그러네.”
씁쓸하게 또 한 잔.
7월의 긴 해가 지려한다.
정자 너머 산골짜기에 해가 걸리고 자치를 키우는 작은 연못이 황금빛으로 물든다.
“저... 회장님.”
뒤쪽에서 누가 불러서 돌아보니 비서실의 나선혜였다.
내게 오는 전화를 받아서 커트하거나 내 쪽으로 돌리는 스케줄비서.
“네? 웬일로 직접 오셨죠?”
보통 전화로 용건을 말하는데.
나선혜는 ‘실례합니다만...’ 하면서 손짓했다.
정자에서 내려가 다가가니 귓속말까지 한다.
“그... 국정원에서 손님이 선물을 갖고 왔습니다. 추상희씨 아시죠? 전에 이 저택에 상주하던 요원.”
“네. 그런데요?”
“선물을 가져왔는데... 그 선물이... 조승학입니다.”
나선혜가 정자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예하의 눈치를 보며 속삭였다.
왜 귓속말을 했는지 알겠다.
조승학.
예하에게 트라우마가 될 이름.
나 또한 내가 회귀한 원인이라 생각한 놈.
그 놈이 선물이라......
“어... 잠시 기다려주세요.”
“예.”
정자로 돌아가 예하의 얼굴을 봤다.
순진무구한 얼굴엔 새우젓이 묻어 있다.
“왜? 무슨 일이야?”
“족발 맛있어?”
“어? 큰일난거야?”
뭐라고 할까?
임신한 몸에 안 좋으려나?
비밀로 처리할까?
하지만 예한데.
어쩌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아이다.
가장 마음 고생 심했을 아이.
예하에게 비밀로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어... 좋다면 좋은 소식인데...... 어. 좋은 소식이니까 충격 받지 마.”
“알았어.”
“조승학을 잡았대.”
“!”
예하의 눈이 동그래지고, 눈동자에 분노가 스며든다.
“아. 아아. 그래서. 흠. 그래. 아기를 생각해야지. 후우우.”
예하가 배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방에 들어갈래? 내가 처분할게.”
“어... 아니. 내가... 아아아 싫다. 예쁜 것만 보고 싶은데. 후우. 나 여기 앉아 있을게. 오빠가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고. 오빠가 알아서 해.”
“어. 그래...... 그럼 남아. 가슴속 멍이 사라져서 오히려 좋을 수도 있겠지.”
“응. 오빠만 믿을게.”
예하의 다짐을 받고 나선혜를 불렀다.
“데려와 주세요.”
“예.”
조승학이라.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씹새끼야.
- 작가의말
이새끼 살려둔게... 뭐 생각이 있어서 그랬지만... 이제와선 어찌되도 상관없을 거 같은 기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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