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프리 제네바 프리포트
경쾌하고 상큼한 세블펄스의 데뷔곡이 끝났다.
주변사람들처럼 적당히 호응하며 듣던 모닥불이 노래가 끝나자 털썩 주저앉았다.
“맛있는 거 먹자더니 여긴 왜 왔어? 또 가짜음식 메기는 거면 혼낼 거야.”
“아하하. 아니에요. 이제 고글을 벗어주세요.”
루비는 데뷔팀을 보러 갔고, 여자 셋이 고글을 벗어 메타버스에서 나왔다.
초록색 스튜디오 한쪽 구석에 여자셋이 몰려 있었다.
“어? 우리 언제 여기까지 왔지?”
“그러게.”
“가상공간을 보면서 몰입해서 그렇죠. 컨트롤러로 움직이는데 저도 모르게 걷게 되잖아요. 집에선 게임하다 흥분하면 실수로 밥상 걷어차거나 문 틀에 발가락 콩 할 수도 있어요. 다들 몸조심하세요.”
“힉 상상만 해도 아파. 그래서 여기 완충재를 깔아놨구나.”
“우리 몸개그 오졌겠다.”
-응ㅋㅋㅋ
-웃겼음ㅋ
-ㄹㅇㅋㅋㅋ
스튜디오 중앙에 넓은 테이블이 놓여있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밀푀유와 각종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반색하는 모닥불을 선두로 자기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곧장 이어지는 먹방.
“이제 쉬면서 보자고요.”
“어. 생각보다 무겁다.
“그러게. 방송만 아니면 헬멧형이 편하겠어.”
“저도 그 생각 했는데. 집에서 쇼파에 뒹굴면서 하기엔 헬멧이 편할 거 같아요. 앗 두번째 노래 시작해요.”
세븐펄스의 두번째 노래가 시작되었다.
먹방을 하던 여자 셋의 화면이 사라지고 오늘 데뷔한 아이돌이 전체 화면을 채웠다.
아까는 메타버스에서 보던 화면이었고, 이번엔 음악방송에서 찍듯 카메라워크하는 화면이다.
그 사이 세 여자의 코디들이 달려가 고글에 눌린 머리와 화장을 고쳤다.
“이렇게 보니 다르네.”
“아까는 생생했고, 이번엔 평소 같아. 둘 다 라이브였어?”
“네. 둘 다 라이브. 지금 라이브하는 공연도 메타버스로 송출하고 있어요.”
“신기하다.”
얌전히 화장과 머리를 고치면서도 대사를 이어나간다.
프로는 역시 달라.
“무대에 서른 개의 이미지센서카메라가 있어요. 이미지센서가 다른 각도에서 동작을 잡아내고, 그걸 3D 그래픽화 해서 메타버스로 송출하는 거예요. 이제부터 협약된 콘서트는 모두 이 방식으로 내보낼 거래요.”
“응. 혁신인건 알겠는데...... 그냥 이 화면을 내보내도 되지 않아? 아까처럼 애니화? 애니메이션화 해야해?”
질문에는 민지민지가 답한다.
“그... 뭐랬더라... 3D를 위해선 거쳐야 한대. 방송화면을 메타버스 안에서 보면 2D로 보인대. 그래서 그래픽화해서 보내야한대.”
“뭔 소린지 모르겠다.”
“아까 그 공간에서 지금 화면을 보면 자리를 어디로 이동하든 똑같이 지금의 방송화면이 보인대. 그런데 그래픽화 하면 공연장에서 자리를 옮길 때마다 춤추는 가수들의 옆모습 뒷모습까지 보인대. 그래서 더 생생한거고.”
“아핳. 그래서 3D라고 했구나. 아 모르겠다. 일단 먹자.”
“네.”
셋이 얌전히 먹방하는 화면이 우측 아래에 잡히고 중심엔 오늘 세븐펄스의 데뷔 쇼케이스가 이어졌다.
전 세계에 메타버스를 광고하면서 걸그룹 홍보를 겸한다.
다들 일 잘한다.
정면 고정샷으로 무대를 보다가 메타버스 안 루비의 시야에서 공연장 곳곳으로 자리를 옮겨 보기도 하고, 무대 뒤편 스탭홀에서 보기도 했다.
관객들과 부대끼면서 클럽에서 춤추는 것처럼 무대를 즐기기도 한다.
현실의 콘서트보단 못하지만, 집에서 즐기기엔 열 배 이상 생생한 무대.
“좋다.”
“콘서트장 온 거 같아.”
“입장료가 10 미래블록이면 천원이네. 너희는 티비로 보는 게 날 거 같아? 메타버스로 보는 게 날 거 같아?”
-가수에 따라
-장르에 따라
-장소에 따라
-AV에 따라
-너님아 진정햌ㅋㅋㅋ
-ㅋㅋㅋㅋㅋ 일단 일본진출부터
-토쿄핫 뭐하냐? 어서 신기술 받아라
“댄스나 락이면 메타버스에서 보는 게 훨씬 재밌겠는데요? 변장하고 들어가면 아무도 모르겠죠? 거기서 간섭모드로 보면 진짜 재밌을 거 같아요.”
“간섭모드? 그게 뭔데?”
“아까는 비간섭 모드였어요. 다른 사람이 다가오면 투명해져서 통과하죠. 그런데 간섭모드로 하면 다른 사람과 부딪쳐요. 입구부터 줄서야 하고. 공간이동도 안 되죠. 이러면 락음악 들으면서 마구 슬래쉬하고 펑펑 부딪치고 막 날아 댕기고 그러면서 노래 들으면 엄청 신나겠죠.”
“재밌겠다. 천원내고 클럽 가는 거네.”
“그게... 천원보다 비싸요. 보다시피 데이터가 무겁잖아요.”
“어. 맞아. 안경 무게가 꽤 나가더라.”
-ㅋㅋㅋㅋ동문서답
-데이터는 비물질인데 어떻게 무겁죠?ㅋㅋㅋ
-여자들 이럴 때 커엽
-못생긴애는 저래도 안커엽
“안경 말고요. 처리할 데이터가 엄청 많아서 서버 비용이 많이 나가요. 대신 서버유지 해주는 분들이 많이 받겠죠.”
“어... 모르겠다. 얼마나?”
“아까 같은 사람 많은 공연장 같으면 분당 1미래블록 정도.”
“헐. 엄청 비싸네.”
“네. 그래서 데이터 품질을 낮추고, 주변 환경을 심플하게 바꾸고 하면......”
예하와 민지민지가 대화하는 사이 열심히 먹은 모닥불이 끼어들었다.
“흐아 배부르다.”
그 사이 세븐펄즈의 데뷔쇼케이스도 끝났다.
“다 드셨으면 산책 갈까요?”
“산책? 어디?”
“고상하게 미술품 감상할래요?”
“미술관?”
“네.”
“가자. 호호홋. 나에게 어울리는 공간이야.”
민지민지가 신나했다.
고글을 써 접속해 루비와 작별하고 지도를 눌러 이동했다.
“세컨드 어스는 지구를 디지털화 한 공간이에요. 아직 구현되지 않은 곳도 많지만 차츰 지구 전체를 집어넣을 생각이에요. 우선은 활성화 된 곳부터 가 봐요.”
지도에서 영국을 찾아 영국박물관을 눌렀다.
순식간에 세 여자는 영국박물관 앞에 도착했다.
정문을 누르자 입장료 10미래블록이라는 말이 나왔다.
“응? 이상해. 왜 돈을 내야 해?”
“박물관인데 돈 내는 게 당연하지 않아?”
“영국박물관은 공짜잖아. 그런데 왜 여기선 돈을 받아? 진짜도 아니고 가짠데.”
“헐. 미래그룹 돈독 올랐네.”
민지민지는 박물관에 대해 잘 아는지 사소한 트집을 잡았다.
예하는 대본에 나온 변명을 했다.
“사실 영국박물관 측에서 XR화를 거절했어요.”
“헐. 그러면 이건 불법?”
“그래서 미래그룹은 소장품의 주인에게 물어봤죠. 우리가 XR로 전시해도 되는지를요.”
“주인?”
“네. 진짜 주인들이요. 일단 들어가 봐요.”
영국박물관에 들어가니 가장 먼저 이집트관이 나오고 거대한 돌덩이가 보였다.
“이건 뭐야?”
“글쎄요. 거기 메뉴얼을 눌러보세요.”
메뉴얼을 누르자 작품 설명이 나왔다.
피라미드 옆에 있는 스핑크스의 코와 수염.
“헐.”
“영국박물관은 이런 식이에요. 전 세계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죠. 한국의 예술품도 250점 있어요. 저희는 영국박물관의 허가를 받지 못해 유물의 원주인인 각국 정부에게 문의했어요. 각국에선 허가했고, 대신 박물관 입장료를 각국 정부에 주기로 했어요. 덕분에 저희는 영국박물관 미술품을 XR화 하는데 성공했죠.”
원주인이 승낙했는데 도둑이 감히 막아?
어차피 영국박물관에 본토의 예술품은 거의 없다.
영상은 각국의 파견인원이 찍어서 넘겨줬다.
“이러면 영국이 싫어할텐데......”
“에? 오빠는 괜찮다고 했는데...... 사람이라면 부끄러워 할거라고......”
미안하다 예하야.
영국 별로 안 좋아해서 그냥 뱉은 말인데.
영국에서 반발시위가 일어나려나.
어떻게 잠재우지.
영국지사장이 알아서 하겠지.
방송경력이 긴 모닥불과 민지민지가 적당히 얼버무리고 이동하며 관람했다.
피라미드 내부 벽채를 통째로 뜯어온 유물, 파라오의 미라 등 고귀한 유물을 관람하고 한국관에서 신라 금귀거리등 약탈 유물을 봤다.
그러는 사이 채인수가 문자를 보내왔다.
-ㅋㅋ루브르 박물관에서 콜라보 승낙했다, 실무진 파견하겠대
좋군.
콧대 높은 도둑놈들이 백기를 들었다.
남의 유물로 장사하던 도둑놈들.
적어도 가상공간에서만큼은 유물이 주인을 찾아가게 만들자.
그러는 사이 관람실을 돌던 모닥불이 종아리를 주물렀다.
“하아. 쉬었다가자. 다리 아파.”
컨트롤러로 걷는 건데 뭐가 힘들다고.
“그래요. 그럼. 어땠어요?”
“난 좋았어. 조각품이 입체로 보이니까 실제 같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보는 것보다 나아.”
“나도. 실제로 가서 보는 것보단 못하지만 한국에서 보기엔 이보다 좋은 게 없을 거 같아.”
“다행이다. 어차피 하루에 다 볼 수 없으니 여기까지만 볼까요?”
“그럴까. 난 퇴근하고 방에 누워서 다시 들어가 볼래.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좋겠다.”
“헤헤헤. 우선 나가죠.”
여자 셋이 공간이동을 해서 영국박물관 밖으로 나왔다.
“다음 일정은 어딘가? 가이드 양.”
“에.. 대본이... 제네바네요. 제네바 프리포트로 가요.”
셋은 지도를 눌러 스위스 제네바로 이동했다.
“여긴... 뭐야? 음악회? 아니면... 음... 콘서트 다음 미술관이었으니까 이번엔... 모르겠당.”
“헤헤. 스위스니까... 초콜렛? 알프스? 요들송? 아닌데. 배경이 삭막한데. 커다란 창고만 줄지어 있잖아. 거리음악회 같은 거 하려고?”
모닥불과 민지민지가 번갈아 추측했다.
둘 다 틀렸다.
“헤헤헤. 여기는 창고가 맞아요. 앞에 보이는 강 앞의 항구. 제네바 프리포트, 관세가 면세되는 스위스 자유항이에요.”
“아하. 그렇군요. 근데 어쩌라고요? 우릴 왜 데려온 거지? 관광이야?”
모닥불이 시크하게 물었다.
예하는 아 언니 너무 좋아 하면서 껴안았다.
“헤헤헤. 우리 뒤에 창고가 줄지어 있잖아요. 저기엔 뭐가 들어있을까요?”
“스위스. 창고. 면세항. 면세품? 면세 백? 화장품?”
“아니에요. 저기엔 피카소의 진품이 최소 1000점 들어있어요.”
“헐.”
“진짜?”
“네. 그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이 여기에요. 영국박물관보다 수십 배 많은 작품들이 빛 하나 들지 않는 이곳 창고에 켜켜이 쌓여있어요.”
“아. 그럼 여기 불나면 난리 나겠다.”
평범한 모닥불의 시각.
“안타깝네. 그런 작품들이 빛도 못 보고, 관람객을 만나지도 못하고. 습기관리는 잘 되나?”
의외로 미술작품을 좋아하는 민지민지의 시각.
“왜 여기 모여 있는 거야?”
“밀수, 범죄, 탈세 등 이유가 많대요. 가장 큰 이유는 세금 때문이라고 하는데. 여기 있다. 미술품을 사서 자국에 가져오면 사치세를 낸대요. 그러니 사서 자유항 창고에 묵혀두는 거래요. 시간이 지나 가격이 오르면 경매장에 판대요. 이러면 자국에 가져온 일이 없으니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거래요.”
“안타깝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술품이 창고에 처박혀 있는 거야?”
“그쵸. 여기에 레오나르드 다빈치나 클림프, 반 고흐 등의 작품이 켜켜이 쌓여 있대요. 슬프죠?”
“어.”
“그래서 오빠가 준비한 게 프리 제네바 프리포트예요. 어둠속에 숨겨진 작품을 빛 속으로. 보여지기 위해 창작된 예술품에게 자유를 주는 거예요.”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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