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정의 구현
채인수가 대본을 읽었다.
“11개월 전 미래펀드의 직원 한 명이 주식을 가지고 장난을 쳤습니다. 거래량 거의 없는 우선주에 상한가 대량매수를 눌러놓고 친구 명의로 사 뒀던 11억 어치를 상한가에 팔았습니다. 차익 3억을 얻었네요. 다행히 다른 직원이 회사에 보고해줬기에 회사는 고소, 고발로 회사의 손해를 막았지만, 만약 정의로운 신고가 없었다면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고스란히 회사가 피해를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회사는 직원이 막아준 피해액의 절반을 포상으로 줬고, 정의 가산점을 통해 앞으로도 함께 일하고자 한다면 우선 채용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전 세계 다방면으로 넓어진 미래그룹은 이제 900만 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고, 회사 내사과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더라도 모두가 옳게 일하는 지 알아내기 힘듭니다. 직원이 고의로 회사에 피해를 입혀 뒷주머니를 챙기는 건 함께 일하는 직원이 막아줘야 합니다. 이건 거대해진 그룹이 나아가야 할 필수 사항입니다.”
-고소 고발 ㄷㄷㄷ
-돈만 회수하고 끝내지
-좌니난~
-함께 일한 상사 찌른거네
-정보)고자질은 고자가 하는 짓
“기업이 커질수록 온갖 유혹이 들어옵니다. 1000억 원 어치 사무용품 구매입찰을 할 때도 구매부서 직원에게 10억~20억 리베이트 제의가 들어오고, 미래펀드 직원에겐 온갖 세력이 주가조작 제의를 해 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혹을 떨치기는 힘듭니다. 딱 한 번만 눈 딱 감고 지르면 몇 년 치 연봉을 버니까요. 게다가 전체 금액이 클수록 티도 나지 않는 일이고 현금다발로 받으니 흔적도 없죠. 타 회사 또한 인사과, 내사과, 감사과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내부감시를 하지만 잡아내기 힘들죠. 그렇기에 정의로운 내부고발이야말로 저희 회사가 올바로 가게 만들어줍니다.”
-북한이쥬?
-그러네 상호감시 졸라 빨갱이네
-일하기 무섭겠다
-누가 날 찌를지 모르는데 함께 일하고 싶겠냐
-짜고 하면 어케됨? 2000억 포상 받아서 반까이
-ㄴㄴ피해액 중 받아낸 것에서 절반 주고, 범죄자는 끝까지 처분함 익명커뮤니티로 다른회사 갈 때마다 알려줌
-ㅋㅋㅋㅋ 졸라무섭다
“사실 큰돈을 만지면 사람은 욕심이 들게 마련입니다. 천억원짜리 구매입찰을 하면 영업맨들이 달려와서 50만원짜리 참치집에서 점심을 사주고, 200만원짜리 텐프로에서 접대를 합니다. 매일매일 이렇게 달려들어 어떻게든 선정되려고 하죠. 현찰 오백이나 천씩 주머니에 꽂아주고 ‘평생 함께하는 겁니다, 형님’ 하며 핥아줍니다. 그냥 한 번만 눈감으면 됩니다. 사실 전체금액으로 보면 티끌만한 액수고요. 게다가 함께 일하는 구매부서 직원이 함께 먹으니 모두가 공범이 되어 안전합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쉽게 발생하고요.
액수는 달라도 사실 다들 조금씩은 하죠. 엄마가 만원 심부름 시키면 100원 200원 쯤 심부름값이라고 챙겨도 잘 모르죠. 대학 학생회에서 MT준비를 하며 200만원어치 장을 보면서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 먹는 게 죕니까? 아파트 부녀회에서 아파트도색 5000만원 계약하면서 소고기 한 번 얻어먹는 거 티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계약 액수에 따라 규모를 늘리면, 손에 묻은 콩고물이 연봉의 몇 배가 되는 것 뿐이죠. 그러하기에 더더욱 정의 가산점과 포상금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게 아니면 관리가 되지 않죠. 회사에서 추산하기로 이 제도 덕에 저희 그룹은 3000억 원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이제 때려요.
공무원 아저씨들 조심해요.
“사실 내부고발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함께 일한 사람이 좆 될 걸 알고 하는 행위죠. 함께 일하던 사람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도 그 사람의 재산이 몰수되고 고소, 고발당하고 향후 비슷한 업종에 취업하려 해도 이력이 남아 어려워지고, 그 가족까지 어려워지는 일이죠. 사람이 죽을 걸 알면서도 찌르는 건 굉장히 힘듭니다.
게다가 내부고발을 하면 함께 일하는 다른 직원이 꺼리게 됩니다. 왕따가 되는 거죠. 회사란 단순히 돈만 버는 곳이 아니라 내 삶의 낮시간을 보내는 장소입니다. 인생의 낮시간이 지옥으로 되는 거죠. 단순히 여기서 그치면 모르겠는데 인사고과에도 영향을 줍니다.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해고시키려 하고 흠잡히지 않으려 죽어라 일해도 승진 따위 기대도 못합니다. 어떻게든 나가도록 종용하죠.
이런 정의의 후폭풍을 알고, 범죄자가 실제로 받는 형별이 형편없다는 걸 안다면, 잘못된 걸 알아도 눈감는 게 인지상정이겠죠.
특히 이건 공무원 사회에서 더 심합니다.
어차피 남의 돈. 주인 없는 돈. 먼저 먹는 게 임자인 돈. 세금입니다.
윗사람이 눈 먼 돈 빼돌리는 것을 함께 하면 콩고물을 받습니다. 반면 정의롭게 고발을 해봤자 명확한 범죄 입증이 어렵습니다. 윗사람은 감찰을 받아 1개월 정직, 혹은 1개월 감봉 따위의 처벌만 받고 끝나죠. 그 후부턴 평생직장이라 생각한 공무원 사회에서 평생 인격살인이 일어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회사의, 혹은 국가의 피해를 막아줬는데 오히려 피해를 봅니다. 회사 혹은 국가에 해를 끼친 좀벌레를 죽였는데 정의로운 이가 피해를 봅니다.”
-ㅋㅋㅋㅋ저격이다
-저거였네 또 누가 빡치게했나
-ㅋㅋㅋㅋ 죽어랔ㅋㅋ
-일단중립기어 박는다
-ㄹㅇㅋㅋ
부패한 자는 자신의 자리를 부패한 후임에게 넘겨주고 싶어한다.
부패유전.
일은 혼자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든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정의로운 후임이 자신을 찌르지 않도록 만들어낸 안전장치가 내부고발의 인격살인이다.
이건 혼자 만들어낼 수 없다.
부패한 모든 이가 힘을 합쳐 만들어낸 분위기다.
매순간 최선의 선택.
부정부패를 신고해서 버는 돈도 없이 누군가의 원한을 사고 영원한 왕따와 승진탈락과 해고하려고 트집잡히는 삶을 살래? 아니면 눈 슬쩍 감고 월급 이외의 과외수익을 함께 받을래?
사람은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한다.
정말 올곧은 결심, 혹은 윗사람의 가혹한 괴롭힘이 아니라면 대부분 후자를 선택하게 된다.
시스템이 그렇게 짜여있다.
“나라가 언제 망하는 지 아십니까?
총에 맞았을 때? 기억에서 잊혀 졌을 때? 아닙니다.
부패해서 망하죠.
명나라는 신하들의 부정부패로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조선은 부정부패로 일본에게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나라를 뺏겼죠. 한 때 공군4위였던 베트남은 전투기마저 팔아먹는 부정부패로 베트공에 석달만에 나라를 잃었고,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이 2000조를 쏟아 부었음에도 관료들이 전부 뒷주머니에 넣어 결국 미국마저 포기했습니다. 미국과 유럽국가들이 아프리카에 차관을 줘봤자 전부 독재자의 뒷주머니로 들어가니 그 나라 국민은 항상 굶주리고 발전이 없습니다.
현재도 제3세계 대부분의 나라는 그 나라에 원조 물품을 보내도 항구에서 뒷돈을 요구하며 화물을 잡아두고, 원조물품을 뿌리는데도 관료에게 뒷주머니를 찔러줘야 뿌릴 수 있습니다. 우리회사가 기부를 하려해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이렇게 썩어있고, 그렇기에 더더욱 정의로운 자가 필요합니다.
내부고발을 통해 우리가 낸 세금 100억 원이 사라지는 걸 막아낸 정의로운 공무원이 3년간의 왕따 끝에 자살했더군요. 그 뉴스를 보고 탄식을 금치 못했습니다. 정의로운 이가 이렇게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구나. 안타깝습니다.
이를 보고 결심했습니다.
지금까지는 회사 내부의 내부고발만 우대해줬습니다. 이제 우리가 낸 세금이 낭비되는 걸 막아준 정의로운 이까지 확장하겠습니다. 내부고발을 하고 그 증거를 우리에게 주면 우리가 분석해서 포상금과 정의 가산점을 주겠습니다. 어차피 내부고발의 수사는 내선에서 덮기 식 축소수사가 될 테니 우리가 따로 평가하겠습니다.
우리는 정의로운 이를 돕겠습니다. 이건 기부가 아니라 미래그룹이 강하고 올바르게 되도록 돕는 일입니다.”
가산점이 있다 해서 무작정 다 뽑히는 건 아니다.
프로그래머를 뽑는데 문과생이 와봤자 가산점 3점 더해도 탈락이다.
다만 100:1 경쟁에서 가산점 3점은 경쟁자 절반이 뭉쳐있는 구간을 돌파할 큰 점수다.
-ㅋㅋㅋㅋ배신하라고종용하네
-배신이 아니잖아?
-좋은 일이지
-솔까 부정부패 눈감는 이유가 해봤자 손해만 보니까 그런거지
-그래서 더 썩고
-근데 진짜 누가 때렸나?
-누가 또 우리 윤형한테 시비걸었니?
“시비라뇨. 후후. 옳은 데 돈 쓰는 것 뿐이죠. 옳은 사람이 옳은 행동으로 인해 피해보는 게 안타까워서 하는 일입니다. 그런 이가 회사에 많이 들어오면 회사가 건강해지고 더 잘 돌아가게 되겠죠.”
채인수가 댓글들을 보다가 답변했다.
-일하기 무서울듯
-누가 날 찌를지 몰라 말도 없어질듯
-취해서 말실수하면 짤리겠네
“회사는 일하러 오는 곳입니다. 서로 어깨동무하고 돈 빼돌리러 오는 곳이 아니죠. 집에 가기 싫은 부장이 단합이랍시고 회사 돈으로 술 먹으러 오는 곳이 아니죠. 우리는 회식비도 매달 일정액을 월급에 같이 넣어줍니다. 따로 법카로 긁는 회식은 없어요. 일 끝나고 마시고 싶은 사람끼리 마시는 거죠. 각자 엔빵해서 먹는 회식이야말로 강요 없는 진짜 회식이죠.
의외로 분위기는 더 좋습니다. 신입 취하게 해서 바닥까지 보여주게 만든 후 그걸 꼬투리삼아 괴롭히는 회사문화보다 성인끼리 서로 거리유지하며 할일하고 할 말하는 회사가 업무효율도 좋고 싸움도 덜 일어나덥디다. 말실수하면 짤린다? 말실수할 비밀을 간직하고 있나보네요.”
-포상금은 어떻게 계산해요? 공무원도 다 받아줘요?
-여기 간첩있다
-내부고발 좋은거잖아
-내부고발자가 모여서 회사를 만들면 그 회산 일하기 존나 무섭겠네
-회사 졸라 잘 돌아갈듯 졸라 독서실 분위기로 일만할듯
“뽑는 섹터마다 요구하는 능력이 다르죠. 공무원도 하는 일이 다 다르잖아요. 내부고발로 왕따 당하고 있거나 내부고발을 생각하고 있다면 우선 살길 찾아보세요. 우리 회사가 하도 커져서 거의 모든 섹터가 열려있으니 적당한 일자리가 있을 겁니다. 무조건 고용은 약속할 수 없지만, 적절한 능력을 갖고 있다면 가산점이 큰 힘이 될 겁니다. 정의구현하세요.”
-정의구현하세요ㅋㅋㅋ
-ㅋㅋㅋ
-ㄹㅇㅋㅋ
-정 의 구 현
-일반기업인데 여기 찌른 것도 받아주나요?
“안타깝게도 저희가 간섭하기엔 명분이 없네요. 공무원은 ‘세금’이라는 저희가 낸 지분이 있기에 낄 수 있지만, 일반 기업까지 확대하면 경쟁사 죽이기다 뭐다 해서 문제가 됩니다.”
-군인인데 우리 행보관 찔러도 내부고발인가요? 이 아저씨 매달 고추장 한박스씩 빼돌려요
-ㅋㅋㅋㅋ
-생계형범죄이므로 무죄선고합니다ㅋㅋㅋ
-아오 우리 뽀급중사 참기름 빼돌리던거 생각하면
-너희도 참기름이냐?ㅋㅋㅋ우리도 참기름 다빼돌림
-게란 두 판 씩 매일 빼돌려서 부대앞 구멍가게에 팔던 원사님 부자되셨습니까?
“군인도 공무원이죠. 나라월급 받잖아요. 신고하시고 불이익 받은 만큼, 그리고 죄인이 벌 받은 만큼 포상금 드리고 계약에 가산점을 드리죠. 입사하고 싶으시다면 오세요.”
찌르고 오세요.
그 행보관 탈세했으니 감옥보내야지.
그래야 후임 병사들이 정상적인 밥을 먹지.
이게 국위선양이고 애국이지.
“어쩌다보니 국가가 할 일을 대신 해줬네요. 불철주야 나라를 꾸려가시느라 너무 바쁘신 것 같아서 저희가 좀 돕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는 저희 일도 열심히 할 테니 국가에서는 정의로운 사람을 빼 오는 데 대해 노여워하시지 않길 바랍니다.”
꾸벅.
채인수가 천천히 인사했다.
이건 경고가 아니다.
전쟁을 시작하자는 선전포고다.
연못 앞 정자에서 노트북으로 발표를 본 후 옆을 봤다.
타우바트섬에서부터 내 담당으로 붙은 국정원 직원 노민우, 추상희가 특별 초대되어 함께 봤다.
아직 젊고, 그래서 손에 콩고물이 덜 묻었을 것 같은 인물들.
둘의 표정은 오만가지 생각에 혼란스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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