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국가
요가하고 있던 예하의 손을 잡고 본관으로 달려갔다.
한겨울인데 슬리퍼에 요가복, 무릎 늘어난 츄리닝 차림이다.
본관에 도팀장, 이제 사장이 된 도윤정과 채인수가 나와 있었다.
“무슨 일인데?”
“국정원. 간첩죄로 잡겠대요. 씨아가 준 정보.”
간첩죄.
한국에선 모든 법 위에 존재하는 무소불위의 범죄.
적은 쓸 수 있는 가장 강한 수를 뒀다.
내가 간첩이라니.
개도 안 믿겠다.
수습되지 않을 텐데.
어쨌든 잡힐 순 없다.
고문당하거나, 정신병자가 미친 척 쏠 수도 있다.
“도팀장님 탈출은?”
롱패딩을 벗어 예하에게 입혀주던 도윤정이 빠르게 말했다.
“플랜B가 좋을 것 같습니다.”
“바로 해주세요.”
“예.”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밖에서는 나와 예하가 건물에 들어온 걸 봤겠지.
곧이어 경호팀이 본관에 몰려오고 지하 주차장에서 차량이 한대 씩 나왔다.
“이간질로 사회붕괴! 돈으로 국가전복!”
“사랑! 믿음! 신뢰! 우정!”
“한국을 집어삼키려는 음모! 그만둬라!”
그만둬라. 그만둬라. 그만둬라.
무수골 저택 담장 너머엔 500여명이 모여 시위하고 있다.
한푼줍쇼 거지들과 프리랜서 기자라는 이름의 파파라치들도 수두룩하다.
언제나 시위하는 곳이다.
차가 오갈 때마다 은연 중 방해하고 어떻게든 괴롭히려 한다.
그게 하나의 문화처럼 되서 온갖 잡상인에게 큰 수익을 안겨 주기도 한다.
사람들 틈을 뚫고 본관에서 차량 한 대가 나갔다.
3분 후 차량 한 대가 더 나갔다.
3분 후 차량 열 대가 나섰다.
승용차 6대와 미니버스 3대, 그리고 내가 즐겨 타는 SUV.
대통령 경호를 능가하는 100명의 경호팀.
100명과 함께 다니려니 차량이 10대가 필요하다.
어딜 가도 그렇게 이동하다보니 내 사치로 포장되기도 하고 대통령보다 위대한 게 맞다는 말도 나온다.
짙게 선팅된 차들은 사람들 틈에 막혀, 계란도 맞고 스프레이도 뿌려지다가 본관에서 따라 나온 경호팀이 뜯어내 벗어날 수 있었다.
매일 고소해도 저런 인간들은 자연발생 한다.
10대의 차량은 도봉로를 따라 북쪽으로 가다가 의정부 톨게이트 인근에서 경찰에 막혔다.
긴급체포영장이 발부되고 경찰의 강압적인 수색이 있었다.
잠시 후 본관 문이 열리고 전용차 2호기 미니버스가 3호기 대형 버스캠핑카가 나갔고, 1분 간격으로 본관 식구들의 차량이 나갔다.
그리고 노인을 위한 보행기도 한대 나갔다.
미래그룹 전체 재무총괄이사인 황영석의 어머니는 80대 후반으로 잘 걷지 못하신다.
그녀는 매일 두차례 티코만한 럭셔리 보행기를 타고 무수골 주변 공원을 산책하시는데 경호원 두 명이 붙어 다니며 보호한다.
늘 시위하던 사람들은 회장차가 나갔기도 하고 늘 보던 할머니인지라 그냥 보내줬다.
할머니의 커다란 보행기가 저택 남쪽 공원을 지나 예전에 내가 살던 원룸 앞까지 왔다.
코인으로 종자돈을 마련하던, 예하를 처음 만났던 원룸 앞.
택시가 서 있고, 선글라스를 낀 도윤정이 안에 있었다.
“나오십시오.”
경호원이 할머니의 의자 아래 커다란 짐칸을 열어줬다.
예하와 내가 꽁꽁 안고 있어서 혼자 나오기도 힘들다.
경호원들이 당겨서 꺼내주었다.
“고마워요 어머니.”
“어머니 감사합니다.”
“추울 텐데 어여 가봐.”
“네. 어머니도 어서 들어가세요.”
“홀홀홀. 젊어진 기분이여. 호홀.”
할머니가 넉넉하게 웃으며 무수골로 돌아갔다.
복면에 가까울 정도로 전신을 덮어쓴 둘은 택시 뒷좌석에 타 의자를 젖혔다.
넓은 수납공간.
또 누워야 한다.
“어디로 모실까요?”
택시에 휴무 등을 켠 도윤정이 물었다.
“플랜대로. 옥수동으로 가요.”
“예. 손님.”
예하와 나란히 누워있는데 긴장한 숨소리가 들린다.
“괜찮아. 마지막 발악이야.”
원래는 더 귀찮을 수 있었겠지만, 상대가 스스로 자멸하는 수를 뒀다.
이러면 오히려 금방 끝나고 좋다.
“으... 응. 오빠, 진짜 그렇게 할 거야?”
“응.”
“......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해. 오빠.”
“응. 괜찮아. 별 거 아니야.”
말이 끊겼다.
앞쪽에서 도윤정이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다.
“1호차 수색 당했고, 연행되었답니다. 2호차, 3호차도 잡혔고 수색 중. 무수골에서 나온 차량 전부 경찰이 붙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약간 빨랐네요.”
“예.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늦어 경찰이 저택 주변을 포위했으면 탈출은 불가능했겠지.
들키지 않고 탈출용 땅굴을 파는 건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차량은 동부간선도로에 들어가 쭉쭉 달렸다.
코로나 거리두기 덕에 평소보다 덜 막힌다.
이대로 가면 된다.
언제나 막히는 용비교를 지났을 때 도윤정이 소리쳤다.
“경찰. 경찰이 붙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선택지가 뭐 있죠?”
“순순히 내린다, 뿌리친다.”
“뿌리치세요.”
“예.”
차가 거칠게 흔들렸다.
차 바닥에 누운 예하와 함께 이리저리 충돌했다.
이럴 용도로 완충제를 붙여놓지 않았다면 온몸을 다 다칠 뻔했다.
품에 안고 있던 예하를 조금 아래로 내리고 얼굴을 감싸줬다.
“오빠?”
“얼굴 다칠까봐.”
끼이익.
“전 인원 대기! 전원 집합!”
밖에선 도팀장이 소리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걸린 거지?
이 택시가 우리 소유인것도 알려졌나?
아니면 파파라치가 보고 정보를 팔았나?
잘 모르겠다.
“오빠. 난 괜찮아. 오빠가 나보다 더 귀한데.”
예하는 손을 뻗에 내 머리를 감싸려 한다.
“그래. 서로 보호하자.”
중앙선을 넘나들며 패스트퓨리 찍고 있는 도윤정이 들었으면 화냈으려나.
둘이 속삭였으니 도윤정에게 들키진 않겠지.
끼이이익. 긴 브레이크음과 함께 차가 섰다.
옥수동 코앞이었기 때문에 다행히 바리케이트는 없었고, 3분여의 질주가 끝났다.
문이 벌컥 열리고 의자 시트가 확 들린다.
“손 잡으십시오 회장님!”
경호팀 수십명이 보인다.
뻗어주는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뒤에서 사이렌 소리와 고함소리가 들린다.
여럿 잡혀가겠네.
경호원이 잡고 있던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예전엔 사지 못했지만, 그룹이 커진 후 웃돈 주고 산 펜트하우스.
모든 창을 방탄으로 바꾸는 등 많은 준비를 했다.
컴퓨터와 카메라들이 준비되어 있고, 여기도 경호원이 그득하다.
“입구 막아주세요.”
“예.”
도사장의 지휘하에 경호팀이 바리케이트를 쳤다.
각지에서 경호팀이 꾸역꾸역 몰려오고 있다.
아파트를 경호원이 인의 장막을 칠 거다.
켜져 있는 컴퓨터엔 미래그룹 공식방송이 켜져 있고, 채인수가 나와서 떠들고 있다.
우리가 정부에 받고 있던 압박. 돈을 요구한 녹취. 우리가 받았던 부당한 대우 들.
채인수 전엔 노민우와 추상희가 나와서 국정원의 납치계획과 비리들을 밝혔다고 한다.
상대가 폭탄을 꺼냈으니 우린 더 강한 폭탄을 쏜다.
잠시 방송을 지켜보는데 국정원과 경찰특공대가 아래층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제 사람들을 하나씩 뜯어내면서 연행하겠지.
채인수에게 전화했다.
“형 이제 내가 할게요.”
-그래 동욱아.
방송 안에서 전화를 받은 채인수가 말했고, 곧이어 화면이 바뀌었다.
방에서 편하게 입는 무릎 늘어난 트레이닝복 차림의 나와 요가복 위에 롱패딩을 입고 있는 예하.
둘 다 머리가 엉망이고 땀에 젖었다.
일부러 정리하지 않았다.
화면 속 예하는 여전히 예쁘고, 덕분에 그 옆엔 땀에 젖은 오징어가 있다.
제길.
연인은 마주보고 있을 때가 제일 좋아.
내 얼굴이 안 보이잖아.
“오빠?”
“어 어. 맞다. 음.”
방송 해야지.
그러고 보니 공식방송은 처음이네.
“안녕하세요. 윤동욱입니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동안 내가 왜 쫓기고 있는지 채인수에게 들었다.
북한에서 조직적으로 데이터공유를 통해 미래블록을 벌어들였다.
여기에 미래그룹의 도움이 있었던 것 같다.
북한에서 밀수품을 미래쇼핑으로 구매한다.
여기에 미래쇼핑의 도움이 있었던 것 같다.
북한에서 미래메신저 비밀성을 통해 간첩에게 지령을 내리는 것 같다.
이를 막으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간첩죄란다.
어찌보면 맞는 말이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
간첩이 라인톡 메일을 이용하면 라인톡이 간첩인가.
적은 자충수를 뒀다.
그건 더 이상 설명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국가란 무엇일까요.”
녹화되고 두고두고 퍼질 영상이다.
플랜 B에 대한 대본도 미리 준비되어 있다.
“태어난 곳. 나고 자란 곳. 가족, 친척, 친구, 삶이 녹아있는 곳.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사는 곳. 비슷한 사상과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는 곳. 이게 저에게 있어 한국입니다. 전 한국인이고 한국이 좋고, 그래서 벌어들인 돈 중 대부분을 한국의 복지에 쓰고 있습니다. 나 개인을 위해 쓴 돈의 1000배 가량을 한국에 썼네요. 물론 정부가 하는 일과 상관없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복지에 썼고, 그로인해 오히려 피해 입는 이도 있는 거 압니다. 그래도 전 올바르게 행동했다 생각합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 댓글들을 구경했다.
“제가 생각하는 국가론에 제 돈을 뺏기는 건 선택지에 없습니다. 국민의 돈을 마음대로 빼앗고, 알량한 권력으로 협박하고, 빨대 꽂아 두고두고 훔치려는 도둑놈은 내가 살 나라엔 필요 없습니다. 애초에 달라는 대로 돈을 쥐어주고, 대신 그 이상의 세금을 우리 앞으로 돌려주는 돈세탁을 승낙한다면 이런 정치적 마찰도 없었을 테고, 정부와 미래그룹 모두 좋은 선택이었겠죠. 하지만 처음부터 거절했습니다. 한번 코뚜레를 뚫리면 더 많은 돈을 바치고, 대신 그 이상의 혜택을 받아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거절한 이유는 지금 터지고 있는 비리를 보면 알 수 있겠죠.”
댓글들이... 화려하다.
엄청난 욕이 올라오지만, 대부분 정부 욕이다.
좋다.
내가 간첩이라니.
잡고 나서 조작된 증거들을 발표하면 몰라도 날 놓쳤으니 이미 끝났다.
“국가란 무엇인가. 공산당에게 잡혀 입이 찢어지더라도 나라를 위해 웃으며 죽어야 하는 것?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2년의 시간을 군대에서 죄수보다 못한 삶을 사는 것? 온갖 비리를 보면서도 입을 열면 피해를 보는 것? 가족을 위해 그냥 나 죽었소 하며 참고 사는 것? 이것이 나라의 정의일까요?”
와아아.
막아.
모두 꺼져! 총 꺼내! 버텨.
밖이 시끄러워졌다.
열어둔 현관 밖으로 사복경찰이 나타나고 어깨동무하고 스크럼 짜고 있는 경호원이 경찰봉에 맞아 하나씩 끌려간다.
폭력을 동원하는 걸 보니 저들도 급한가보다.
이미 늦었는데 포기하지.
카메라가 현관쪽으로 돌려져서 그 모습을 생생히 중계하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고 시대가 바뀌고 국가의 정의가 바뀌고 있습니다. 몰타라는 나라는 200만 달러를 내면 누구든 간에 시민권을 주는 신분세탁 장사를 해서 나라를 먹여 살렸습니다. 아일랜드라는 나라는 법인세를 13%까지 낮춰 글로벌 기업들의 세금 절세 국가로 큰돈을 벌어 나라를 먹여 살립니다. 하다못해 미국에서도 해외 기업을 유치하며 세금감면, 부지지원, 노동자 임금 지원 등을 해서 국제기업을 유치합니다. 이번에 상속세도 크게 줄였죠.”
막아.
다 끌어내! 전기는 왜 안 끊어?
발전기 돌리고 있다 이새끼야.
“국가의 개념을 착각하는 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전엔 태어난 나라에서 지배자가 시키는 대로 당하는 게 국민이었지만, 이제는 비행기를 통한 이동이 자유로워졌고, 국적을 바꾸는 것도 쉬워졌습니다. 그러니 미친 짓을 하지 마십시오. 경고입니다.”
“일단 잡아! 저 입부터 막아!”
소리 지르는 국정원 부장 안재철과 눈이 마주쳤다.
싱긋.
내 옆에 사람 하나가 섰고, 카메라가 이쪽으로 돌려졌다.
CIA 한국지부장 칼리 페르난도다.
“한 달 전 이런 일에 대비해 미국 국적을 신청했고, 현재 전 이중국적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의 법은 이중 국적을 허용하지 않더군요. 국가에서 옳게 변화한다면 저는 한국인으로 살아가려 했습니다만......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한숨이 조금 나온다.
애국심은 아니지만...
아쉽다.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선언했다.
“전 한국 국적을 포기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전 미국인입니다.”
일이 끝났음을 알았는지 선두에서 돌파하던 경찰들이 멈췄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이 모든 건 쇼다.
국적포기 발표는 본관에서 했어도 된다.
그저 내가 괴롭힘 당하는 불쌍한 시민이고, 국가의 괴롭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국적 포기한다는 이미지를 얻기 위한 잘 짜여진 쇼다.
세계 최고 부자가 머리가 헝크러지고 땀을 줄줄 흘린다.
죄 없는 경호원들은 구타당하고 끌려간다.
무대의 주인공은 간첩죄를 지껄인 국정원.
그리고...
“그리고 할 말이 있으니, 한국 대통령 오라고 해요.”
씹새야.
“30분 준다. 요.”
말이 샜네.
- 작가의말
개연성에 대해 말씀 드리자면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이 불과 8년 전이었습니다
실수로 잡은게 아니라 처음부터 증거를 조작하고 증인을 협박해 실적용 죄수로 만들려고 기획한 조작이 고작 8년전이죠국정원이 주인공을 얽는 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형선고는 불가능해도 불시에 체포하고 조작한 증거로 회유해 길들이는 건 가능할거 같네요최근에 간첩사건이 터졌는데 그거랑 상관없어요... 글 처음 쓸때부터 구상한거라... 그사건은 읽어보지도 않아서 몰라요. 둘 중 하나가 잘못했겠죠 뭐...
Commen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