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샤덴프로이데
대학 동기들.
걔들도 만나야 하는데.
바빠서, 사실은 귀찮아서 미루고 있었다.
과거의 난 반쯤 효자였다.
엄마는 말씀하셨지.
‘노는 건 대학가서 열심히 놀고 고등학교 땐 열심히 공부해.’
반쯤 효자였던 나는 엄마 말을 절반만 따랐다.
고등학교 때 놀고 대학가서도 놀았으니 절반이라도 효자인거 맞지.
잘생긴 미모 덕에 실기점수를 잘 봐서인지 형편없는 점수로도 도봉대 연극영화과에 붙었다.
적당히 잘살던 아버지가 독립심을 길러주겠다며 망월사 인근에 집을 사줬고, 대학가서 사귄 여친과 반동거를 하게 되었다.
그땐 거의 벗고 살았다.
엄마의 말씀을 잘 지켜 대학가서 열심히 놀았는데 1학기 성적표가 FFFFFD로 확정되자 아버지한테 뒈지게 맞고 정신 차리라고 군대를 가게 되었다.
해병대 원서를 넣으니 3주 만에 군대로 가더라.
19개월 후 전역했고, 바로 1학년 1학기로 복학.
현재라면 2학년 2학기를 시작할 무렵이다.
이즈음 부모님의 집문서를 훔쳐 코인에 몰빵했었다.
레버리지 10배 상승 올인.
이 돈은 11월에 50% 하락빔이 쏟아지면서 전부 청산 당했다.
그 두 달 사이 난 거의 미쳐있었다.
부모님의 집을 코인에 넣었으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를 거야, 오를 거야.
같은 말을 끝없이 되뇌이니 그게 진실이 된다.
난 잘생겼어, 라는 거짓말을 끝없이 되뇌인다고 잘생겨지지 않지만, 거울을 볼 때 잘생겼다고 착각하게 된다.
분명 오를 거라고 끝없이 되뇌이고, 인터넷의 근거 없는 희망론을 끝없이 긍정하고, 차트니 뉴스니 호재니 하는 헛소리를 모으고 모아 오를 수밖에 없는 천 가지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확신을 주위사람에게 퍼트렸다.
세뇌당해 사이비 종교에 빠진 이가 그걸 진심으로 믿은 후 주위 사람에게 퍼트리는 것과 같은 이치.
훗날 생각해보면 스스로의 불안감 때문에 어깨동무하고 낭떠러지로 같이 달려갈 사람을 모집한 것 같다.
내 확신과, 내가 몰빵한 계좌와 내가 반복해서 한 말 때문에 주위사람들이 돈을 넣었고, 다 같이 망했다.
그 후 대학시절 거의 모든 인간관계가 끊어졌다.
돈을 잃은 사람의 욕설과.
주변 사람의 비웃음과.
건너건너 들은 사람들의 몰빵한 돈을 다 날린 놈을 향한 끝없는 동정, 위로, 걱정을 가장한 샤덴프로이데.
모든 단톡방에 끔찍한 조롱이 가득했다.
왜 그랬을까.
올라서 다 같이 돈을 벌면 술 한 번 얻어먹고, 떨어져서 다 같이 돈을 잃으면 원수가 되는 압도적으로 불리한 배팅을 한 것이다.
추천 같은 비효율적인 배팅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렇게 내 인간관계가 좁아졌다.
이번 생엔 작년 초에 돈을 빌렸고, 12개월 후에 일괄 두 배로 돈을 갚았다.
빌린 돈이 280만원 정도였다.
대학친구들과의 인연은 280만 원짜리였던 거다.
“죄송합니다. 제가 여친 역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나선혜가 진심을 다해 말했다.
그 진심이 위험해.
“그럼 예하가 삐져요.”
예하에게 전화를 했다.
-힝. 재밌겠다. 그런데 방송 잡혀 있어서... 차라리 거기 가서 라방할까?
“됐어. 그냥 혼자 갈게.”
-엉. 그 언니 실수한 거 같은데 뭐라 하지 마용.
“그래.”
전화를 끊고 돌아보니 스케줄비서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보고 있다.
뒤의 비서들도 그렇고.
“악의를 갖고 그런 거 아니니까 괜찮아요. 실수인거 이해하고,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고. 고의로 나쁜 짓만 하지 마요. 본관에 외출한다고 전해줘요. 그리고 전화기.”
전화를 받아 오상욱과 통화해 장소와 시간을 받았다.
“아 귀찮아.”
라고 중얼거리자 비서진이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재밌네.
사실 좀 기대되기도 하고.
어떡하면 뻐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부자인 걸 들킬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피네.
“자연스럽게 해주세요. 가난한 대학생 코스프레. 알죠?”
코디를 고심에 빠트리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고생시켜 불쌍해 보이는 색조화장을 받고, 헤어아티스트에게 머리를 까치집으로 꾸민 후 집을 나섰다.
“반가워요.”
도팀장이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에 도팀장의 위장택시를 탄다.
9월초 해가 뉘엿한 시간에 도봉대에 도착했다.
인서울의 끝자락.
도봉대는 서울과 의정부의 경계에 위치해 명산에 둘러싸여 있다.
장점은 이걸로 끝.
그린벨트지역이라 학교 근처의 자취 하숙집은 49년쯤 된 창고 같은 느낌이고, 술집도 거의 없다.
술을 마시려면 도봉산역에서 불륜객들 사이에 껴서 막걸리에 파전을 먹거나 의정부역이나 수유까지 나가야 한다.
그러느니 학교에서 먹고 말지.
“여~ 동욱아!”
저쪽 잔디밭에서 동기들이 손을 들어 환영한다.
둥글게 앉은 인원만 서른 명을 넘는다.
잔디밭에서 소주.
오랜만이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후배로 보이는 서너명이 벌떡 일어나 절도 있게 인사한다.
옛날에는 당연했는데 지금 보니 참 거지같은 풍습이다.
괜히 분위기 깨기도 뭐하고 가볍게 인사하고 외면했다.
앉자마자 소주로 가득 찬 잔을 받았다.
“3년 만에 얼굴 보는 동욱이를 위해 건배~”
MC본능이 있는 오상욱의 주도하에 한잔 마셨다.
안주는 중국집 탕수육과 짜장, 짬뽕국물 여러개다.
과자들이 있고.
“아직도 이러고 먹냐?”
“대딩이 돈이 어딨냐. 그래도 예전보다 나아진 거지.”
연영과의 단점.
선배 덕을 보기 힘들다.
성공한 선배는 너무 바쁘다.
졸업 후 단역으로 먹고사는 선배는 똥꼬 찢어지게 가난하다.
카메라, 조명, 연출 쪽으로 빠지는 선배는 차비도 벌지 못해 기초수급자보다 못한 삶을 산다.
부모 돈으로 놀고먹는 대학생이 오히려 부유한 편.
이러니 다들 3 4학년인데도 잔디밭 신세지.
한잔 더 받고 동기들 얼굴을 봤다.
먹고 토하고 온갖 바보짓 함께하던 녀석들.
내 투자 권유로 인연이 끊어진 녀석들.
그 녀석들의 비난은...... 정당했지.
제길.
“안녕.”
동기 하나와 눈이 마주치자 여상스럽게 인사가 온다.
한민선.
동거하던 전여친.
연영과에서도 예쁜 축에 속하던 애로 지금도 꽤나 예쁘다.
예하 앞에선 개똥벌레지만.
“잘 지내지?”
“어. 너도 얼굴 좋아 보인다.”
대화는 이걸로 끝.
애틋한 옛 감정은 없다.
도망치듯 군대 가고 3개월 만에 한민선에게 새남친이 생겼을 땐 죽고 싶었는데 어떻게 적응해 살게 되더라.
오히려 옛날 일을 가져와 성폭행 고소가 들어올까 봐 불안하다.
증명할 수 없는 4년 전 일로 성폭행신고를 하고 일관된 주장을 하면 감옥가야 하잖아.
쿨하고 착한 애한테 이런 걱정을 하는 내가 자괴감 든다.
“니들 왜 이렇게 서먹해. 노노노 너 너무 차가운 거 아니냐.”
“옛날에 니들 죽고 못 살았으면서.”
괜히 끼어드는 머저리들은 무시하고.
고개를 돌리다보니 반가운 얼굴이 몇 보인다.
나 때문에 돈을 잃고 단톡방이 난리가 났을 때.
난 솔직히 사과했고, 사정을 말했다.
비난, 욕설, 조롱 속에서 옹호하던 이도 있었다.
불쌍하니 그만하라는 사람과.
투자한건 자기 자신이니 남 탓하지 말라는 사람.
비난하는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옹호하는 사람이 더 마음 가는 건 인지상정이겠지.
“안녕.”
근처에 있는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네. 안녕하세요.”
당황하며 인사하는 여자아이.
원래대로라면 지난학기부터 같은 수업을 듣고 친해지고, 나 때문에 혹해 투자했다 망했지.
이름이......
“야. 오자마자 작업 거냐? 여친도 있다며.”
오상욱이 끼어든다.
“어?”
“아까 니 전화 여친이 받았잖아. 같이 온다며 왜 혼자와.”
“걔는 일 있어서 못 왔어.”
언제나 그렇듯 술자리에선 주제가 휙휙 바뀐다.
“맞다. 코인 어떻게 됐어? 요즘 많이 떨어졌다고 하던데.”
또 주제가 바뀌었다.
“적당히 손해보고 있어.”
“적당히가 아니던데. 태초마을로 돌아갔잖아. 괜찮은 거야?”
오상욱이 걱정하듯 물어보는 데 입가에 미소와 기대감이 엿보인다.
샤덴프로이데.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
메시우마. 이웃이 망해서 밥맛이 좋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남의 행복은 나의 불행.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근원적 심리.
“어. 존나 망했어. 그 때 뺐어야 하는데.”
니들을 행복하게 해주마.
“저런.”
“쯧쯧.”
“이를 어째.”
“그래서 복학 못하는 거야?”
위로 걱정 받아서 행복하다.
“고맙다.”
이걸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삐뚤어진 건가.
“그래서 얼마나 잃었는데?”
“아니. 뭐. 그냥저냥. 번거 다 뱉고 시드 박살나고.”
“헐.”
“야야. 그럼 우리 받은 건.”
“우리가 이자 받았을 때가 고점이었잖아.”
“그러네. 우리 그거라도 돌려주자.”
“원금만 챙기고 이자는 돌려주는 게 낫지 않을까?”
“맞네. 친구끼리 무슨 이자야. 두배도 너무 심했어.”
내가 돈을 빌린 게 단톡방에 소문이 났고, 두 배로 돌려준 건 더 크게 소문이 났다.
연락이 뜸해지자 해외 이민이니 뭐니 하며 시기와 질투 음해도 돌았고.
그래도 세상이 그리 피폐하지는 않다.
지들끼리 얼마 받았냐고 물으면서 이자로 받은 거 모으자고 하는 걸 조용히 지켜봤다.
예전 삶에도 돈을 잃고 투자는 자기 선택이라며 넘어간 이들이다.
본성이 선한 사람도 많다.
“그럼 요즘 일하냐? 아깐 뭐하고 있었냐?”
화제를 돌리는 오상욱.
얘가 10만원 빌려줬었나. 10만원 이자가 아까운거겠지.
본성이 나쁜 사람도 많다.
“방구석에 있었어. 세계경제흐름 파악하고, 베네수엘라와 가이아나에서 빼먹을 만한 알짜 기업 고르고 있었어.”
푸웁.
우하하.
마셔마셔.
한잔해.
좋은 농담이었나.
술이 좀 들어가니 서른 명 가까운 인원이 갈린다.
여기저기서 저마다의 주제를 떠든다.
예전엔 더없이 즐거웠는데 이젠 별로네.
껍데기는 24살이지만, 알맹이는 40대라 그런가.
여러가지 고려해서 말해야 하는 술자리가 귀찮다.
친구는 가오리 닥똥으로 충분할 것 같다.
걔들이 늙어죽고 외로우면 80대에 동창회 나가지 뭐.
요즘 황혼동창회가 그렇게 활발하다는데.
하나둘 얼굴을 보고 20살에 있었던 사건을 되새기며 좋은 사람을 기억에 새긴다.
챙겨줄 사람들과 차단할 사람들.
가로등 켜진 잔디밭에서 왁자지껄한 술자리 한구석에 고립된 느낌이다.
적당히 대답하며 술을 마시는데 기분은 좋다.
성공했구나. 나.
다 버려도 상관없다는 이런 여유가 성공의 맛이겠지.
와보니까.
뻐기고 자랑하고 싶은 생각조차 사라졌다.
질투나 하도록 만들기엔 너무 고달픈 청춘이다.
술을 입에 가져가는데 옆에서 말을 건다.
“선배님.”
신입생.
착한 아이.
나 때문에 돈을 잃은 아이.
“어.”
“아까 하실 말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웃기게도 선배에겐 이런 말투를 써야 한다.
군대도 안간 놈들이 왜 이런 문화를 만드는지.
서열문화는 제발 좀 없어지자.
“그냥 얼굴이 낯이 익어서 불렀어.”
“네.”
“기억 안 나? 방학동 편의점에서 알바하지 않았어?”
“네? 아. 마이클잭슨!”
“응?”
“아닙니다. 아니... 그게...”
“다른 사람하고 헷갈린 거야?”
“그게... 그때 머리 길고, 흰티 위주로 입지 않으셨습니까?”
긴 머리가 아니라 손질 안한 머리긴 하지만.
“나 맞네. 왜 마이클 잭슨이야?”
“그게... 편의점에 오실 때 문워크로 오셔서......”
여자애가 죽을죄를 지은 표정으로 사죄한다.
문워크.
마이클잭슨의 성명절기.
안방학동 원룸에 살 때 얘가 겨울부터 편의점 알바를 했다.
수능 끝나자마자 일한 것 같다.
그땐 얼굴을 봐서 반가웠지만, 대학에 가기 전이니 아는 척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코인에 빠져있을 때여서 정신없었지.
집에서 편의점까지 100m.
집의 컴퓨터에 수조원의 돈이 있는데 도둑이 들면 어떡해.
불안한 마음에 집을 나와 집을 감시하며 편의점으로 뛰어가면... 뒤로 뛰는 게 문워크처럼 보이겠네.
젠장.
아 쪽팔려.
시발.
괜히 말 걸었다.
썅.
스읍, 하.
스읍, 하.
아놔 제기랄.
“정미야. 그 아저씨 여친 있대.”
“양다리를 노리냐?”
“우와. 돈도 없다면서 여자 꼬시는 거야?”
엄한 놈들이 말을 끊어줬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놔 젠장. 마셔 새끼들아.”
“원래 성격 나왔네.”
“그래 몰라 마셔.”
마시고 보자.
정미. 차정미.
이름 들으니까 기억나네.
이번엔 얘한테 피해 입힌 게 없으니 넘어가려고 했는데......
얘도 좀 챙겨주자.
띠리리리.
“어.”
-오빠 어디야?
“나 다니던 학교.”
-그치? 뒤를 돌아보세요.
“어?”
돌아보니 예하가 있다.
어두워진 교정에 홀로 빛나는 외계미인이 있다.
연영과 미남미녀들을 다 오징어꼴뚜기로 만드는 이기적인 놈.
“오빠아아아.”
양손에 봉다리를 가득 든 예하가 뛰어왔다.
- 작가의말
분명 구상을 할때는 쉽게 번돈 펑펑 쓰는 사이다소설이었건만
왜 피폐물인것이냐
수많은 소설에서 증명한 사이다동창회인데
왜 피폐물이 나오는 것이냐
골치아프구만
단짠단짠 공식에 따라 이부분은 불량식품보다 더 단 부분인데
허세 좀 부리고 돈도 뿌리고 갑질좀하고 아니꼬운놈 쪽 주면 그보다 통쾌할수 없는데
왜 짜디짠 피폐물이더냐
아놔 글 진짜 구리네
샤덴프로이데같은 보통사람 대부분에게 적용되는 용어는 아무도 알고싶어 하지 않는다고
글 구려
내 글 구려서 내가 짜증나므로 단맛 나올때까지 연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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