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람의 인생은 너무 쉽게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기 힘들다
금발태닝백수는 두 손으로 소중한 곳을 감싸 쥐고 주저앉았고, 여자애는 갑자기 손이 풀리자 엉덩방아 찧으며 주저앉았다.
놀란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눈에 눈물이 가득하다.
“어? 천사오빠.”
......
천사?
그거 나냐?
천만원 준 사람의 줄임말인가.
“도련님.”
멀리서 덩치 두 명이 소리치며 달려온다.
복도식 원룸 현관을 통과하면 바로 마주친다.
떡대들을 보고 내 비밀경호원을 찾았다.
그들도 돌발사태에 놀라 원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내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경호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룸 입구에서 서로 부딪쳤다.
양복 입은 덩치 둘은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여자가 껴 있는 일행을 무시하고 지나치려했고, 여자들이 가볍게 발을 걸었다.
우당탕.
빠각.
발을 걸어 쓰러지자 명치를 치고 팔을 꺾는 것으로 제압이 끝났다.
왜소해 보이지만, 구형재 사장이 고르고 골라 뽑은 전직 국대급 경호원들이다.
믿음직하다.
“크윽. 시발.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정신이 좀 드는지 금발태닝백수가 입을 열었다.
두 손은 여전히 국부를 잡고 있다.
턱에 사커킥.
빠각.
턱을 올려 차니 영화 속 슬로우 모션처럼 뒤로 자빠진다.
따라 들어가 문을 닫으려는데 현관에 주저앉아 있는 여자애가 걸린다.
“야. 가봐.”
놀란 눈으로 쓰러진 금발태닝백수를 보던 여자애는 입술을 깨물더니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왜 따라오지?
바로 옆집인 원룸은 구조가 똑같았는데 내방보다 훨씬 깨끗했다.
원룸 절반을 킹사이즈 침대가 차지하고 있고, 책상과 컴퓨터 등은 훨씬 고급스러워 보였다.
저 침대에서 매일 신음소리가 났구나.
개새끼.
방음도 안 되는 원룸에서 그거 듣기 굉장히 괴로웠다.
빠각.
현관에 널브러져 있는 금발태닝백수를 한대 더 차준 후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크으으. 놔. 노라고. 너 죽었어. 시발. 너 진짜 내가 누군지 알려줘?”
“그러는 넌 내가 누군지 아냐?”
“너 따윌 어떻게 알아?”
퍽.
“잘됐네.”
배에다 사커킥.
퍽. 퍽.
“마음껏 패고 도망치면 되겠네.”
“큭. 컥. 그만. 극. 내 할아버지가 시발 널 개새끼야 죽일 거다.”
굼벵이처럼 웅크리고 얻어맞던 녀석이 할아버지를 들먹인다.
“시끄러 울 아빠가 더 쎄. 씹새야.”
퍽. 퍽. 퍽.
이 새끼랑 지금 대면하면 안 되는데.
이제 내 정체가 알려지면 자칫 모든 계획이 다 망가질 수 있는데.
짜증나.
퍽. 퍽.
짜증이 샘솟아서 계속 걷어찼다.
영화에서처럼 다 죽어가던 주인공이 갑자기 우아아악 일어나 역전하는 건 불가능하다.
한번 제압당하면 상대의 선처를 구해야만 살 수 있다.
한번 무너지면 역전이 불가능하다.
인간은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퍽. 퍽.
선처를 해 줄 생각은 없다.
죽어라. 죽어.
“그만.”
여자목소리다.
퍽. 퍽. 퍽.
“그만하세요.”
뒤에서 말리는 소리가 나더니 나중엔 껴안는다.
배를 차던 발이 뒤에 걸려 멈췄다.
고개만 슬쩍 돌려 말했다.
“야. 나 아니었으면 너 죽는 것보다 끔찍한 일 당했어. 그런데 이정도로 그만하라고?”
“아. 아니. 그게.. 저사람 무서운 사람이에요.”
날 보호하려고 말리는 건가.
그보다 금발태닝백수를 알아?
우연히 만나서 끌려온 게 아니었나.
하긴 대한민국이 아무리 썩었다 해도 그러긴 힘들지.
“쟤가 누군데? 그냥 미성년자 납치범에 강간미수범 아니야?”
“조승학 사장. 제 소속사 사장인데 무슨 재벌3세래요.”
제대로 아는구나.
그런데 백제 계열사에 연예기획사도 있었나.
“음.”
“개새끼야. 으윽. 두고 보자. 넌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빠각.
조금 시간을 줬더니 협박하네.
“쟤가 나 죽인다는데 어쩔 수 없이 죽여야겠다.”
빠각. 퍽. 우직. 퍽.
입만 살아가지고.
얼굴이며 머리 몸통을 신명나게 까는데 여자애가 다시 껴안는다.
“그만하세요. 죽어요. 죽으면 어떡해요?”
내려다보니 등산화에 밟혀 터진 굼벵이처럼 엉망이다.
여기저기 피와 치아가 널려있다.
20년 간 복수만을 꿈꾸며 살았다가 한꺼번에 분출되었다.
좀 더 기다렸다가 터트렸어야 했는데 갑작스레 제압하게 되자 이성을 잃었다.
그륵. 그륵.
빠각.
마무리로 한대 더 차주고 침대에 가 앉았다.
“하아. 하아.”
코인 수십억을 거래할 때처럼 아드레날린이 넘치게 분비되었다.
스읍, 하.
스읍, 하.
호흡을 가다듬으며 널브러진 조승학을 노려봤다.
백제 그룹 3세 조승학. 22세.
과거 그렇게나 죽이고 싶었던 인간인데 20년 동안 근처에도 못 갔다.
그런데 저렇게 간단하게 자빠져 있으니 시원하기보다 허탈하다.
물론 상대 경호원을 해치우지 못했다면 내가 저렇게 쓰러져 있겠지만.
아버지의 조경업체는 돈을 빌려 공사를 마무리 했지만 12억을 받지 못하고 끝내 부도가 났다.
아버지는 소송을 걸고 1인시위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아버지는 억울함을 토로하며 술에 빠져 지내다가 뇌혈관이 터져 반신불수가 되었고, 가족 모두 빚과 병수발에 인생을 쏟아야 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인데, 백제건설은 계약대로 12억을 송금했고, 그 돈은 조승학에게 갔다.
어떻게?
애초에 아버지는 백제건설과 계약할 규모가 아니었다.
조승학은 중간에 페이퍼 회사 하나를 만들었고, 페이퍼 회사를 통해 작고 약한 아버지 회사에 하청을 줬다.
백제건설은 조승학의 페이퍼 회사에 공사대금을 지불했고, 그곳의 바지사장이 돈을 들고 튄 시나리오.
여기까지 알아내는데 7년이 걸렸고, 인생의 20대를 모두 날렸다.
이후 힘들게 접근해 물어봤다.
왜 그랬냐고? 너한테 그깟 푼돈 필요 없잖아?
아버지의 분노와 어머니의 한과 내 인생을 담은 질문이었다.
너무도 진지한 질문에 조승학이 진지하게 대답해줬다.
‘글쎄. 기억은 안 나지만... 술값으로 썼을 거 같네.’
피식 웃으면서.
경호원에 제압당해 절규하던 그날 조승학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진지한 대답 고맙다.
만 배로 돌려주마.
회귀한 후 이 당시 조승학이 여기 숨어살던 것을 알았기에 이 원룸에 방을 잡았다.
조승학의 옆방.
채인수가 백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백제건설 법무팀에 입사한 것처럼 난 조승학의 옆방에 자리 잡고 무너뜨리기 위한 증거를 조용히 모았다.
조용히.
1년간.
“하아. 시발.”
은신이 깨졌다.
저걸 죽여 묻을 수도 없고.
백제그룹은 이제 날 조사할 것이다.
옆집의 월세계약을 내 이름으로 했으니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실수했다.
방 한쪽엔 아까 그 여자애가 비 맞은 새끼고양이마냥 오들오들 떨고 있다.
쟤 때문에 순간 이성을 잃었다.
“젠장. 시발 다 망쳤어.”
“죄... 죄송해요. 제가 증언할게요. 의인... 의인께선 어쩔 수 없었던.”
자길 보며 하는 말에 여자애가 나름의 해결책을 내놓지만.
“너한테 한 말 아니야. 됐다. 이미 생긴 일인데...”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조승학의 핸드폰을 챙겼다.
지문인식이군.
“끄으으. 내... 놔...”
빠각.
아가리에 발길질을 한 번 더 해주고 놈의 지문을 핸드폰에 대서 암호를 풀었다.
됐다.
띠리릭.
원룸을 열고 나가자 재밌는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조승학의 경호원인 듯 한 양복 입은 덩치 두 명과 대학생핏의 여자 셋이 어깨동무하고 매우 친해 보이는 자세로 대화하고 있었다.
물론 멀리서 볼 때만 그렇게 보일 것이다.
정면에서 보니 덩치 두 명의 표정은 골병들어 있었다.
“놔줘요. 아저씨들은 저거 병원에 데려가요. 경찰에 신고하면 납치 강간범으로 맞고소 합니다. 고소해도 상관없는데 비서실에 알리면 아마 막을 거에요. 그러니 비서실에 먼저 연락 해봐요.”
“예? 옛.”
대답 잘하네.
내 부하인줄.
덩치 둘은 여자들 눈치를 보다가 방에 들어가 피 흘리는 조승학을 들쳐 업고 뛰어나갔다.
부아앙.
조승학이 차에 실려 떠나는 것을 보고 있자니 경호팀장 도윤정이 말을 걸었다.
“처음에 억지로 끌고 가려던 장면을 찍어놨습니다. 멀긴 하지만 소리도 녹음 됐습니다.”
“괜찮아요. 저놈은 절대 신고 못해요. 대신 습격이 있을 순 있어요.”
“네. 주의하겠습니다.”
“이 방 한번 뒤져보세요. 실려 간 놈의 이름은 조승학이고 백제그룹 3세인데 그 놈이 여기 살았다는 증거를 모조리 챙겨 주세요. 컴퓨터 하드 챙기시고, USB있으면 챙기고 이 핸드폰도 조사해 주시고요. 채인수 사장님 번호 알려드릴 테니까 함께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도 구형재가 신신당부한 덕인지 경호 외의 업무에도 성실히 따랐다.
도윤정이 암호가 풀린 핸드폰의 자동꺼짐부터 지우는 걸 보며 내 집으로 갔다.
바로 옆집.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새끼고양이가 따라왔다.
겁먹은. 애처로운. 새끼고양이.
“왜?”
“그... 그게...”
“고마워하는 거면 필요 없어. 가봐.”
“그... 아뇨. 그게 아니라... 저... 갈 데가 없어요.”
“원래 살던 집은? 너 노숙자냐?”
“아뇨아뇨. 아뇨. 기획사 숙소에서 살았는데...... 대표가 저렇게 돼서... 가면 저 맞아죽을 거예요.”
“물에 빠진 사람 구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던 옛 성현의 말씀.”
“죄송해요. 죄송한데... 저 좀 살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열심히 할게요. 전 죽으면 안 돼요.”
농담 한마디 했다고 울기는.
말도 쉽게 못하겠네.
“......씁. 들어와.”
여자애는 며칠 전 자기가 청소한 그 방에 따라 들어왔다.
방 한가운데에 컴퓨터 한대만 있고 휑하다.
며칠 전 다 버렸지.
쟤가 청소했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작은 중고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현관 근처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새끼고양이한테도 물 한 개 건네주고 바닥에 앉았다.
“와봐.”
“예? 예.”
겁먹은 아이가 조심스레 다가와 마주앉았다.
“말해봐.”
“네? 뭐를요?”
“너에 대해서. 왜 죽는지.”
“예. ...... 제 이름은 예하입니다. 이예하. BJ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습생입니다.”
모르는 회사네.
BJ는 백제의 약자인가.
바로 검색해봤다.
소속 아이돌 그룹이 있고, 연예인도 몇 있는데 A급은 없다.
여기 대표가 조승학이라면......
소속 연예인 이름과 백제를 같이 쳐보니 바로 답이 나온다.
백제그룹의 계열사 광고를 소속 연예인들이 찍었다.
그런 거였군.
재벌3세의 편안한 경영.
“계속 말해.”
“예. 에... 그러니까 제가... 연습생인데 회사에 빚이 있어요. 그래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데 오늘 조대표님이 절 끌고 왔다가 다쳤으니 ... 저 아마 죽겠죠?”
“사람 쉽게 못 죽인다. 죽는 게 나을 정도로 괴롭히긴 하겠지만.”
“히잉.”
“빚은 뭐야? 카드깡 같은 거야? 가방 샀어? 예쁜 옷?”
철없는 바보짓을 해 스스로 족쇄를 걸었다면 구해주기 힘들다.
구해줄 생각도 없다.
“엄마 병원비랑. 사고 났을 때 배상? 뭐 그런 거였어요.”
하지만 엄마가 끼어들면 달라지지.
“하. 젠장. 알았다. 자세히 말해봐.”
“네. 에... 그러니까 15살에 MG엔터 연습생이 됐어요. 그리고 16살에 트비스타 데뷔조에 들어갔어요.”
MG엔터는 국내 3대 기획사고, 트비스타는 현재 최고의 걸그룹이다.
거기 데뷔조라......
여자애 얼굴을 찬찬히 다시 보니 이해가 간다.
확실히 예쁘다.
지금까지 삶과, 과거 44세까지 삶을 합쳐도 얘만큼 예쁜 애는 없다.
이렇게 예쁘니 16살에 데뷔조에 들어갔겠지.
이렇게 예쁜 애가 울면서 돈 달라고 하니 무심코 돈을 줬고, 끌려가는 걸 보고 무심결에 나섰다.
“하아.”
“힝. 죄송해요.”
“너한테 한 거 아니야. 계속해봐.”
“네. 데뷔 직전에 종아리가 부러졌어요. 그래서 탈락. 몇 년간은 MG에서 걸그룹을 내지 않을 테니 옮겨야 했어요. 열일곱에 BJ엔터로 옮겼어요. 거기서도 걸그룹을 만들고 있었는데 바로 데뷔조에 들어갔어요.”
“데뷔했어?”
타다닥.
이예하를 쳐봤는데 안 나온다.
“열여덟에... 데뷔 직전에... 부모님 차가 사고 났어요. 아빠가 운전하는 중에 멧돼지를 치었고, 치인 멧돼지가 바퀴에 끼면서 차가 전복, 그 와중에 옆 차 세 대가 박살났어요.”
......
이쯤 되면 운명이 너 좃돼라, 이렇게 몰아가는 것 같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사람의 인생은 너무도 쉽게 무너진다.
조승학이 고작 용돈벌이 하려고 내 가족의 인생이 무너뜨린 것처럼.
- 작가의말
주인공이 힘을 못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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