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체능은 힘들대
매일 아침 잊지 말고 해야 할 일이 있다.
출금 신청.
코인거래소마다 일일 출금신청의 한도가 있기에 매일 잊지 말고 최대한으로 빼야 한다.
1억, 2억, 5천.
입금은 무한대로 받으면서 출금은 일일한도만큼만 출금해준다.
그마저도 문제가 있는지 가끔씩은 출금을 정지시키기도 한다.
내 돈을 내 마음대로 빼지도 못하다니.
30여개 사이트에서 빼내는 돈은 하루 평균 40억 가량.
3조원을 다 빼내려면 3년 가까이 걸린다.
앞으로도 코인거래로 자본이 더 늘어날 테니 평생 빼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한 번에 빼낼 방법이 따로 있지만, 당장은 필요한 만큼만 뺀다.
그러니까 이 돈은 당장 쓸 돈이 필요해서 빼내는 용돈 같은 거다.
하루 용돈 40억.
시발 하루 40억 용돈.
미쳤다. 시발.
“개시발 졸라부자다!”
쿵쿵쿵.
아 시발 조용히 좀 해.
ㄴr는... 7ㅏ 끔 이렇게 ㅁㅣ친다.
이건 어쩔 수 없다.
3조원을 벌어봐. 20억으로 3조원 만들어봐! 엔돌핀에 쩔어서 다 이렇게 미쳐.
스읍. 하.
스읍. 하.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가자.
흰티에 청바지 등 기본복장을 하고 원룸을 나섰다.
안방학동의 좁고 복잡하고 지저분한 마을.
원룸 앞에 편의점, 그 뒤에 언덕길이 있고, 그 뒤에 공사장가림막이 쳐져 있다.
가림막 너머엔 바위와 나무 등이 꾸며진 공원이 있다.
가림막에 적혀 있는 표어. 미래를 건설합니다 백제건설
백제건설에서 만드는 공원이며 아버지의 조경회사가 공원을 조성한 곳.
아버지의 20억 중 12억을 못 받게 된 현장.
‘잊지 말자. 백제건설. 만 배의 복수.’
매일 저 현장을 보며 다짐하고 다짐해야 한다.
그래서 원룸을 이곳으로 잡았고.
따랑.
옆집 문이 열리고 사람이 나온다.
금발태닝백수.
옆집 놈은 무심코 나오다가 내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랬다.
“아놔 시발 또라이 새끼. 아침부터 재수 없게. 카악. 퉷.”
걸쭉하게 가래를 뱉은 금발태닝백수가 떠나갔다.
찰칵.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줬다.
얼마 안 남았다.
금발태닝백수의 뒷모습을 잠깐 보다가 큰길로 나갔는데 누가 인사했다.
“어? 안녕하세요.”
어제 그 여자애다.
복장도 어제 그대로다.
가난하구나.
“어.”
“헤헤. 오늘 좋은 날인가봐요. 아. 연습실 가기 싫었는데 기분 좋아졌어.”
연습실이라...
아이돌 준비 중인가.
하긴 이렇게 예쁘면 연습생이겠지.
어제 흥얼거리던 노래와 춤을 생각하면 재능도 있을 것 같고.
그런데 미래에 얘에 대한 기억은 없는데.
이렇게 예쁜 애가 데뷔에 실패했나?
음.
그런 생각을 하며 예쁜 애를 무시하고 지나쳐 택시를 잡아탔다.
내 재산은 극히 일부에게만 공개한다.
채인수를 통해 일을 하고, 나는 평범한 신입사원으로 위장할 생각이다.
하지만 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
경호팀.
길가다가 미친놈이 그냥 칼로 푹 찌르면 어떡해.
돈이 아무리 많아도 죽으면 끝이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경호원을 고용할 생각인데 평범한 신입사원이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러니 24시간 날 보호해줄 근접경호원에게는 내 재력을 어느 정도 오픈해야 한다.
“어서오세요.”
그래서 직접 왔다.
마포의 경호회사 사무실에 들어가니 여직원이 친절히 맞이한다.
“예. 안녕하세요. 회사에서 알아보라 해서 왔는데 사장님 계신가요?”
“예. 계세요. 들어가 보세요.”
회사라기 보단 용역사무실처럼 여기저기 옷이 쌓여 있고 작고 지저분한 사무실이 열악한 재정상황을 말해준다.
사장실도 칸막이만 쳐져있지 별반 깨끗하지 않다.
앉아있던 사장이 일어섰다.
“아이고 어서오세요.”
키 180정도에 역삼각형 거대한 근육갑옷을 두르고 있다.
어깨가 너무 넓어서 직사각형 얼굴이 작아 보일 정도다.
“안녕하세요. 윤동욱이라고 합니다.”
미리 준비한 명함을 건네줬다.
미래그룹 기획실 사원 윤동욱
“예. 반갑습니다. 구형재라고 합니다.”
명함을 받고, 사장실 앞 소파에 마주앉았다.
“경호의뢰를 하러 왔는데요. 우선 그룹 경호원 50명과 보안시스템 설치 및 관리를 해 주시고, 그 외 개인 경호로 20명 정도를...”
바로 본론부터 꺼냈는데 받아 적던 구형재의 입이 딱 벌어진다.
“사장님?”
침 흘리시는 것 같은데요.
“예. 아이고 이건... 이건 너무 규모가 큰데요?”
“이 회사의 평가가 가장 좋더라고요. 그래서 맡기고 싶습니다.”
“어... 그래도......”
“직원분들, 또는 퇴사한 분들의 평가가 좋았어요. 믿을 수 있는 사장. 어떻게든 지켜주려 한 사장. 고객들의 만족도도 좋고요. 그래서 맡기려 합니다. 비용은 시세보다 20% 더 올려 드릴게요. 그러니 잘 맡아주세요.”
경호원 100명 고용해봤자 연 40억이면 되나.
돈 좀 더 써서 제대로 경호받는 게 낫다.
“음. 아이고 안 되겠습니다.”
“네?”
“후우. 너무 큰 의뢰라 지금 정신이 없긴 한데... 그래서 더 확실히 말해야겠습니다. 이 의뢰 받을 수 없습니다.”
“왜죠?”
“하아. 내가 미친 거 같네. 그... 동욱씨. 예체능이 취업하기 힘든 거 아시죠?”
“네.”
“매년 무술 계 졸업생이 쏟아지는데 사범이나, 헬스 트레이너 일부를 빼면 정작 일자리는 없어요. 다들 경호업계로 몰려오니 임금 후려치기가 가장 심한 게 경호업체입니다. 청와대 경호실처럼 제대로 된 자리 몇 개 빼면 최저임금도 못 받습니다. 우리 애들 전국체전 우승자가 월급 180 받습니다. 2교대 12시간 일해서 고작 180 받죠.”
“그런데요? 그래서 돈 더 드리겠다고 했는데......”
“그 돈 어차피 회사로 갑니다. 회사 사주가 전부 먹을 뿐 우리 애들 성과급 같은 건 절대 주지 않을 겁니다.”
“사장님은... 앞에 계시지 않아요?”
“서브프라임 때 빚을 많이 졌습니다. 회사가 넘어갔죠. 전 300만원 월급 받는 사장일 뿐입니다. 미래그룹이 좋은 조건에 계약을 해 줘도 모든 돈은 사주가 벌 뿐, 동생들은 똑같이 180만원 받으며 갈릴 겁니다. 게다가 요구 인원도 너무 많습니다. 저희 회사 인원으로 부족하니 임시계약직을 헐값에 불러다 써야 하는데 그러면 손발이 안 맞아 실수가 생길 수밖에 없죠. 제대로 해달라며 돈을 더 주신다 했는데 제대로 못 할 테니 죄송해서 안 되겠습니다.”
“사주가 돈 버는 꼴이 싫다는 건가요?”
“예? 아이고. 하하하. 그렇군요. 그래요. 그래서 내가 그런 말을 했네요.”
“그렇게 싫으면 그만두면 되지 않나요?”
“이 바닥이 생각보다 훠얼씬 좁습니다. 사주는 돈이 많고, 경호협회 회장이며 각 무술 협회 등에 힘이 강합니다. 저야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동생들은 어디도 갈 수 없을 겁니다.”
“복잡하네요.”
“제가 그나마 사장자리에 있으니 경호의뢰가 들어오고 그나마 동생들이 먹고 살 수 있죠. 저마저 그만두면 쥐꼬리만 한 월급이라도 받던 동생들 다 잘리고 계약직으로 바뀔 겁니다.”
의리남 구형재.
사실 실제로 본 건 처음이다.
그저 회귀 전 미래에 사람극장에서 봤을 뿐이다.
믿을 수 있고, 정이 많고, 의리가 있는 로맨티스트.
그래서 검색해서 찾아왔는데 이런 상황인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사람을 계약직으로 많이 뽑아야 해서 경호 퀄리티가 안 나와서 미안하다, 돈을 많이 줘도 실제 일선에서 받는 건 똑같으니 더 열심히 하게 만들 수 없다, 그래서 미안하다, 돈 많이 줘봤자 사주만 배불린다, 그래서 싫다. 이거네요.”
“...... 좀 축약된 거 같지만 맞습니다.”
“그럼 그만두고 따로 차리시죠. 사장님이 사장하고 미래 그룹에서 주는 돈을 제대로 분배한다면 제대로 경호하겠네요.”
“저... 그게... 저희 회사가 나름 명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콘서트 때나 외국 국빈 방문 등에 요인 경호의뢰가 많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회사를 나가면 그 명성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제가 따르는 동생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습니다.”
“... 미래에서 200명 고용하면요? 지금 받는 돈이 연 2000정도 랬죠. 다들 연봉 4000에 200명 고용하면? 5년 고용 보장.”
그래봐야 연 80억인가.
“음. 동생들이 좀 많아서......”
“300명 고용하면요? 400명?”
어차피 그룹은 확장할 테니 잔뜩 뽑아도 상관없다.
“저. 그러면 돈이......”
“돈은 상관없고요. 400명 고정고용하죠. 동생이 400명인가요?”
“아뇨. 아이고. 그게 아니라. 250명 정도인데......”
“그럼 됐네요. 회사 때려치우시고 미래그룹 자회사로 넣죠. 미래 경호. 250명으로 설립해서 전원 미래그룹 경호하는 걸로. 사장님이 인맥으로 일거리 가져오시면 사람 더 늘려도 되고요.”
“허... 음... 거참...”
왜 망설이는 거지?
이보다 좋은 조건이 있을 수 있을까.
구형재는 내가 준 명함을 보며 고심하고 있었다.
미래그룹 사원 윤동욱
명함이 문제였구나.
“제 정체는 사장님만 아시는 겁니다. 제 경호원분들도 몰라야 합니다.”
“네?”
구형재가 이해할 수 없는 경고를 하며 채인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채변호사님.”
-예. 고객님 잠시만요. 예. 예. 어. 동생.
백제그룹 사무실에 있었는지 조심히 받다가 말을 바꾼다.
“나올 수 있으면 계약서 하나만 작성해 주세요.”
-바로는 안 되고 한 시간쯤 후. 무슨 일인데.
“경호업체 계약이요. 250명 고용해서 자회사 설립하려고요.”
-그래. 필요한 일이지. 그런데 250은 많아 보이는데... 음 알겠어. 1시간 안에 갈게.
변호사와 통화하고 나자 구형재가 자회사 설립을 믿는 눈치였다.
이런저런 조율을 하고 업계 사정을 듣는 사이 채인수가 왔고, 계약서가 작성되었다.
미래 경호.
1호 자회사가 설립되었다.
“이리 되었으니 그냥은 나오지 마시죠. 못 받은 돈 다 받아내시죠.”
채인수가 제안했다.
기존 업체를 그만두려면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차라리 소송 걸어 돈 받고 나오는 게 낫다.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게 받은 임금.
야간 14시간씩 일하고 야식비조차 못 받은 일.
휴일 없이 15일 경호일을 하고 추가비용 못 받은 일.
노동법에 걸리는 모든 것을 신고한다.
사주님아, 그동안 꿀 빤 거 다 토해내세요.
“한 달이면 정리되겠네요.”
“그래. 고맙다. 고마워.”
구형재의 경호원에겐 최소 고용계약 5년을 보장했다.
계획대로라면 평생 경호원이 필요하고 사람 수는 더 필요하겠지만.
함부로 퍼주면 오히려 일을 안 할 수 있다.
평생 연 10% 임금 상승을 보장하면 현기노조처럼 될 수도 있다.
경호원들이 내 팔을 꺾고, 임원자리 달라고 하거나 자식 취업 보장을 요구하면 어떡해.
5년 계약 보장만으로도 구형재는 감동한 듯 전 사주를 신고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고마워. 경호는 최선을 다할게.”
어깨 넓은 구형재가 거대한 손을 뻗어 악수를 하는데 무시무시한 얼굴에 뜨거운 눈물이...
끔찍해서 자리를 떴다.
무서워.
택시를 타고 방학동 집에 와 편의점부터 들렀다.
삼각 김밥과 도시락을 쓸어 담고 집으로 간다.
며칠간 나올 수 없다.
편의점을 나오자 여자들과 눈이 마주쳤다.
평범한 대학생 복장의 여자 셋.
작은 체구의 남자 둘.
다섯명이 내 비밀 경호원이다.
모르는 사이인척 적당히 떨어져서 따라다니다가 위험할 때만 도와주는 경호원.
전부 어깨 넓은 떡대로 하면 좀 더 안심되겠지만, 그러면 너무 눈에 띈다.
지금 난 평범하니까 돌발 상황만 막아주면 되겠지.
“놔요! 노라고요!”
집 앞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엉망으로 취한 금발태닝백수가 그제 돈을 준 여자애의 손을 잡아당기고 있다.
“이런 썅년이! 아휴. 닥치고 따라오라고!”
막무가내로 여자애를 잡아 자기 집으로 끌고 간다.
머릿속에 다양한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무시하고 지나가는게 베스트.
기다렸다가 조용해진 후 가는 것도 베스트.
경찰에 신고하는 건 세컨드.
그때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예쁜 눈에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다.
“... 도와주세요.”
하. 진짜.
나는 열린 문을 잡고 필사적으로 버티는 여자애를 살짝 밀어 틈을 만들었다.
“야.”
“어? 옆집 또라이새끼?”
“시발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
빠각.
로우킥이 영 좋지 못한 곳에 꽂혔다.
“흐코고곡.”
- 작가의말
글이 진행되고 나면 개연성 문제가 풀릴.. 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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