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무계획
집에 와서 씻고, 소파에 누워 휴대폰으로 아무거나 검색하고 있는데 예하가 요가복을 입고 요가매트를 거실에 가져와 깔고 운동을 했다.
자꾸 돌아가는 시선을 핸드폰에 고정할 때 예하가 말했다.
“오빤 내가 어떤 존재였으면 해?”
“행복한 존재.”
“...... 치. 그게 뭐야?”
“남의 인생이잖아. 구체적으로 내가 지시하길 바래?”
“어.”
“불가능해. 내가 뭘 안다고.”
“...... 나 인터넷 방송 할까?”
“하라고 시킨 게 아니었어. 낮에 만난 무슨 피디놈 따위 좆도 아니니 겁먹지 말라고 한 말이었어.”
“후우. 모르겠어.”
“왜? 하고 싶거든 그냥 하면 되는데. 넌 뭘 해도 성공할 거야.”
“난...... 지금까지 내 계획대로 된 게 아무것도 없어.”
고개를 돌려 예하 쪽을 봤다.
요가매트를 깔고 운동하던 예하는 엎드린 채 두 손을 포개 턱을 괴고 있었다.
요가복을 입은 몸매가 참으로 완벽하다.
예하는 담담한 표정으로 창밖 한강을 보며 말했다.
“난...... 다 갖고 태어났어. 얼굴은 상위 영점영영영영영영일프로. 몸매는 상위 일퍼정도.”
“...... 갑자기 잘난 척?”
“나도 내가 예쁜 거 알아. 어려서부터 귀에 박히게 예쁘다 예쁘다 소리 들었으니 모를 수가 없지. 중학교 땐 전교 남학생이 다 날 좋아했고, 얼굴 빨개진 남자한테 고백 들은 것만 백번 넘는 것 같고.”
이런 불치병 걸린 중딩 놈들. 감히 예하한테 들이대다니.
“게다가 재능도 있어. 노래도 배우는 대로 쭉쭉 올라가고 춤도 한 번 보면 똑같이 따라해. 연기도 금방 늘고, 대사 외우는 거 생각하면 머리도 좋아. 학교성적도 좋았었어. 국내 3대 엔터에 들어가자마자 날고기는 연습생 속에서 춤이며 노래며 모든 평가에서 다 만점 받았어. 그래. 다 갖고 태어났지.”
예하가 자기자랑을 하니 안 어울린다.
저런 애가 아닌데.
“그래서 벌 받았나봐. 건방졌겠지. 남들은 열둘 열 셋부터 연습생 생활 수년씩 했는데 열다섯에 시작해서 열여섯에 트비스타 데뷔라니. 그래서 재수가 없었나봐. 트비스타 데뷔 직전엔 누가 계단에서 발로 차 정강이를 또각.”
“어? 누가 찼다고? 누가?”
“몰라. 공중에 붕 떴는데 돌아볼 겨를이 있었겠어? 하늘을 날아 계단 모서리에 뽀각했지. 범인은... 그냥 누군가겠지. 열여섯 살 어린년이 연습생 기간도 길지 않으면서 전부 만점 받아 거만하게 데뷔조 들어갔으니 모두가 싫어했겠지.”
예하에겐.
내가 아직 몰랐던 어둠이 추가로 남아있었다.
내가 알지 못한 슬픔은 또 있겠지.
“열여섯에 데뷔. 열일곱에 국내 탑. 열여덟에 드라마 한 편 찍고, 열아홉에 영화찍자. 스무 살 전에 레전드가 되어 해외로 나가자. 이게 내 인생 계획이었어. 거만하지?”
“넌 그럴 수 있어.”
“알아. 예쁜데다가 재주도 많으니. 그래서 거만했지. 고작 발길질 한 번에 모든 게 무너지는 게 인생이란 것도 모르고.”
“그건 네 잘못 아니야.”
“그것도 알아. 다른 못된 인간이 발로 찼고, 그 년은 잘 살고 있겠지. 죄책감도 없겠지. 아무튼 그때부터 침몰했고, 그 어느 것도 계획대로 된 건 없어.”
“......”
“그리고 옮긴 게 하필 BJ엔터라니 참. 처음엔 멋모르고 지냈는데 지내다 보니 흉흉한 소문이 있어서 몸조심하고 있었어.”
“흉흉한 소문?”
“약점 잡히면 노예 된다. 예쁘지도 않은데 약점 잡히면 술집 나가야 한다. 그런 소문. 이제 와서 보면 사실이었고. 어쨌든 음료수 조심해서 먹고, 화장실에서도 카메라 있나 한번 확인하고 뭐 그렇게 지냈어. 약점 잡히지 않은 언니들도 많았고, 겉으로 보기엔 정상적이었거든. 그랬는데 부모님 사고 쾅.”
예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왜 갑자기 이 얘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들어줘야 할 분위기다.
“멧돼지. 웃기지 않아? 나 그 끔찍한 블랙박스를 봤거든. 꿈에도 한 천 번 나왔어. 아빠 차 앞에 멧돼지가 불쑥 튀어나오고 어깨로 차와 부딪친 후 튕겨나갔어. 쓰러진 멧돼지를 아빠 차가 밟았고, 바퀴가 들리면서 전복, 그러면서 옆차와 충돌. 쾅. 쾅쾅. 어이없지? 웃기지 않아? 멧돼지라니. 2년이 넘었는데 엄마는 아직도 못 일어나. ...... 난 이게 인생인가 싶어.”
“......”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 어떤 동정도 위로도 할 수 없다.
저 깊은 허무함을 말 따위가 메울 수 있을까.
“잘은... 모르겠는데.”
말해도 될지 모르겠다.
“위로하려고 하는 건 아닌데... 나쁜 건 나쁜 사람들이야. 발로 찬 사람이 나쁘고, 조승학이 나쁘고, 멧돼지는... 어 멧돼지도 나빠.”
“풉. 아니. 내가 불운한 거야. 그냥 태어날 때 운을 너무 많이 받아서 불운만 남은 거야.”
“그런 식이면 조승학은 너보다 천배 더 큰 운을 받았지. 예쁘고 재주 많은 것보다 재벌가 아들이 더 운 좋잖아.”
“어... 그러네. 그래서 지금 벌 받고 있잖아.”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운이라는 요소를 아예 빼놓고 생각했으면 해. 조승학은 불운해서 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니라 나한테 복수 당하고 있는 거야. 네 불운은 하늘이 내린 게 아니라 나쁜 놈이 너한테 끼얹은 거야. 네가 하늘의 불운으로 치고 넘어가는 게 편하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네가 꺾이는 게 싫어.
나쁜 놈이 널 괴롭힌 건데 넌 꺾여버렸잖아. 꺾이지 말고 복수해. 나쁜 놈이 날 괴롭혔으니 나도 나쁜 놈에게 복수하겠다, 이렇게 마음먹는 게 낫지 않아? 네가 포기하면 넌 불운을 받고 이후로도 많은 걸 포기하며 살아가게 될 텐데, 널 괴롭힌 나쁜 놈은 아무 죄책감 없이 두 다리 쭉 펴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되겠지. 이건... 좀 이상하잖아. 공평하지 않아.”
“맞아맞아. 공평하지 않아.”
“조승학은 단순히 네 몸을 원했겠지. 오직 그걸 위해 네 인생을 죽여 버리는 데 아무 죄책감이 없었을 테고. 그 복수는 내가 할게. 당장 네가 복수할 힘이 없으니까. 그래도 트비스타 밀어버린 년은 네가 복수해.”
“누군지도 모르는데?”
“돈은 무엇이든 가능하게 만들어줘.”
“어? 어. 그래.”
“널 보면... 너 자신을 너무 하찮게 대우해. 난 널 존중했고 자유롭게 행동하라 했는데 넌 스스로를 구겨진 폐지취급하며 눈치만 봐. 날 생명을 구해준 주인님 취급하며 자신을 노예로 몰아. 그런 거 싫어. 비서일도 하지 마. 하고 싶은 걸 해. 타인의 악의에 네가 무너진 게 보여서 싫어. 네 스스로 재능이 많다는 걸 안다면 스스로 힘을 모아 복수했으면 해.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네 안에 힘을 채워 넣어.”
건방지다.
회귀한 주제에.
회귀전의 나 또한 저랬으면서.
그래도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예하는 자신이 재주 많은 걸 알면서도 너무 숙이고 있다.
“어... 그래...”
요가매트에 엎드린 예하가 두 팔에 얼굴을 묻었다.
“계획을... 내 미래를... 생각하기 두려워.”
“계획대로 안 되니까?”
“어. 인생이란 어떤 것도 계획대로 되지 않아. 내가 노력한다 해도 남의 악의에 스치면 무너지는 게 인생이고.”
별 생각 없는 학교폭력에 무너지는 건 한 아이의 인생인 것처럼.
“그렇지.”
나도 그랬으니.
내 바보짓의 비중도 컸지만, 이번엔 실수하지 않았고, 조승학의 악의만 남았으니.
“오빠는 내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지?”
“어.”
“구해줬으니 행복하게 살면 보람을 느낄 거 같고?”
“어. 맞아. 그렇게 살아라.”
“나도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의견 일치. 오케.”
“그럼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산다. 계획 없이.”
“어. 그러래도.”
예하가 벌떡 일어섰다.
언제나 느끼지만 요가복은 너무 야하다.
전신이 알몸인 것과 뭐가 달라.
피부를 0.1mm 덮고 있을 뿐이잖아.
오히려 조일 곳 조여 주는 보정효과 덕에 몸매가 더 아름다워진다.
알몸과도 같은 예하는 굳게 다짐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두근. 두근.
엎드려서 고개만 돌리고 있는 내 얼굴로 다가와 고개를 옆으로 꺾어 각도를 똑같이 맞춘 후.
빠르게 다가와 코를 부딪쳤다.
“아흑.”
‘풉.’
웃을 뻔했다.
긴장이 날아갔다. 귀여워서.
필사적으로 참았다.
아직 굳은 다짐이 남아있는지 재도전. 코가 닿지 않고, 입술이 닿았다.
두근.
두근.
참 신기한 작용이다.
입술만 닿았을 뿐인데 기분이 좋다니.
입술 때문이 아니라 전해진 진심 때문이겠지.
눈감고 입술을 마주 댄 예하는 그대로 한참 있다가 어버버 일어났다.
“오빠... 나...”
받아들여도 될까?
그래도 될까?
내가?
미래에서 왔을 뿐인 평범한 내가 저런 완벽한 애를?
“네... 가 음.”
지금 날 좋아한다고 그래도 그건... 지금뿐일 아 시발 노랫말 드립이 떠올라 시발. 머릿속이 멍해졌다.
멍청이가 됐어.
“예하야...... 내가 구해줘서 고맙지?”
“어. 고마워. 오빠가 아니면 난 지금.. 지금쯤. 흑. 고마워 진짜. 천번 만번 더 말할 수 있어. 너무 고마워.”
“그래서 안 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은혜 갚고 싶은 거야. 넌. 아 말이 이상하다. 나 따위한테 오기에 네가 너무 아까워. 네가 고마워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오빤 나 싫어?”
예하가 획 쳐다보며 말을 잘랐다.
빨개진 얼굴로 쏘아보는데 그 모습조차 너무 매력적이다.
“좋아하......”
“왜? 예뻐서?”
“처음엔 그랬지. 정신을 놓을 정도로 예뻤지. 그런데 보다 보니까 성격도 행동도 마음씨도 다 좋지.”
“어쨌든 예뻐서 좋은 거잖아.”
“어......”
“사랑에 이유가 없다? 천만에. 끌리게 된 데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잖아. 오빠 처음 봤을 땐 이상한 사람이었고, 바보 같았는데 날 구해줘서 고마웠고, 돈 잘 버는 게 멋있었고, 루비언니 구해줄때 위대했고, 지혜 아버지 미래까지 챙겨줄 땐 너무 감동적이었고 그게 다 합쳐져서 좋아진 거야. 그래서 오빠한테 사랑받고 싶은 거고. 그런 게 다 합쳐져서 좋아진 거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거라고. 그런데 뭐? 내가 아까워? 그걸 왜 오빠가 정해? 내가 좋은 건데. 내가. 내가.”
“......”
“나 행복한 거 보고 싶다며.”
“......”
재산 분할?
모르겠다.
다 줘도 된다.
그래 받아주자.
모든 걸 다 줘도 아깝지 않다.
“아 몰라. 너무해. 진짜.”
손을 뻗는데 예하가 몸을 홱 돌린다.
전신타이즈인 요가복 상태로 트레이닝복 상의만 집더니 현관으로 갔다.
“어? 어디가?”
“몰라. 술 마실 거야.”
쾅.
“......”
받아주려 했는데.
아니지 말이 건방지다.
내가 말했어야 했다.
일부러 요가복 입고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등 계속 신호를 줬는데.
모르겠다.
“...... 그 차림으로 나간거야? 경호팀도 안 부르고?”
벌떡 일어나 나가니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고 있다.
내려가던 엘리베이터는 21층에 멈춰 섰다.
루비와 여자들이 임시로 머무는 층.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하아.”
엘리베이터를 보다가 계단 쪽에 설치된 작은 카메라를 봤다.
경호팀에서 보고 있겠지.
엘리베이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집으로 왔다.
사고 나진 않겠지.
컴퓨터 앞에 앉아 코인 커뮤니티를 둘러봤다.
여긴 언제나 그렇듯 각자의 욕망이 담긴 악의가 농담과 드립으로 포장되어 퍼져있다.
고향에 온 기분.
“하아.”
쳐들어갈까?
21층에 가서 예하를 안고 사랑한다고 말할까?
코인에 집중하자. 코인...
1200만원에서 살살 올라오고 있는데. 내일? 모레? 하아.
오토 프로그램이나 점검할까?
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띵동.
벨이 울린다.
시간을 보니 한 시간쯤 지나있다.
문을 여니 얼굴이 발개진 루비가 있다.
“예하는?”
“너무한다. 인사가 먼저잖아.”
“하이. 예하는?”
“쳇. 술 먹고 뻗었어. 세상에 병나발 부는 여자 처음 봤어.”
하아. 고 녀석을 어찌할까.
예하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루비가 밀고 들어왔다.
“어?”
훅 들어와 입을 맞춘다.
알콜향이 확 들어온다.
선채로 가만히 있으니 목을 안으며 발돋움을 해 혀를 열심히 밀고 들어온다.
얌전히 받아줬다.
내내 눈을 보며 입을 맞춘 루비가 천천히 물러섰다.
“아... 오늘은...”
하면 안 될 것 같은 날이야.
“나. 마지막으로. 안아주면 안 돼? 오빠?”
“마지막으로?”
루비가 현관문을 닫으며 말했다.
“예하가 다짜고짜 와서 술 마시자고 해. 나랑 언니 몇이랑 술을 마시는데 깡소주를 마시더니 울고불고 하소연 하더라고. 둘이 했던 얘기 다 하고.”
“어.”
“사귈 거지?”
“...... 귀신인가?”
“예하 예쁘잖아. 오빠도 좋아하잖아.”
“어. 좋아해.”
“사귀세요. 오빠가 말한 변명들. 뭔가 오빠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방어기제가 있어서 그런 거 같은데. 그래도 마음이 먼저지. 다들 그렇잖아.”
......
처연한 눈으로 그런 말을 하면 반칙이야.
“둘이 사귀면 다신 접근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눈 똑바로 보면서 그러지 마.
“하아.”
루비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데려왔다.
그랬더니 루비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아. 어쩌란 말이냐.
- 작가의말
등신아 그냥 사겨 하 답답하네
다음화는 성인편에 올립니다만...
하나도 안 야하고 행위도 없어요
푸우형들 꼬무룩해질테니 바지 입어요
다음화 건너뛰고 줄거리만 봐도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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