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525화-
그들은 트레이야를 찾아가 지령검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이전에도 이야기 했었던 일이었기에 트레이야는 선뜻 나서서 지령검을 내어주었다. 지령검을 받고자 온 것이었지만, 자신이 준 검을 너무 선뜻 내어주자 벤하르트는 야간 미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을 안내하는 역할은 그리츠가 맡았다. 그리츠도 전날 있었던 이야기를 이미 들어두었기 때문에 그들을 대하기가 썩 껄끄러웠다.
"안내는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아 네."
껄끄러운 것은 벤하르트쪽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엉거주춤하게 서로를 대면했다. 그리츠는 신중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마누어가 행한 행동에 대해서는 지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마누어가 행했던 일에 대해서 공감을 할수도 있었다.
혹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있다면 모를까, 사실상 벤하르트나 레니아를 노리지 않는다면 그들에게는 기회가 없었다. 기회를 놓친다면 무엇하나 하지도 못하고 멸망 하기를 기다리는 일 밖에는 할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리츠도 잘 알고 있었다.
벤하르트나 레니아 이 둘만이라고 해도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제압하기 어렵다 할수 있었다. 라스펠을 대표하는 12장군들은 자신과 마누어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공석이었고, 그정도의 전력으로는 이길수 없다 할수는 없어도 확신하기는 어려운 수준인 것이다.
거기에 트레이야와 제네스가 합류하게 되면 사실상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해 지령을 빼앗는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마누어는 그렇기 때문에 조급하게 연회가 끝난 이후 '방심의 틈'을 노리려는 생각이었던 것이었지만, 레니아는 진작부터 마누어를 의심하고 있어서 도리어 수포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리츠는 마누어를 이해할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누어를 동조할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실패 했기 때문이었다. 하고자 하는 것 자체는 좋았지만,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 버리게 되면 하느니 못한 꼴로 전락해 버리는 셈이 되어 버린다.
'지금 이 기회마저도 얻지 못할뻔 했었겠지.'
그는 벤하르트를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당했던 상황은 그저 웃으면서 배신 당할뻔 했네. 하고 넘길 수 있는게 아니었다. 스스로의 몸을 버려 가면서 라스펠을 끌어 올라와서는 전력을 다해 라스펠을 구해주었다. 쉬운일이었다면 모를까, 하나 하나가 목숨을 바쳐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그는 행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알수 있었다. 자신의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남자는 '정보' 때문에 그렇게 움직인게 아니라는 것을.. 라스펠에 처음 오고자 했을 동기를 정보가 만들어 줄 지언정 '정보'가 라스펠을 구하기 위한 매개체가 된 것이 아니었다.
정보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그런 일도 있을수는 있겠지만, 그는 벤하르트를 눈앞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사람이라는 것은 언제나 확신은 할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본 벤하르트는 이해타산만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배신을 눈앞에서 보고서도 자신들을 도와주겠다고 하는 이 행동을 미루어 그리츠는 벤하르트의 사람을 어느정도 알수 있었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저런걸 이해할수 없지만,'
그리츠는 그들을 데리고 라스펠의 한 신전 안으로 들어왔다.
"거기 두 사람은 이미 라스펠의 정보의 보고를 한번 보았었지?"
"네."
"지금 가려는 곳은 그곳과 연결된 곳이니 낯이 익을거야. 다만 이전 침입자들이 있고 나서 부터는 공간을 비틀어 버려 잘못 길을 잃는다면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니 조심하는게 좋을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군."
"그렇지."
그리츠는 씁쓸하게 말하며 신전의 안으로 발을 놀렸다. 그가 손을 흔들자 아무것도 없었던 벽에는 하나의 문이 생겨났다.
"아래를 향하고 있네."
"그야.. 령을 이용해서 라스펠을 공중에 보존 시키기 위해서는 라스펠 전역에 미치는 영향이 필요했으니까, 라스펠의 중심에 놓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지. 지금부터는 잘 따라와야 한다. 내가 걷는 길은 절대로 놓치지 마라."
어지간히 불안했는지 그리츠는 마법을 사용해 자신의 발자국마저 남겼다.
'무슨 일이 생기길래.'
"벤 조심해. 괜히 호기심 갖지 말고."
"알고 있어."
레니아는 흥미롭다는 듯이 주변을 두르며 아래로 내려갔다. 어느 순간에 주변의 시야는 확 달라져 버렸다.
"우왓."
바닥은 물론이거니와 천장과 벽까지 전부 수정으로 뒤덮인 공간은 전후좌우를 전혀 분간할수 없었다.
"이쪽이다."
그리츠를 따라 얼마간 더 걸어가 그들은 라스펠의 중심지에 도착했다. 거대한 방 하나 정도의 크기에 수없이 많은 유리같은 수정 조각들에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사람의 머리크기만한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을 중심으로 샤모나와 국왕 마누어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샤모나는 눈을 감아 여왕을 불러내었다.
"왔구나."
그들은 구멍 앞에 섰다.
"여기에 풍령이 놓여 있었다."
레니아는 그 구멍에 잠시 손을 가져가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녀는 손끝을 쓰다듬는듯한 기운이 손가락을 자극하는 것을 느꼈다. 벤하르트는 검을 가져와 말했다.
"혹시 검으로 이 구멍을 찔러도 상관 없겠습니까?"
"풍령일때에는 이 구멍에 담아 두었다만, 검도 올려두면 될 것이다."
벤하르트는 살짝 웃고 말했다.
"검은 결국은 사용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그 존재를 증명할수가 없지요. 령이라는게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 힘으로써 스스로를 증명하고 발할수 있다고 한다면, 검은 사용되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힘이 되지 않습니다. 검은 베기 위해서 잘라내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이곳에 지령검을 박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가능하다면 말입니다만,"
"아무래도 상관은 없다."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외향만 본다면 저것은 그저 단순한 검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자고왕이 넌지시 물었다.
"글세. 섵부른 대답을 한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우리는 그저 저들을 믿고 기다려 볼 뿐이다. "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벤하르트는 한번 심호흡을 해 오랜만에 지령검을 쥐었다. 묵직하고 부드럽게 느껴지는 한켠의 소도를 그는 구멍에 내리 박았다. 굉음과 동시에 주변이 흔들렸다.
"여왕님!"
"당황하지 마라."
누구나 볼수 있을 정도의 샛노란 기운이 주변을 가득하게 메우기 시작했다.
'안정되어 간다.'
여왕은 눈을 감고 라스펠과 동질화 되었다. 느껴지지 않을만큼 극히 미세해서 그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도 그 이변을 알아 차리지 못했지만, 오직 여왕만은 라스펠에 벌어진 일을 알수 있었다. 라스펠은 공중에서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저 작은 검이 령에 비할수 있을정도로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벤하르트의 말처럼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그 이야기에 동참했던 것이었다. 물론 기대를 안할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만에 하나라는 확률과는 먼 바램이었을뿐 진심으로 벤하르트를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령석으로 만들었다고 했었나.'
령석이라고 한다면 령의 파편.. 100개는 모아야 이 대륙을 지탱할수 있을 터였다. 벤하르트가 사용한 영석이 얼마나 큰지는 몰라도 기준치에는 한참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당연했다.
"어떻게 됐어?"
"성공한 것 같다."
"그렇지?"
레니아는 무덤덤하게 그 결과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수긍했다.
"벤하르트의 검은 무엇인 것이냐. 령석을 사용했다고 하지만 저런 능력을.."
"이런 것 알아? 어떤 일도 못하는 사람이 있어. 무슨 일을 시키기만 하면 엉망으로 만들어 놓지. 하지만 그에게는 작은 한 분야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실력자야. 아마 세계에서 최고 유일 무이한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그 일을 맡길때 어떤 기분이 들까?"
"그야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상대는 다른 일은 무엇하나 못하는 사람이잖아.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일 하나만큼은 안심하게 돼. 물론 벤은 그런 못난이는 아니지만, 비교하자면 내 신뢰는 그런 부류라고 할수 있어. 나는 벤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아. 벤은 강하긴 해도 잘못된 선택을 할수도 있고, 세상에는 저녀석보다 강한 녀석도 많이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변수는 많으니까 벤에 대한 실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는 보통은 하지 않아. 하지만 한가지 만큼은 '절대적으로' 신뢰할수 있어. 도공술에 관련 해서 만큼은 신뢰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나는 전면적으로 저녀석을 믿어."
"대단하군. 너희들의 신뢰라는 건."
"여왕님 정말로 일이 처리 된 겁니까?"
그리츠와 마누어 자고왕은 놀람과 기대를 잔뜩 섞은 얼굴로 물었다. 여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풍령을 사용할때처럼은 아니지만, 이 검은 라스펠을 확실히 아래쪽으로 인도하고 있다. 앞으로는 조절만 하면 되는 일이겠지."
"정말로.."
마누어는 울컥 눈물을 쏟으며 수정에 머리를 박고 말했다.
"미안했다. 고 고.. 고마워! 으으.."
말은 단순했고, 제대로 전해지지도 못할만큼 투박스러웠다. 하지만 그들은 말 이상으로 마누어의 심정을 알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고집스러운 얼굴은 엉망진창으로 헝크러져 있었고 이마에서는 피가 줄줄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목소리는 깨졌고, 눈물은 쉴새 없이 양쪽에서 쏟아졌다.
지난 십수년간의 노력과 고생이 결실이라도 맺은것처럼 그는 엉망진창이 되어 울었다.
"저녀석은 말야. 단순한 바보였는지도 모르겠어. 우리들은 그 바보에게 걸린 셈이었고,"
"그래."
배신에 대해서는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지만, 벤하르트는 마누어의 그 배신이 정말로 순수한 것이었다는 것 정도는 알수 있었다.
"저녀석은 라스펠 바보야. 행복하겠네 여왕. 네 나라를 저토록이나 위하는 수하가 있는 것이니까,"
여왕은 아무 말 없이 레니아의 말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작가의말
뭔가 정리가 잘 안되는 느낌이네요.
참고로 전 마누어가 싫습니다. 싫지만 저런 사람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적어 봤습니다. 깔끔하게 정리해버리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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