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2부 81화-시공(時空)(10)(639화)
"도와주는 걸 마다할 이유는 없겠죠. 그런데 어떻게 도와주실 건지?"
"일단 케이슨과 대련하는 걸 보여 줬으면 하네."
카실러스가 지명하는 것을 듣고 케이슨이 답했다.
"엉? 왜 나를?"
"그야 에르니아뿐 아니라, 자네도 교정할 게 있다면 교정하는 게 이득일 테니까."
"가르칠 자격은 되고 그런 소릴 하시는 건가?"
케이슨의 빈정거리는 말을 듣고도 카실러스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다.
"그야 보면 알게 될테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대련하지 않아도 좋아. 내가 직접 하도록 해도 되니까."
"아니. 너한테 가르침을 받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나도 저녀석의 실력은 한번 느껴 보고 싶었거든. 여기서는 한번 져주도록 하지."
"좋으실 대로."
"그런고로 잘 부탁한다. .. 에르니아."
벤하르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조심 좀 해주세요."
"일단 자리를 옮기기로 하지. 집 앞에서 대련을 하게 되면 제로의 눈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벤하르트와 케이슨은 카실러스를 따라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도착했다.
"여기라면 괜찮겠지."
"그런데 말이지. 에르니아의 실력을 본다는 취지도 좋고, 대련도 좋지만, 에르니아 네가 검사라면 대련에서는 상당히 불리할 텐데?"
케이슨의 말에 벤하르트가 물었다.
"어째서 입니까?"
"그야 나는 기본적으로 무기를 쓰지 않는 권법가니까. 무기에 제약을 붙히게 되면 내 쪽이 확실하게 유리하지 않겠냐?"
"글세요."
벤하르트는 손가락으로 턱을 만지면서 생각했다.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벤하르트는 기본적으로 검사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수많은 여행을 통해 성장한 그의 기술은 어디를 노려도 원하는 만큼만을 벨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단련되어 있었지만, 케이슨 같은 고수와 싸우게 되면 장담은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무쇠조차도 두부처럼 잘라버리는 명검 중의 명검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한순간의 실수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다. 그렇기에 그는 필연적으로 사람을 죽일 것 같은 급소를 약했을 때나 강했을 때나 무의식 중에 언제나 피해 왔다. 그런 사실을 벤하르트 본인도 잘 알고 있기에 상대적으로 마음 놓고 팰 수 있는 검집은 심리적으로 부담감이 적엇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벤하르트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고 싸우는 모습도 거의 보지 못한 케이슨이 알 턱이 없었다.
"보시면 알겠지요."
벤하르트는 검집째로 검을 든다. 검을 듦과 동시에 케이슨과 카실러스의 눈빛이 바뀐다. 그리고 그들의 눈빛이 바뀌는 것을 눈치 챈 벤하르트의 마음가짐도 바뀐다.
그 짧은 순간에 모여 있는 셋은 서로가 서로의 역량을 경계할 줄 아는 실력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너 나 할 것 없이 벤하르트와 케이슨은 동시에 움직였다. 마치 서로 짜기라도 한 듯이 누가 공격이고 누가 수비인지 알 수 없을 것 같은 팽팽한 공방이 오간다. 전초전이자 탐색전은 호각이었다.
벤하르트도 케이슨도 서로가 서로에게 놀란다. 탐색전에서 보여준 실력 때문이 아니다. 그 실력 안에 숨겨진 힘의 크기의 일각을 느꼈기에 놀란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린다는 것 자체가 달인이라는 것을 방증해 준다.
수십 합을 겨루고 케이슨은 벤하르트의 검을 걷어찬다. 공격이나 방어를 위한 것이 아닌, 날려버릴 생각의 발차기. 명백하게 거리를 벌리기 위한 목적을 발차기에 벤하르트도 굳이 받아내지 않고 힘을 흘려 거리를 벌렸다.
"이대로는 승부가 나지 않겠어."
"굳이 낼 필요는 없잖아요?"
"아니 그럴수야 있나. 목적이야 승자를 가리기 위한 게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대련에 승자가 없으면 흥이 나질 않지."
"상당히 호전적이시네요."
"입장이 입장인지라 마음껏 싸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 마음껏 싸워야 할 경우라면 언제나 전력을 다해 목숨을 걸어야 했고, 이런 즐거운 싸움은 데인과 헤어진 이후로 처음이다."
케이슨은 활기차게 말했지만, 어쩐지 그 말에는 쓸쓸함이 묻어나 있었다.
"....."
"그래서 물어 보겠는데, 내가 조금만 더 열심히 싸워도 되겠냐?"
발로 바닥을 밟으며 케이슨이 묻는다. 바닥에는 거대한 균열이 일어나 있었다. 지금까지의 대련은 단순히 손 발을 맞췄다는 증거를 보이는 것만 같은 행동이었다.
케이슨의 진심으로 기뻐 보이는 얼굴에 벤하르트는 검을 바로 잡는다.
케이슨의 십여년의 시간은 벤하르트의 수십년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짧다고 해서 그 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벤하르트가 레니아를 구하기 위해 떠돌았던 지난 시간이 케이슨이 시공을 떠돌던 시간보다 짧다고 해서 그 질이 떨어지거나 농도가 옅었던 것은 아니듯, 그 시간이 기뻤든 고통스러웠든 삶의 농도는 시간의 길이로 판단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어떤 일이든 본인이 느끼는 것과 타인이 생각하는 것은 차이가 있기 마련. 고작해야 마음 편히 할 수 있는 대련으로 즐겁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케이슨이 어떤 삶을 어떤 심정으로 살아왔는지 벤하르트는 가늠할 수 없다. 리스가 옆에 있었던 자신과는 다르게 홀로 덩그러니 다른 시간대에 떨어져 버리고 다시는 자신이 살았던 그 시대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그의 심정을 벤하르트가 어찌 상상할 수 있을까.
벤하르트는 고작 대련으로도 즐거움을 숨기지 못하는 케이슨을 외면할 수 없었다. 아니, 외면하기 싫었다.
"반대로 저도 묻겠는데, 전력으로 가도 되겠습니까?"
힘을 알아보겠다는 본래의 목적따윈 아무래도 좋은, 전력을 다해 싸워보자는 벤하르트의 말에 케이슨은 미소 짓는다.
"바라전 바다. 이녀석아!"
은빛의 기가 케이슨의 발을 뒤덮는다. 그에 질세라 벤하르트도 백색의 기를 검에 내두른다.
"일섬 백뢰!"
백색의 번개가 케이슨에게 쇄도한다. 케이슨은 그것을 가볍게 발로 그어 소멸시켰다.
"아.. 그래도 이건 말해둬야겠군. 내 기술 검으로 막으면 검이 망가질 거다."
케이슨의 이야기를 통해 들었던 케이슨의 기술 '유성'은 상대방의 방어를 완벽하게 무시한다.
'내 검도 버티지 못하려나.'
지척에 도달한 케이슨의 팔을 보면서 벤하르트는 살짝 검을 가져다 댔다. 벤하르트의 검과 케이슨의 발이 요동친다.
"뭐 뭐야?"
"제가 묻고 싶네요."
놀란 것은 양쪽 모두였다. 케이슨은 검이 부서지지 않았다는 것에, 그리고 벤하르트는 이대로 계속 맞붙는다면 '자신의' 검이 부서질 것을 알았기에 놀란다.
"어쩔 수 없군."
벤하르트는 검을 뽑아 들었다.
'저게 에르니아의 검.'
멀리서 벤하르트의 검을 보는 카실러스의 눈빛에 경외심이 서렸다. 과거 수많은 곳을 돌아다닌 그였지만, 저정도의 무기는 본 적이 없었다. 신이 벼렸다는 검이나 악마를 죽인 창 따위의 전설의 무구라는 것들도 보아왔지만 벤하르트의 무기는 그보다 더 훌륭했다.
"이거 오늘 꽤나 눈 호강 하는구만,"
"진검을 사용할 생각이냐?"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즐겁게' 대련해야죠."
"그럼 왜 진검을 뽑아 들었어?"
대답 없이 벤하르트는 검을 허공에 휘둘렀다.
"일섬 백검(白劍)"
"오.."
케이슨은 한 발로 뛰어 그대로 거리를 벌렸다. 하늘에서 백색의 검이 쏟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검들을 보면서 벤하르트는 다시 검을 검집에 넣었다. 쏟아지는 백색의 검 하나를 잡아 들고 벤하르트는 그대로 케이슨에게 달려 들었다.
"이제 마음껏 싸울 수 있겠죠."
"하하 좋구만."
벤하르트가 들고 있는 검을 그대로 발로 부숴 버리는 케이슨의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서려 있었다.
- 작가의말
공모전도 공무원도 다 망해 부렀네요. 공모전은 몰라도 공무원은 꽤 기대 했는데, 눈앞이 껌껌하네요. 멘탈이 아작나 버렸습니다.
원래 이번을 마지막으로 그냥 끝나면 뭔 일이라도 잡으려 했는데, 가까운 시기에 추가 모집이 잡히는 바람에 아쉬워서 또 손을 놓지도 못하고. 앞으로도 뒤로도 못가는 신세가 되어 버렸네요. 그래도 소설은 엔쿠라스든 암네시아든 찔끔씩은 써보려 합니다.우중충한 잡설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모두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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