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516화-거래(3)
"레니아 어딜 가려는 거야."
벤하르트는 잠을 자던 차림 그대로 무기만을 들고 레니아를 따라 나왔다. 레니아는 조심스레 궁성에 나와 있는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꼭 이리로 가야 되는거냐?"
"지금 가려는 곳은 나름대로는 몰래 가야 하니까 말야. 도와줄까?"
창문의 밖은 벽으로 이루어진 절벽이나 다름 없었다. 레니아는 공중을 날아 벤하르트에게 권유했지만, 그는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밖으로 나가 벽을 타 경사진 곳에 매달려 말했다.
"그건 괜찮은데, 어디로 가는지 정도는 알려줘야지."
"여왕의 방이야. 여왕의 방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궁성의 꼭대기잖아. 그럼 이 벽을 타서 간다는 건데, 뭣하러 그렇게 갈 필요가 있는거지? 여왕을 만나러 가는 거라면 그냥 가면 되는 거잖아."
"그런 이유가 있지. 음 조금 서둘러야 겠는걸."
그는 레니아를 따라 성을 타고 올라갔다. 그들은 기척을 지우고 천천히 궁의 문으로 향했다. 달빛이 문을 통해 들어가 한 곳을 비추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여왕이 앉아 있었다.
'여왕이다.'
그곳에 있는건 왕비가 아닌 여왕이었다. 사실 레니아나 트레이야에 비하면 여왕의 외모는 떨어지는 면이 있었으나 달빛을 통해 본 그녀의 모습은 굉장히 아름다웠다.
"그나저나 어째서 여기까지 온거야?"
"왔다."
레니아가 그렇게 말하자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마누어잖아."
"그래."
"여왕님 마누어가 뵙습니다."
마누어는 공손하게 말했다.
"그래 여긴 무슨 일로 온 것이냐?"
"이번 일에 대한 이야기와 벤하르트와 레니아에 대한 말을 조금 드리고자 왔습니다.
"형식적인 이야기는 됐다. 벤하르트와 레니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다오."
"그게 사실은 그들에게 진 빚이 많기는 했지만, 저희들의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실이라.."
"저희들은 한 차례 고비를 넘기기는 했지만, 이것은 임시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도시는 다시 떠오를테고 곧 다시 같은 전철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 그때에는 '제7법'이라는 것도 사용할수 없을 것이 뻔한 일입니다."
"그렇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라스펠은 또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마누어의 표정은 비장했다.
"그래 그렇다면 어떻게 할 셈이지?"
"벤하르트에게는 령이 있습니다. 사실 그와 만나게 된 것도 바로 그 령을 노리다가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아마 이후에 령을 다시 찾게 되는것은 힘들겁니다. 그러니 강제적으로라도 빼앗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후 은혜를 원수로 갚겠다는 건가?"
"저도 그들에게 은혜를 받았으니 이런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의 전우이기 이전에 라스펠의 12장. 설사 그것이 죄라고 할 지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영웅이지만, 여기서 그들을 놓아 주었다가는 수십만의 라스펠 사람들이 다시 위험해 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전력은 우리들로는 당해내지 못할텐데,"
"아직 저들은 우리들이 자신들을 은인으로 생각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노리는것은 벤하르트와 레니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니 트레이야나 제네스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전력을 집중 시킨다면 제압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직도 그들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여왕은 조용히 말했다.
"그들이 우리를 도와 준 것은 대가를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닌 것은 알고 있겠지? 그것은 순수한 선의였다. 그런것을 우리가 배반 하는게 맞다고 생각하는거냐?"
"모든 책임은 저에게 돌려 주십시오. 하지만 이 일 만큼은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쉽게 됐구나. 그들은 네 행동조차도 훤히 꿰뚫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그게 무슨."
"이런 뜻이지. 이 더러운 녀석아
그는 레니아의 목소리에 급히 몸을 움직였지만, 다 피하지 못하고 레니아에게 목덜미를 잡혀 던져져 버렸다.
"크윽. 어 어떻게."
"그 입을 더 나불거리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나는 벤과는 달라. 화가 나면 네까짓 녀석쯤은 못죽일 것도 없으니까,"
성격 좋은 벤하르트도 지금 만큼은 마누어를 곱게 봐 줄수가 없었다. '제7법'을 한 것도 제노스를 상대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도 누가 알아주길 원하거나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배신을 당하기 위해서 그런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느낀것은 결코 아니었다.
마누어도 차마 그들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뒤에서 흉계를 꾸미는 일은 할수 있어도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는 짓을 할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도 어쩔수 없이 하는 일이지 절대 벤하르트나 레니아에게 개인적인 앙심을 품고 하는 일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라스펠에 바치고 사는 사람의 사고 방식이었지만, 그것이 상대에게는 고작해야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대단하군 레니아. 마누어의 생각을 다 읽고 있었다니,"
"그것보다 나는 당신이 더 놀라운데, 우리가 오는것을 다 알면서도 저 배신자가 나불거리는 것을 용케도 내버려 두고 있었다니 말야."
마누어는 나라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중 한명이었다. 물론 여왕도 대부분은 나라를 위해 생각했다. 그것이 자신의 국가와 관계된 것들이라면 그녀는 무엇이라도 버릴수 있었다. 하지만 벤하르트와 레니아는 달랐다. 그저 외부인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과는 전혀 관계 없는 일에 목숨을 걸어준 은인들이었다. 마누어는 나라를 위한 명분으로 그들을 공격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녀는 설사 자신이 만든 나라라고 해도 그들을 배신하는 일 만큼은 할 수 없었다.
"여왕님. 이대로 가면 라스펠은 다시 이 세계와 격리 되어 버립니다. 이제 두번 다시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겁니다."
"하지만 그럴수는 없다. 우리의 일은 우리의 일로 끝냈어야 한다. 령이 필요하다면 스스록 찾아야만 했다. 물론 벤하르트 일행은 령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한번은 멸망했던 라스펠을 구해준 은인이다. 마누어 저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닙니다만,"
"이미 한번은 멸망한 도시다. 이렇게 되살아난게 기적이지. 설사 다시 문드러져서 멸망의 길을 걷는다고 해도 이들을 공격할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여왕의 말이 백번 맞잖아. 거기에 이미 내가 알고 있는이상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우리가 당할일은 절대 없어. 애초에 여왕도 네 편이 아니고 말야. 솔직히 말하면 여기서 혼쭐을 내어주고 싶지만, 이미 나는 네가 어느정도 이렇게 될 것이라는걸 알고 있었고, 여왕의 얼굴을 봐서 참고 있는거야."
"벤하르트 레니아. 미안하다. 하지만 변명은 하지 않겠다. 지금도 마음 같아서는 너희들을 제압해 령을 빼앗고 싶은 마음 뿐이다. 그것이 잘못되고 더러운 일이라는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미안한 마음은 가져도 후회는 하지 않아."
"옹고집 같은 녀석."
레니아는 아무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눈으로 그를 내려다 보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기회가 이것 뿐이라고 한다면 사실 마누어의 심정도 이해가 가지 않는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삼자일때의 이야기다. 당장에 마누어가 노리는게 자신들이라는 것을 안 이상 그가 곱게 보이지 않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조용히 레니아가 말하는것을 듣고 있던 여왕이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이 몸은 그대들을 배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들의 입장에서 마누어를 용서할수는 없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 주었으면 한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마누어를 죽이러 온게 아니라서, 다만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배신에 대해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 당신은 내가 이런 상황을 전부 알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실제로 나는 '이럴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을 뿐이거든. 뭐 어느정도 확신은 했지만,"
벤하르트는 레니아가 도대체 어떻게 그런 것을 알았는지 궁금했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여기서 할수 있는것은 마누어의 잘잘못 뿐인것 같군. 그대들이 이곳 라스펠에 온 것은 정보를 구하기 위함이었을테니 내일 다시 만나서 그 이야기를 하는게 좋지 않을까?"
"하긴 이런 상황에서는 뭔가를 요구하는 것도 요구 받는 것도 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겠지."
"그럼 여왕님 소란을 피워서 죄송했습니다. 내일 뵙도록 하지요."
여왕은 벤하르트의 겸손한 태도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들은 지금 당장에 자신과 마누어를 공격했어도 이상할게 없을정도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벤하르트의 표정도 썩 밝지 않은 것이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고, 마누어의 말은 그만큼이나 잔혹한 말이었다.
7법을 사용해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견뎌 내어 라스펠을 끌어 내고 라스펠로 올라와 목숨을 걸고 제노스와 싸워 자유를 찾아 주었다. 무언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고 해도 그 대가가 배신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원통할지 그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죄송한 것은 이쪽이다. 설사 마누어의 뜻이었다고 해도 마누어의 말은 곧 라스펠의 말이나 다름 없는 것. 용서를 해주던 안해주던 라스펠의 대표로써 사죄하도록 하겠다."
벤하르트는 일방적이게 무언가를 받는 것을 상당히 꺼려하는 편이었지만, 지금 만큼은 구태어 거절하거나 하지도 않고 그저 덤덤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들이 나가고 나자 그녀가 말했다.
"마누어. 네가 말한 일은 분명히 라스펠을 위한 일이었다. 하지만 설사 저들이 몰랐다고 하더라도 나는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
"근신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두말이 있을리 없었다.
"제아무리 천사같은 마음씨의 벤이라고 해도 이번 만큼은 화나는 모양이지?"
"내 마음은 별로 천사 같지는 않아."
"그야 그렇지. 사실은 그저 속 좁은 남자일 뿐이지."
벤하르트는 좁지도 않다고 말하려고 하다가 말을 삼키었다.
"그나저나 레니아 솔직히 화가 나기는 했지만, 그보다도 너는 어떻게 그런것을 다 알수 있었던 거야?"
"나? 음 알고 싶어?"
그는 고개를 끄덕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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