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2부 87화-시공(時空)(17)(646화)
'어째서 제온이 여기에.. 아니 그보다도 이세계 용사라는 녀석이 제온이라고..?'
"아저씨."
"그래 저녀석이지? 그 아오이스라는 조직의 최강자라는 게. 저 모습은 10년이나 지났지만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군."
벤하르트는 눈을 감고 레니아와의 마지막 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렇네요."
"그런데 저녀석이 용사라니.."
벤하르트는 물론이거니와 케이슨도 링의 사건을 통해 제온에게 간접적으로 당한 경험이 있기에 제온이 이곳에서 용사로 불리운다는 것을 쉬이 납득하기 힘들었다.
"아 여기들 계셨군요."
구석에서 제온을 보는 벤하르트와 케이슨에게 페이라는 남자가 찾아왔다.
"용사님을 보시고 계셨군요."
"아 뭐. 그렇죠."
벤하르트는 약간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 표정을 보고 페이는 움찔거리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꽤 염치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군요."
벤하르트는 페이가 오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적당히 긍정하기로 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수장님도 두분에게 큰 감사를 느끼고는 있으실 겁니다. 다만 그분은 이득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시는 분인지라.. 아마 용사님을 더 우선시 해야 겠다고 판단하셨겠지요."
"페이! 페이! 어디로 간 거야 이녀석은."
멀리 제온을 따르고 있던 무드가 페이를 불렀다.
"그럼 저는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페이는 무드에게 달려갔다. 벤하르트와 케이슨은 떨떠름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래 어쩔 거냐?"
"뭘 말입니까?"
"제온 말야. 내가 그녀석을 잊지 못한 건 딱히 그녀석 때문에 내가 시간을 잃었기 때문인 것 때문만은 아니야. 하지만 너는 다르잖아? 이대로 괜찮겠냐?"
"괜찮지 않습니다."
벤하르트는 검에 힘을 주며 말했다.
"오 너 답지 않게 감정 조절을 못하는걸."
케이슨의 불행에 제온은 간접적인 이유만을 제공했을지 모르지만, 벤하르트는 달랐다. 벤하르트에게 제온이라는 존재는 레니아와의 여행을 끝낸 직접적인 원인이나 다름 없었다. 제온이 아니었다면 레니아가 봉인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온은 그런 억지가 전혀 빈말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벤하르트에게는 어떤 의미로 원수나 다름 없는 존재인 것이다.
'정말 원수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응?"
"제가 감정에 솔직해 져서 제온을 죽이고 싶다고 한다면 죽여도 좋은 겁니까?"
"그야 안되지."
"그럼 물을 필요도 없는 거잖아요."
"쯧쯧 아직 어리구만. 벤하르트."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케이슨이 말했다.
'나이로 따지면 아저씨 쪽이 더 어릴텐데.'
"내 오랜 여행의 경험에 의하면 여기선 말해두는 족이 정답이거든."
"그렇습니까?"
"이렇게 말해두는 것만으로도 너는 네 감정에 우선해 제온을 노리지 않을테니까, 일종의 보험이라는 게지."
"확실히.."
벤하르트는 케이슨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를 찔러 넣었을 뿐인데도 감정에 자물쇠가 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뭐.. 애초에 우리 둘다 저녀석보다 약하니 쓸데 없는 보험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케이슨은 불만스러운 얼굴을 지어 보였다. 벤하르트도 그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없는데 하지 않는 것은 그 근본부터가 다른 것이다. 지금은 그저 시공의 틈을 표류하는 상황이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좋지만, 만약 이것이 레니아를 구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필연적으로 제온과는 검을 맞댈 수밖에 없다, 지난 3년 수많은 시련을 꺽어 강해진 벤하르트였지만, 그 실력이 제온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본인이 잘 알고 있었기에 속이 달아 오른다.
'하지만 나와 제온은 과연 어느 정도나 차이가 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벤하르트의 시선에 구석에서 울고 있는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훌쩍 훌쩍."
울먹이는 소년의 무릎에는 거친 상처가 나 있었다. 벤하르트는 검을 들어 소년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괜찮니?"
"어? 아프지 않아."
소년은 방방 뛰면서 신기해 했다.
'이 세계에는 마법은 없는 건가?'
"어이구.. 에르니아 그런 것도 할 수 있는 거냐?"
벤하르트의 치료를 보며 케이슨이 말했다.
"네."
"만능이시구만."
"그나저나 경황이 없어서 살피지 못했는데, 밖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글세."
"제가.."
소년은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며 말했다.
"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우리 엄마를 치료해 주세요."
"그래. 그럼 안내를 좀 해주겠니?"
"네!"
벤하르트와 케이슨은 소년을 따라갔다. 도시의 변두리 골목, 병동이라기보다는 격리실 같아 보이는 천막에는 작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묵직한 앓는 소리와 신음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절망은 주변의 사람들을 지치게 만든다. 역병 같이 주변의 사람들도 옳아 맨다. 무드에게 이곳의 사람들은 살아갈 의지를 잃고 이성을 잃은 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수장이기에 버리지 않았을 뿐, 도시를 약화 시킬 요인인 그들을 적극적인 대우를 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렇기에 명분은 치료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렇게 도시 사람들에게 눈에 뜨이지 않게하는 격리에 가까운 행동을 취한 것이다.
"엄마!"
"...."
초점이 맞지 않는 퀭한 눈을 한 깡마른 여인은 소년의 말에도 반응이 없었다.
'다친 곳은 다리인가?'
벤하르트는 검을 휘둘러 여인의 다리를 치료했지만, 부러진 다리가 나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미동이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여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과연 결계가 깨진다고 생각해 정신이 나간 사람들이라 이건가."
벤하르트는 큰 부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가서 치료를 해 주었다. 불행이라 해야할지 다행이라 해야할지 마족에게 노려진 사람들은 대부분 즉사했고,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다친 사람들이라 생명에 지장이 있을만큼 다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고칠 필요 없소."
가벼운 상처부터 중상에 이르기까지 치료를 하고 있던 차, 한 중년의 남성이 차갑게 말했다. 벤하르트는 흘끗 남성을 보고 무언으로 그 남자의 상처를 치료해 버렸다.
"고치지 말라고.."
"그렇게 죽고 싶다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자살이라도 하시지."
"웃기지 마. 나는 당신과는 달라. 희망이 없는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는 싫다고,, 그렇다고 죽을 용기도 없어. 당신이나 용사같은 빛나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겠지.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면서 죽지도 못하는 나를 비웃고 있을 거야. 그렇지?"
"생각하지 않아."
벤하르트의 말에 중년 남성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천마디의 변명보다 진실된 한마디의 말 하나. 그는 벤하르트가 빈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는 것은 분명 괴로움이 따르기 마련, 아니 괴로움 투성이일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다고 삶을 포기하고 죽는 것이 그 괴로움을 해결해 주는 건 아니지."
벤하르트가 검을 치켜 들자 천막이 걷혔다. 깨끗한 하늘 내리쬐는 따사로운 햇살이 병동의 사람들에게 내리쬐었다. 좌절에 빠졌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아.."
"서 설마. 용사...가.."
"죽으면 이런 기쁨도 느낄 수 없는 거야."
병동의 침울한 분위기는 곧 환호로 뒤덮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벤하르트는 생각했다.
'그래.. 그 길이 얼마나 가시밭길일지라도.. 괴롭다고 해도.. 나는 걸어갈 뿐. 나는 포기하지 않아.'
그 말은 누구에게 한 말이었을까. 눈앞에 희망으로 가득찬 사람들을 보며 벤하르트는 공허한 미소를 지었다.
치료를 전부 끝내자 벤하르트는 활기를 되찾은 사람들을 뒤로하고 병동을 나왔다.
"폼 잡기는.."
"아직 어리시네요. 제 오랜 삶에 의하면 저런 사람들에게는 이런 게 효율적이라구요."
"카핫. 한방 먹었구만,"
케이슨은 웃으면서 벤하르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 뭐하는 겁니까?"
"아니 뭐 너도 힘들었겠구나 싶어서 말야."
"아저씨만 하겠습니까?"
벤하르트는 국어책을 읽는 것만 같이 딱딱하게 말했다.
"이자식 이번 건 아무래도 마음에도 없는 소리잖아."
"농담입니다. 아.."
벤하르트는 실실 거리던 표정을 바꿨다. 벤하르트와 케이슨 두명의 달인들을 상대로 소리도 기척도 없이 그는 어느샌가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밖의 사건을 해결해 주었다는 그 이세계인들인가."
- 작가의말
모두들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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