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2부 23화(577화)-治心(2)
"우와아."
티온은 눈을 반짝이며 사방을 둘러 보았다. 그도 그럴것이 수많은 종족들이 존재하고 있는 모습은 쉽게 경험할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백년을 살아도 못보는 사람들은 못보는 것이고, 티온처럼 8살난 아이라도 볼 수 있는 사람은 보는 것이다.
"앗."
티온은 물컹거리는 무언가를 밟았다.
"아이 꼬맹아 눈좀 잘 뜨고 다녀라."
도마뱀머리를 한 남자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자신의 꼬리를 쓰다듬었다.
"죄 죄송합니다."
"뭐야 인간이잖아. 쳇."
티온은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자신을 보는 도마뱀머리의 남자에게 뭐라 하지는 못하고 당황해했다.
"죄송합니다. 아프실테니 꼬리를 내밀어 주시죠."
"뭐?"
도마뱀남자가 대답함과 동시에 어느샌가 다가온 벤하르트는 그대로 검을 들어 도마뱀의 꼬리를 잘라버렸다. 앗 하고 반응할수조차 없는 빠른 속도였다. 꽥 하고 소리를 지르며 도마뱀남자가 말했다.
"무슨짓이야!"
"어떻습니까. 아직 아픈 구석이 있으십니까?"
"어? 아니.."
사실 꼬마가 꼬리를 밟아 봐야 얼마나 아프겠냐만은 살짝 '욱신'거리는 느낌마저도 사라져 있었다. 아니 더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 꼬리라도 휘두르고 싶은 기분이 되어 버려서 도마뱀남자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이상은.. 없구만, 그래 고맙소."
"다행이군요."
"거 꼬마야 앞으로는 조심해라."
"네.. 네 죄송합니다."
도마뱀남자는 더 벤하르트를 상대할 용기가 나지 않아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뒤로했다.
"리스 녀석 어디로 가 있는 거야? 그 짧은 사이를 못참고, 그래 괜찮아?"
"네. 괜찮아요."
티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일단 방이나 잡도록 해야겠군. 자 따라와."
"리스 언니는요?"
"리스야 뭐 알아서 잘 하니까,"
벤하르트는 리스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살갑게 대하는 일을 잘 하지 못한다. 특히나 어린아이라면 더더욱이 서툴렀다. 반쯤 강요하듯 억지로 사귀려 든다면 그녀는 꽤 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지만, 조금이라도 상대가 자신에게 정을 붙히려 들지 않는 기색을 보인다면 그녀도 정을 붙히려 들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면 리스와 티온은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지.'
그는 십중 팔구는 리스가 티온을 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 따라와."
선실의 안에 들어가서 벤하르트는 능숙하게 방을 하나 잡았다. 그리고 짐을 두고 바로 티온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여기는 많은 종족들이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상식'에 비추어서 행동하는건 좋지 않아. 항상 조심하도록 해."
"어이구 이게 누구신가 벤하르트 하르크잖나."
"아. 뮤노인가."
티온은 벤하르트에게 다가온 남자의 등에 솟아있는 작은 날개에 눈이 돌아갔다.
"이거 참 오랜만인데 그래. 그래 아직도 안죽고 살아 계셨나?"
"자 자. 뮤노 평상시라면 나도 대꾸좀 하면서 놀아 주겠지만, 오늘은 동행이 있거든. 좋은 말 할때 저리 가라."
"헛소리하고 있군. 벌써 반년만에 본 원수놈을 그냥 넘길수야 있겠냐? 오늘이야말로 각오하는게 좋을거다."
"원수라니, 고작해야 선수를 뺏긴게 어째서 원수가 되는거지? 거기에 너는 그때 순수하게 보물을 노리고 온 것 뿐이었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고작해야 인간에게 당한건 내 일족의 수치라고!"
"뭐 그렇겠지. 나도 말야. 상대는 해주고 싶긴 하다만, 오늘은 동행이 있다고 하잖냐."
"이 인간 꼬맹이를 말하는건가?"
비웃음 섞인 표정으로 뮤노는 티온을 바라보았다.
"하 어린애가 취향인지는 몰랐군. 이제 그 여자인지 뭔지를 구하는.. 으읍."
"그쯤 해두라고,"
벤하르트는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살기를 내뿜으며 뮤노의 입을 막았다. 입을 막힌 뮤노는 눈알을 굴리며 버둥 거렸다. 주변 종족들이 모두 술렁이는 가운데 그는 살기를 싹 풀며 손을 놓았다.
"라는 장난.. 장난입니다 하하."
벤하르트는 손을 저으며 능청스레 거짓말을 했다.
"그렇게 원한다면 '결투장'으로 따라와라. 나도 조금 화가나버렸거든."
"아니 그만두도록 하겠다."
뮤노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왜 그러지? 나는 상관 없는데 말야."
"아니 그래 미안하다고, 그 말은 별로 꺼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사실 그냥 너와 싸워서 한번 이겨보고 싶은 마음에 싸움좀 걸어본 것 뿐이었다고,"
자신이 얼마나 찌질해보이는지를 알면서도 그는 그렇게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었다. 방금 입을 잡혔을때 벤하르트의 표정은 정말이지 공포 스러운 것이었다. 거기에 그 살기는 말로 표현할수 없었다. 지금까지 수 차례 벤하르트와 싸워 보았지만, 단 한번도 그런 표정은 본 적이 없었다. 이러니 저러니 벤하르트의 이야기를 수소문 해서 그는 '레니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지만, 그 이야기를 벤하르트의 눈앞에서 꺼낸 것은 처음이었는데 벤하르트가 그렇게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처음 벤하르트의 임무 때문에 맞설때조차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방금 그는 순간 심장이라도 쥐어 잡힌 듯한 공포심을 느꼈다. 그는 살아 생전 누군가에게 그정도로 겁을 집어 먹은 적이 없었다. '죽어도 좋다'라는 생각으로 싸움을 한 적이 있었는데, 벤하르트의 살기는 그야말로 그의 근본적인 공포를 자극 하는 것이었다.
"사과를 해야 될쪽은 내가 아닐텐데?"
'뭐가 아니냐'
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혀를 찼다.
"쳇.."
하지만 그는 벤하르트가 무엇을 요구하는 건지 알고 있었다. 그는 티온을 미묘한 표정으로 보았다.
"어이 꼬마야 미안하다."
"아니 뭐.. 괜찮아요."
"쳇.. 내게 이런 모욕을 주다니 두고보자 벤하르트!"
"하여간 경박스러운 녀석."
티온도 방금 벤하르트의 눈앞에서 그의 차갑디 차가운 표정을 보았었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얼굴이어서 다시 그런 얼굴일까 두려웠지만 지금 보이는 표정은 다시 태평스러운 그의 얼굴이어서 내심 안심했다.
"이렇게 조심해야 되는거야."
"그런데 저희가 인간인게 뭐가 문제가 되는거에요?"
"지금 있는 대다수의 이종족들은 마계에서 사는 녀석들이지. 마계에는 저런 이종도 있지만, 인간도 살고 있지."
벤하르트는 티온에게 음료를 권하며 말했다.
"우리 인간계에서야 인간이 지배하는 구도를 띄고 있지만, 마계에서 인간이라는 종족은 사실 수는 많아도 힘에서 밀리는 약간 하등한 종족으로 인식되어 있거든. 인간의 단결력때문에 대대적으로 인간을 멸망 시키거나 하지는 못하지만, 보통 일대일의 승부에서는 인간이 그들보다 약한 경우가 많으니까 인간은 치사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거야. 때문에 '그런' 인간에게 지거나 뭔가를 당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녀석들이 많지."
"하지만 벤하르트는 이겼잖아요."
"인간도 인간 나름이니까, 인간이라고 태어날때부터 다른 이종에게 밀리란 법은 어디에도 없거든. 다만 다른 종족보다 선천적으로 능력이 밀리기 때문에 '성장'하기는 더 어렵긴 한 단점 정도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요즘은 인간들도 충분히 마계에서 여행도 할 수 있을정도로 힘을 기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예전과는 다르지."
"음.. 힘을 기를수가 있다구요?"
"마법이든 기든 내가 사용하는 검 많이 본적 있었겠지만 말이다. 내가 사용하는건 보통 '기'라고 불리우는 것이고 이 기를 술식으로 바꿔서 사용하는게 '마법'이지. 사람들은 마계의 어떤 종족들보다 더 '발전'속도가 빠르니까, 지금은 마족에게도 요괴에게도 쉽게 밀리지 않아."
"그럼 멸시 당할 일도 없잖아요."
벤하르트는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 도리어 '그렇기에' 더 자존심을 자극하게 되는게 문제인거다."
벤하르트는 설명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티온의 성숙함을 믿고 말했다.
"일단 '인식'이 인간은 약하다라고 박혀 있었지?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강해져 버린 인간에게 누군가가 지게 되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아 강하네. 는 아니겠네요."
"그래. 내가 '이런놈에게 지다니'라고부터 생각하게 되는거야. 어렸을때에는 나보다 약했던 녀석이 몇년뒤에 자신보다 강해져 버렸다면 그걸 인정하는건 쉬운일이 아니라는거지. 때문에 골은 더욱더 깊어지게 되는것이고,"
티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해하고 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아무렴 어떠냐 싶어 벤하르트는 시험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아직도 대다수의 인간들은 마족이나 요괴 그리고 다른 이종들에 비해 밀리는건 사실이니까, 조금 '특출난'인간들 때문에 모든 인간이 자신들보다 강하다 라고는 생각하지 않는것도 있지. 마계에서도 유명한 사람들이 있는데, 로지닌 이라는 사람은 마계에서도 손을 꼽는 실력자라서 그런 사람정도가 되면 인간이라고 저런식으로 앞에서 뭐라 할 사람은 없는거야."
"그럼 그 로지닌이라는 사람과 벤하르트가 싸우면 누가 이기게 되요?"
"로지닌이 이기지 않겠냐? 나야 뭐 일개 검사에 불과하니까,"
"재미없는 답변이네요."
"네 유도심문에 넘어갈 정도로 호락호락 하지는 않거든. 자 음식이나 먹어라. 이건 팔라라 섬에서 나오는 고주류식 그리고 이건..."
벤하르트는 여러 특이 식품들을 그릇에 담아 티온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티온 너는 나를 따라오면서 두렵다는 생각도 안해봤냐?"
"네?"
"나는 별로 좋은 놈이 아니야. 솔직히 나쁜사람도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결코 네가 생각하는 것마냥 착하기만 한놈은 절대로 아니지. 나를 따라온다는 것에 망설임도 있었을텐데,"
"별로요."
시큰둥하게 그녀가 말했다.
"어머니도 없고 저에게 절망밖에 심어주지 않은 그 도시에 있고 싶지는 않았어요. 도시에 미련은 없었지만, 제가 따라가는 것을 벤하르트가 거절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했었어요."
"그야 거절은 하겠지. 사실 가렌더부크에 내가 사는 곳이 없었다면 '강제로'라도 나는 너를 두고 왔을 거다. 나중에 가면 아 '평범한 삶'이 그리워 하고 후회할지도 모를걸? 그 나이에 '아무것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 간다는게 두렵지도 않으냐?"
"....."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이었다. 벤하르트에게 붙어 여행하는 동안 그녀는 불안함을 없앨수 없었고 감추지 못했다.
"두렵지만, 후회는 안드네요."
"그렇다면 상관 없겠지."
음식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티온은 멍하니 주변을 둘러 보았다. 마치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벤하르트를 따라오지 않았다면 아마 이런 경험은 그녀가 죽는날까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한점의 후회도 없었다.
걱정도 망설임도 두려움도 그녀의 눈앞에 있는 희망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난잡스러운 온갖 만감을 머금은 그녀의 두근거림은 그것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든 기대로 가득찬 흥분이든 관계 없이 기분좋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직 어린 그녀였지만,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 있다'고 자각하고 있었다.
'엄마 지켜봐주세요.'
주먹을 꼭 쥐고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 작가의말
오랜만에 술술 써내려갔네요. 그나저나 사실 원래 목표는 어제 가렌더 부크에 도착하는 것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그리고 다들 댓글 감사합니다. 오늘따라 댓글보고 감정이 확 살았네요.
오타는 곧 수정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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