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2부 17화(571화)-마신(魔神)(11)
크로세트는 꽤 몸이 너덜너덜해졌지만, 한번 문지르고 지나가자 부서져 가던 신체는 다시 회복되었다.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건가?'
그는 수천년전 마계에서조차 손을 꼽는 강자였다. 인간 따위는 길가에 굴러 다니는 벌레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마왕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벤하르트는 이단적인 존재였다.
'인간 따위라고 생각한게 잘못이었군. 저녀석은 어떤 의미에서는 저 흡혈귀 이상가는 괴물이다. 하지만 그래도 '인간' 인간 따위에게 내가 무력하게 당할까보냐!'
크로세트는 양손에 마력을 집중 했다. 그가 최대로 다룰수 있는 구체는 다섯개
수천년 전 리스와 싸울때의 전력으로 그는 벤하르트와 맞섰다.
크로세트는 이미 벤하르트를 얕보지 않았다. 인간이 한없이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리스 이상의 존재라고 상정하고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다섯 개의 구체를 통해 지연시간이 없다 시피한 이동능력은 벤하르트의 속도라고 해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이전처럼 구체를 제거 하려고 하면 바로 붉은색으로 바꿔 거대한 불길의 벽이 벤하르트에게 쇄도했다.
백뢰를 이용한 검격도 크로세트의 마법앞에 완벽하게 막혔다.
'역시나 리스와 겨뤘을만 하군.'
벤하르트는 크로세트의 실력만큼은 순수하게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무시하고 있을 때' 생겼던 불필요한 빈틈은 이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전에 크로세트는 벤하르트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퍼붓는 것을 멈추었다. '수비'만 하는 크로세트를 상대로 벤하르트도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
마계에서 인간은 흔하게 하등하다고 말해질 정도로 취급은 좋지 않았다. 그런 인간을 상대로 한때마다 신이라고 불리울 정도의 마신이 인간을 앞에 두고도 수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난적이라는 것은 역시 이런 것이겠지.'
난적이란 단순하게 힘이 강약에 따라 나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위기 속에서 벤하르트는 언제나 그 위기를 모면해 왔다. 자신보다 '강한 적'이 꼭 난적이라고 칭할수는 없었다. 진정한 난적이라는 '타인의 그리고 자신의 실력에 휘둘리지 않고' 진심을 다하는 경우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크로세트는 이미 방심이라고는 단 하나도 하지 않는 말 그대로의 난적(難敵)이 되었다.
크로세트는 벤하르트에게 공격을 하는가 싶더니 바로 구체와 자리를 바꾸었다. 벤하르트는 공격을 멈추었다.
'뭔가 이상하다.'
방금까지만 해도 크로세트의 곁에 붙어 있던 구체들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벤!"
리스의 다급한 목소리에 그는 땅을 박차고 그 자리에서 벗어 나려 했다.
"세리오트."
"큭!"
벤하르트는 재빨리 땅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발동한 마법은 그대로 땅에서 부터 기어 올라 벤하르트를 꿰차고 지나갔다. 아래에서 쇄도한 붉은 용의 마법은 벤하르트의 몸을 지지고 지나갔다.
'그 짧은 사이에 방어를 해내다니,'
크로세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 전 공격은 회심의 한 수 였다. 그는 벤하르트의 수준이라면 이후 죽을때까지 같은 공격은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벤하르트는 몽롱한 눈으로 방금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의 위치와 구체를 바꾸어서, 마법진의 위치에 구체를 하나하나 두어 만들어 낸건가. 아무 생각도 없는 회피라고 생각하다니,'
벤하르트는 방심 따위는 하지 않는다. 지금 이것은 순수하게 그 옛날 리스와도 일순 호각을 이루었던 크로세트의 진정한 실력인 것이다.
'타격이 꽤 크군.'
울컥 하면서 역류해 올라오는 피를 한 차례 내뱉고 벤하르트는 비틀 거리며 검을 바로 잡았다. 그 약함을 크로세트는 놓치지 않고 파고 들었다. 다섯 개의 구체를 벤하르트의 상하좌우에 두르고 시간차이조차도 주지 않는 사방에서 뻗어나오는 맹공에 벤하르트는 비틀거리면서도 '단 한방'도 맞지 않았다.
'어 어떻게!'
크로세트의 공격은 기술로 현혹될 지언정 그 공격 하나하나에는 의미가 없는 마구잡이였다. 벤하르트에게 있어 그런 공격은 유려의 움직임으로 충분히 반응 할 수 있는 부분이었던 것이다.
덧없어 보이는 공격이 이어진다. 수십 수백합 무의미하게 쌓여가는 공방에 크로세트는 살짝 느슨해진 일발의 공격을 가했다. 그 다음 한 수를 위한 견제에 지나지 않는 신념이 섞이지 않은 일격에 벤하르트는 눈을 번뜩였다.
'보였다!'
"일섬 참도!"
가볍게 벤하르트는 어깨를 내주고 그대로 크로세트의 가슴을 베어 넘겼다. 당연한 공방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크로세트는 가슴에 닿는 싸늘한 일격에 기겁을 하며 위치를 바꾸었다.
"후우.."
벤하르트는 순간 크로세트의 위치를 놓쳤지만, 크로세트의 몸은 산산히 조각나기 일보 직전까지 이르게 되었다.
"으아.. 으으.. 뭐냐 이 공격은!"
크로세트의 속을 차갑게 조여오는 벤하르트의 공격은 '공포' 그자체였다. 그것은 크로세트에게 있어서 처음 맛보는 '죽음'이라는 감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검'을 베어 내는 검술. 벤하르트의 검에 의해 '검'의 힘을 가지고 있는 크로세트에게 있어서 '참도'에 적중 당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자신이 만들어낸 이계속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벤하르트에게 죽음을 당했을것이 틀림 없었다.
스스로의 피와 살과 뼈를 만들어낸 이 공간이라면 몸을 복구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후우."
벤하르트는 크로세트에게 당했던 상처에 한숨을 쉬며 검을 들이 밀었다. 이전보다 확연하게 느려진 벤하르트의 움직임에 크로세트는 생각했다.
'어차피 인간. 원의 흡혈귀와는 다르지. 이대로 몇번만 들이 민다면,'
하지만 그 몇번이 힘들다. 방금 전 목까지 차올랐던 자신을 감싸 안았던 죽음의 감각에 그는 벤하르트에게 접근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벤하르트의 체력은 유한 자신은 이 공간에서라면 리스에 버금갈 정도의 재생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과거 자신이 리스를 당해내지 못했 듯 승기는 점차 자신의 쪽으로 기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으읏.."
벤하르트는 차가운 눈으로 천천히 크로세트에게 다가왔다. 크로세트는 순간 벤하르트의 빈틈을 보고 그대로 손으로 찌르려 들었다. 크로세트의 손이 벤하르트의 허리를 찌르는 순간 그대로 벤하르트의 검이 크로세트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으아아!!"
허벅지부터 싸늘하게 감각이 사라져 가는 느낌에 크로세트는 기겁하며 물러섰다. 허벅지부터 시작되었던 감각은 등골과 가슴을 타고 목에 까지 이르렀다. 그 소름 끼치는 감각은 두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고통'이라고 말할 수 조차 없는 이질적인 기분. 단 한걸음만 늦었어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벤하르트는 어깨를 꿰뚫리고 온몸에 잔 상처를 입고 허리를 꿰뚫렸다. 아마도 '조금'만 더 밀어 붙힌다면 크로세트도 '기회'를 얻을 수 있을 수준까지 이르렀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조금을 위해 걸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이었다.
크로세트의 전법은 기본적으로 '접근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구체를 날려서는 벤하르트에게는 조금의 상처도 줄 수 없었다. 자신을 미끼로 구체로 벤하르트를 끌어 들이든 '자신'에게 벤하르트의 공격을 집중 시켜 '전이'를 통해 기회를 만들든 접근 하지 않으면 벤하르트에게는 상처를 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접근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벤하르트의 두 눈은 자신에게 고정 되어 있었다. 마치 무슨 행동을 하든 반응 해버릴 듯한 자신의 심중을 옭아 매는 시선에 크로세트는 자신이 그에게 기가 꺾였다는 것을 자각하고 분개 했다.
'내가 인간 따위에게!!'
하지만 그 분노로 조차도 벤하르트에게는 접근 할 수가 없었다.
'아아 그랬지. '지켜 달라' 했었던가!'
그는 벤하르트에게서 거리를 벌리다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충분히 크로세트를 압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벤하르트는 돌연 크로세트의 미소를 보고 움찔 거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크로세트의 구체를 파악했다.
'넷. 하나가 없다.'
그 남은 하나의 위취를 파악하기도 전에 크로세트의 몸은 사라졌다. 녹색의 구체와 위치를 교환한 곳은 리스와 티온이 머무르고 있는 곳이었다.
"크흐흐.."
"벤에게서 도망쳐 나에게로 오다니 실성이라도 한거야?"
리스는 냉소하며 손에 혈기를 집중했다.
크로세트는 리스의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티온'을 향해 마법을 날렸다. 리스는 크로세트를 공격하기 전에 티온에게 향하는 공격을 막을 수 밖에 없었다.
"음. 꺄앗!"
티온은 자신에게 쇄도하는 공격에 비명을 내질렀다. 리스는 몸을 날려 크로세트의 마법을 막았다.
"으으으..!"
리스는 타오르는 자신의 살에 신음을 내뱉었다. 타오른 부분은 그대로 소멸하여 리스의 형체를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크로세트의 웃음 섞인 얼굴을 보고는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아 내었다.
마치 아지랑이처럼 형체를 잃어가는 리스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비명만은 지르지 않았다.
"'인간이 아닌 자를 멸살하는 마법은 어떠신가? 원의 흡혈귀!"
"리스!"
벤하르트가 달려 오기 전에 크로세트는 양손에 마력을 집중해 리스가 속한 아래로 폭격했다. 비처럼 쏟아지는 마법의 비에 리스의 신체에는 너덜너덜하게 구멍이 뚫렸다. 그 안에는 '인간이 아닌 자를 멸살'하는 마법과 더불어 일반적인 공격 마법들도 섞여 있었다. 그 마력을 몸으로 맞아가며 그녀의 고통은 아까보다 배는 더 했음에도 그녀는 눈 하나 깜박 하지 않고 크로세트를 노려 보았다.
날아가는 몸은 수복 되지 않았다. 마력에 관통당하면 목숨이 도려져 나가는 그 마법에도 그녀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크로세트는 마지막 마법을 날렸다. 하지만 이미 벤하르트는 리스를 지키기에 충분한 위치에 서 있었다. 벤하르트는 검을 방패삼아 마법의 앞에서 몸을 막았다.
"리스!!!"
"벤. 약속은 지켰어."
리스는 간당간당하게 붙어 있는 몸으로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아마 그녀가 자신의 몸을 위해 몸을 피했다면 티온은 도저히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어... 어?"
벤하르트는 순간 자신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이 움직이질 않아."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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