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2부 89화-시공(時空)(19)(648화)
벤하르트가 제온을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나, 직접 대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루크의 조언, 아오이스의 최강이라는 소문, 리스가 제온을 꺽지 못한 일들은 설사 제온의 강함을 눈앞에서 봤다고 해도 벤하르트에게 있어서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경험일 뿐이었다. 간접적 경험과 직접 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것이 아오이스 최강.'
최강이라는 말은 아무에게나 붙일 수 있는 수식이 아니다. '살아남는 쪽이 최강이다' 같은 말장난이 아니다. 그저 서 있는 위압만으로도 벤하르트는 그에 대한 표현이 전혀 아깝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살이 떨린다. 누가 봐도 훌륭한 괴물인 그 리스가 괴물이라고까지 칭한 남자. 벤하르트는 실로 그 말대로라고 생각했다. 방금전까지 자신과 이야기 하고 있었던 제온이라는 '인간'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검을 들고 서 있는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인간을 벗어난 '무언가'다.
"오지 않는가. 성장했군."
제온의 그 말은 자만이 아니며 조롱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 제온을 경계하며 '두려워 하는' 벤하르트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일전에는 전혀 가늠하지 못했던 제온의 힘을 지금의 벤하르트는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수준 차이가 너무 나서 상대의 강함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경지를 벗어난 것만으로도 인정을 받을 정도로 제온이라는 존재는 격을 달리하는 존재다.
제온과 자신의 격차를 벤하르트는 알고 있다. 알고 있기에 그 가능성이 실낱 같다고 해도 이길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제온의 강함을 이해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것으로 그는 비로소 제온과 검을 맞댈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할 수 있었다.
"이대로 눈싸움만 하다가는 승부는커녕 시작도 하지 못하겠지."
한발을 내딪음과 동시에 벤하르트와 제온의 거리가 사라졌다.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제온의 공격을 막는다. 검과 검이 부딪히자,
[쾅]
그제서야 제온이 땅을 박찬 소리가 들려 온다. 이미 상식은 아득하게 초월한 그 움직임에 벤하르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 움직임은 저 제온에게는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괴물이 괴물 같이 움직인다고 일일이 놀랄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검과 검이 부딪힌다. 벤하르트는 그 검이 연철장의 손이 닿아 있는 검이라고 확신했다. 이미 자신은 형(形)을 버렸지만, 제온이 들고 있는 검에선 연철장의 손길이 느껴졌다. 벤하르트의 검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검이다.
서로 간의 검격은 멈추지 않는다. 10합 100합 1000합.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며 반격하는 벤하르트의 검을 제온은 너무도 쉽게 막아 버린다. 마치 막히는 것이 '답'인 것처럼 당연하게 느껴진다. 공격을 성공 시키기 위해 방식을 달리 해봐도, 공격하는 벤하르트 쪽이 오히려 막힐 것을 예상하게 된다. 그런 철벽의 방어를 하면서도 노리는 공격은 하나 하나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유려의 움직임이 아니었다면, 벌써 상처를 입었을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유려의 움직임' 또한 벤하르트의 능력.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실력을 믿고 있기에 벤하르트는 그마저도 포함해 공방을 만들고 있었다. 마치 실력을 가늠하듯 서로는 무한의 공방을 이어 나간다.
이 시점에서 벤하르트나 제온이나 본 실력은 꺼내지도 않은 상태였다.
"일섬 백뢰!"
백색의 번개가 주변을 휘감아 부순다. 주변의 땅을 산산히 조각내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위력의 번개가 제온에게 쇄도한다. 평소와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한 백뢰였지만, 제온은 그 번개보다도 빠르게 그 자리를 이탈했다. 부서지기 직전의 건물 위에 착지한 제온은 답지 않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과연.. 대단한 위력이군. 그렇게도 나를 이기고 싶은가?"
"당연하지. 무엇을 위해 정체까지 드러내며 싸우려 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렇다면,"
제온의 기색이 변한다. 지금까지도 괴물 같다고 느낄 정도였지만, 그 느낌은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이겨내 봐라. 라 에르피도."
'빨라..'
그 케이슨의 움직임조차도 초월한 속도로 제온이 움직인다. 단순하게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온 도시가 초토화 되어 버린다. 보통이었다면 따라갈 수 없이 일방적으로 유린 당했어야 정상.
하지만 벤하르트는 그 움직임을 따라가고 있다. 결사의 각오를 다지며, 자신의 검으로부터 힘을 빌린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를 넘어선 강함을 손에 넣는다. 그리고 그 빌린 힘 위에 자신에게 '최면'을 건다. 자신의 몸에 쌓아 낸다. 빌리고 빌리고 또 빌린다. 그리고 지금까지 빌린 만큼만 더 빌린다. 한계를 부수고 또 부숴서 힘을 손에 넣는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여기서 쏟아 붇는다.'
그렇게 쌓아 올린 벤하르트는 케이슨을 상회할 정도의 힘을 손에 넣었으나, 그럼에도 제온의 움직임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부족분은 벤하르트의 움직임이 보조한다.
"라 오르피도."
하나 하나의 일격에 거대한 산이 짓누르는 듯한 힘이 전해 진다. 속도에 얹어진 힘은 그저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도시를 모래성을 부수듯 날려 버린다.
'으으읏'
힘을 흘려내는 것은 벤하르트의 전문이다. 근육이 끊어지는 것 같은 압박을 받았지만, 벤하르트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그 공격을 막아 낸다.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 온 실력은 그 제온과도 싸울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그의 어깨가 시큰 거렸다.
"뭐?"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공격은 날카로웠지만, 분명 유려의 움직임이 커버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당혹감이 커진다. 연이어 날아오는 제온의 섬격을 집중해서 눈으로 쫓았다. 그 섬격은 빠르고 강하면서도 너무도 정갈하면서 정확한 궤적을 그렸다.
'피할 수 있어.'
분명 눈으로 쫓기 어려울 정도의 빠른 공격이었지만, 벤하르트의 시선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제온의 검격을 쫓는다. 그리고 벤하르트는 그 아득할 정도로 압축된 의식에서 오감을 초월한 움직임이라는 유려의 움직임보다도 더 정확하게 자신을 도려내는 제온의 공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으읏.."
살짝 상처를 입은 벤하르트는 가볍게 거리를 벌렸다.
제온은 거리를 벌리는 벤하르트를 쫓지 않았다.
'어째서?'
벤하르트는 자신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를 입었다는 것에 당황했지만, 상처는 깊지 않다. 분명히 '피하지 못했는데도' 그 제온이 이렇게 상처라고 부를 수도 없는 공격을 했다는 것이 그는 믿기지 않았다.
'단순한 실수인가?'
"섬풍."
고민할 틈도 없이 제온은 검기를 내뿜었다. 호흡마저 막아버리며 대상을 빨아들이는 보이지 않는 참격에 벤하르트는 기다렸다는 듯 검을 휘둘렀다.
"역용."
검기를 되돌려 버리는 비기. 그 제온 본인이 가감 없이 쏘아낸 검기는 그대로 제온에게 되돌려 졌다. 대상을 빨아들이며 베어버리는 강맹한 검기를 제온은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받아내었다.
"이건.. 제로의 기술인가."
옅은 상처지만 분명하게 제온은 팔에 검상을 입었다.
'옅어..'
벤하르트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제온은 다시는 검기를 방출하지 않을 것이다. 역용을 사용해서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은 단 한번뿐이다. 상대의 힘을 역이용 하는 기술이라는 것은 상대가 노려주지 않으면 이용하지 못하는 기술이기에 그는 두번 다시 같은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길 수 있다.'
아쉬운 표정 뒤에 고요하게 자신의 생각을 숨긴다. 아직 상대를 물어 뜯기 위한 송곳니는 남아있다.
벤하르트는 검을 다루는 자. 아무리 연철장의 손이 닿아 있는 명검이라고 할지라도 검은 검이다. 짧은 사이에 탐색으로 수천합을 겨루면서 벤하르트는 이미 그 틈을 찾았다. 연철장의 검은 평범한 검이 아니기에, 약점은 모래알보다도 더 작았지만, 벤하르트는 그 틈을 노릴 수 있었다.
'일섬 참도!'
분명 쉬지 않고 강맹하게 공격하고 있던 제온이 일순 검을 거두었다.
'어째서!?'
놀라는 벤하르트에게 제온은 언제나와 같은 여유가 묻어 나오는 얼굴로 말했다.
"검을 부술 생각이었나? 하지만, 그건 이미 '봤다'"
벤하르트는 알지 못하는 일이지만, 이미 제온은 한번 루크에게 검을 잃은 적이 있었다.
"한번 당했던 것을 두번 당하는 건 일류가 아니지."
제온은 연철장의 사람도 아니고 대장장이도 아니다. 아니 대장장이라 해도 검을 부수는 기술 같은 것을 알 리가 없다. 하지만 제온은 루크에게서 단 한번 본 것 만으로, 기술 자체의 호흡을 기억하고 있었다.
제온의 말을 듣고 벤하르트는 적어도 이 싸움에서 제온의 검을 부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만월참."
공간째로 소멸 시키는 제로나 카실러스도 사용할 수 있는 검기가 벤하르트를 두른다. 검기라고는 해도 공간째로 휘감기에 역용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 참도에 대한 경계인지 제온은 서서히 벤하르트의 동선을 깍아 내며 움직임을 제한했다. 어느 순간부턴가 신의 속도도 신의 힘도 사용하지 않고 그는 벤하르트에게 검을 휘둘렀다.
'어째서 사용하지 않는 거지?'
하지만 신의 속도도 힘도 사용하지 않는 제온의 검임에도 벤하르트는 그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어째서 방심하는 거지? 벤하르트."
"....."
대답하지 않는다. 피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좋다. 자신이 방심 했기에 제온에게 공격을 허용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 좋다. 상처는 옅다. 상대가 그렇게 방심하고 있을 때, 신의 힘이나 속도를 사용하지 않아도 자신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방심을 연기하며 상대의 방심을 이용하겠다.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백검!"
하늘에서 검의 비가 쏟아 진다.
"백인!"
백색의 빛은 사람으로 변한다. 수많은 벤하르트의 분신은 검을 들고 제온을 두른다. 사방을 가득 메운 다수의 벤하르트의 분신을 상대로도 제온의 투기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야말로 베는 자. 신검의 '검'이라는 명칭이 전혀 아깝지 않게 일합 일합 확실하게 제온은 벤하르트를 베어 넘긴다. 벤하르트의 분신들의 공격에 맞춰 벤하르트는 수비마저 버린 채 제온을 공격했다. 죽음을 아끼지 않는 벤하르트의 공격은 제온에게 점점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할 수 있...'
아주 잠시의 생각에 벤하르트의 허벅지가 베인다. 마치 '딴 생각을 하지 말라'고 제온이 질책하는 것만 같은 공격이었다.
"신월참."
한번의 휘두름에 벤하르트의 분신 셋이 그대로 소멸해 사라졌다. 공격력은 있지만 분신은 분신. 검술도 방어도 벤하르트 본인에 비하면 현저히 떨어진다. 고수라면 어설픈 인형의 움직임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공격 자체는 제온에게도 통용되기에, 제온도 마냥 분신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분신을 처리하는 제온의 움직임에 맞추어 재차 벤하르트는 공격을 시도했다. 순간 제온은 급격하게 속도를 올려 분신을 베어 넘기고 그대로 벤하르트에게도 상처를 입혔다.
'라 에르피도!'
상처는 옅었다.
'옅...어?'
뇌리에 불길함이 스친다. 유려의 움직임으로도 피할 수 없는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것이 제온이다. 그런 그가 몇번이고 피할 수 없는 일격을 가했는데도, 아직 큰 상처는 없었다. 첫번째는 실수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도 일어나지 않으라는 보장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처럼이나 수차례나 실수할 확률은 어느 정도나 될까? 제온이 과연 연거푸 실수할 그런 괴물이던가? 그랬다면 괴물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 설마...'
벤하르트는 제온의 상처를 보았다. 역용에 당하고 분신을 이용해서 몇차례 베어 넘긴 상처. 그런 그의 상처는 '벤하르트 본인보다 아주 약간 더한' 상처다.
"하 하하..."
순간 감정이 요동치며 허탈한 웃음이 절로 새어 나온다. 벤하르트는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했다. 순조롭게 '불리한 척' 제온을 이용하며 회심의 기술을 사용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실상은 그 반대였던 것이다.
'내 천륜요란을 대비했던 건가.'
불리한 척하면서 상처를 입는다. 막을 수 있음에도 '굳이' 유려의 움직임에 의지해 상처를 입어가며 제온보다 약한 자신이 '당연하게 불리해 지는 그림'을 만든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운명을 뒤집어 버린다. 일면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행위에는 그런 계획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제온은 이미 자신의 생각을 훤히 꿰고 있었던 것이다.
제온은 벤하르트에게 상처를 준 만큼, 자신도 '고의로' 상처를 입힌다. 이대로 공방을 계속해도 얻어 지는 것은 제온보다 조금 더 강한 자신이다. 설사 천륜요란을 사용한다 해도 뒤바꾸는 운명은 자신보다 더한 데미지를 입고 있는 자의 운명과의 교환이다.
"으아아아아아아!!"
벤하르트는 이 싸움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전부 보여주었다. 자신이 마지막까지 믿고 있었던 비장의 기술마저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안 벤하르트는 절규했다. 그야말로 제온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꼴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제온의 손에 놀아난 것을 알았다고 해도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다. 속에 새까맣게 그을린 잿더미밖에 남지 않았어도 벤하르트는 멈출 수 없다.
'눈치 챘는가.'
천륜요란은 확실히 훌륭한 기술이다. 상대가 자신보다 약한 사람이든 강한 사람이든, 불리한 운명을 교환해 강제로 천륜을 뒤바꾸는 그 기술은 그야말로 극치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해도,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아도, 타개할 수 있는 기술. 얼핏 약점이 없어 보이는 이 기술에도 파훼법이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상대보다 불리함을 유지하며 상대를 약화 시킨다.' 그럴 경우 천륜요란은 절대로 사용할 수 없다. 쓰는 순간 되려 상대를 도와주는 셈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파훼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방법조차도 스스로의 불리함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고, 불리함을 전제로 해야하는 시점에서 '파훼'와는 거리가 멀다할 수 있었지만, 그 수단을 사용하는 자가 제온이라면 그야말로 '완벽한 파훼'라 할 수 있다.
제온에게 벤하르트보다 조금 불리한 상황이란 것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제온이 천륜요란이라는 기술을 보지 못했다면, 이 싸움의 승부는 벤하르트가 가져갈 수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했다. 제온 본인조차 기술을 알지 못했다면 십중 팔구 벤하르트에게 졌을거라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천륜요란이라는 기술은 파격적인 기술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미 제온은 그 기술을 알고 있다. 비장의 기술이라는 것은 비장(祕藏)일 때, 그 가치가 가장 빛나는 법이다. 상대가 알지 못할 때야말로 비로소 비장의 기술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으아아아아아!!"
벤하르트는 방어를 완전히 버린 채, 제온에게 막무가내로 검을 휘둘렀다. 그 모습은 지금까지의 벤하르트가 맞나 의심될 정도로 처참했다. 벤하르트는 자신의 모든 감정을 터트리듯이 소리를 내지르며 미친사람처럼 엉망진창으로 검을 휘두른다. 하나부터 열까지 제온의 손에 놀아났다는 것을 깨달은 벤하르트는 절규했다.
레니아를 잃고 지금까지 쌓아 올린 자신의 모든 것이 원흉에게 송두리 째로 틀렸다고 부정 당하는 느낌이었다. 이미 벤하르트가 휘두르는 검은 검술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난잡했다.
그런 광기어린 벤하르트의 모습을 보면서도 제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침착하게 '상처를 내면서 상처를 받는다.'
'벤하르트..'
케이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무뚝뚝하게 자신의 말을 받으며,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절제 했던 그 벤하르트가 저기까지 감정을 드러내고 바닥까지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승부인 것이다.
그 벤하르트가 저기까지 모든 것을 내던지고 있음에도 포기하지 않는다. 벤하르트를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자신이 나서는 순간, 이 싸움은 승부가 아니게 된다.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승부기에 나서는 것 자체가 벤하르트에게는 실례나 다름 없었다.
천천히 제온은 벤하르트와 상처를 벌려 나간다. '불리함'에서 '유리함'으로.. 이미 제온도 벤하르트도 상처는 옅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휘둘렀다고는 해도 '천륜요란'이라는 비장의 기술이 있기에, 제온은 상처를 주면서도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천륜요란을 사용하는 자와 싸우는 '기본'인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서로가 약해진 지금 제온은 더는 고의로 상처를 받지 않았다. 불리함을 버리고 유리함을 취했다. 제온에게는 이제 설사 천륜요란으로 운명을 역전 시켜도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제온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벤하르트는 자신에게 되뇌인다.
'할 수 있어.. 불리한 만큼 역전 시켜주마.'
제온의 수준을 알고 자신을 알던 벤하르트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과거의 후회라는 망념에 모든 것을 먹힌 망자 뿐이다. 근거도 없이 희망만을 쫓는다.
"일섬 극의! 천륜요란!"
제대로 몸을 가누기 힘든 깊고 깊은 상처 끝에 그는 자신의 운명을 뒤집었다. 뒤바꾸었음에도 몸의 상태는 처참하기 그지 없다.
'무거워.. 하지만 제온은 더 무거울 거다. 죽어도.. 해야만 해. 하지 않으면 안돼.'
벤하르트와 제온은 이 싸움에 걸고 있는 무게가 달랐다. 제온에게 있어 이 싸움은 벤하르트의 의기를 받아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적에 대한 상찬이며, 인정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벤하르트는 달랐다. 그에게 있어 레니아는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 그가 레니아를 잃었을 때의 상실감과 자괴감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벤하르트에게 제온은 단순히 레니아와의 인연을 찢은 원인이 아니었다.
'언젠가 또 이 상실감을 느끼게 할 지도 모르는' 공포의 존재인 것이다. 벤하르트는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그때와 같은 상실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겨야만 했다. 자신이 내어줄 수 있는 거라면 모든 것을 내걸고서라도 여기서 제온을 꺽어야만 했다. 다시는 그때의 후회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아."
유리하다. 유리해야만 했다. 천륜요란이라는 기술은 그런 기술이다. 상대의 몰골은 자신보다도 심하다. 신의 속도니 힘이니 사용하지 못하는 것인지 사용하지도 않는다. 자신도 입은 상처가 있기에 압도적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어도 분명히 유리하다. 그래 이정도라면 분명 죽을 각오로 노력한다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벤하르트의 생각은 제온의 한차례 움직임에 산산히 부서져 내렸다.
종이 한장 차이로 벤하르트의 검은 제온을 빗겨 지나간다.
"유려...의 움..직임.."
벤하르트의 절망에 가득찬 한마디를 내뱉는다. 그 말에도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제온은 그대로 벤하르트를 양단했다. 오른쪽 어깨부터 시작해 대각으로 베어 넘겨진 벤하르트는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자신의 모든 것을 사용해도 닿지 않았다. 상대의 끝을 이끌어 내는 것 조차도 하지 못했다. 얻은 것은 무슨 수를 써도 제온을 이기지 못한다는 좌절감 뿐. 레니아를 지키지 못한, 그리고 지키지 못할 상실감이 가슴을 시리게 만든다.
'정말 전부를 사용했나?'
하나 의문이 스치고 지나간다. 속이 꿀렁 거린다.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다. 고통이란 고통은 전부 엄습해 오는 것 같다. 눈을 떠도 감아도 보이는 것은 온통 붉은색. 비릿한 녹슨 철의 냄새로 가득하다.
의식이 피에 젖는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신의 전부를 쓰기 전에는 이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그래.. 아직 남았어.'
그 '남았다는 게' 무엇인지 자각조차 하지 못한 무의식 중에 벤하르트는 생각한다. 평소였다면, 자각하는 순간 기각,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벤하르트는 이미 이성따위 단 한 줌도 남지 않았다.
방법이 남아 있다면 사용한다. 제온을 이길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한다. 다시는 잃고 싶지 않다면, 무슨 짓이든 해서 이겨야 한다. 그런 일차원적인 망념만이 벤하르트의 머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레니아..'
두번 다시 그때의 상실감은 느끼고 싶지 않은데도, 자꾸만 그의 머리는 그때의 기억으로 가득찼다. 이성은 한줌도 남지 않고 감성만이 폭주해 그는 의식을 피의 늪에 담갔다.
- 작가의말
어제가 제 생일이어서 생일빵으로 한 화를 올리려 했습니다만,
쓰다보니 끊을 수가 없어서 결국 날짜도 넘기고 분량도 2화 분량을 써버려서 앗싸리 지금 수정해서 올리게 되었네요.요즘은 생일만 되면 10년 전이 생각나네요. 10년 전 저는 제가 이렇게 될 거라고 전혀 상상하지 않았을 텐데... 라는 야리꾸리한 생각만 듭니다. 하아..아무튼 항상 감사하고 즐거운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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