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2부 37화(591화)-
호쉬르는 긴 작대기 하나를 들고 벤하르트에게 겨누었다. 벤하르트는 한눈에 그 작대기가 범상치 않은 무기라는 것을 간파했다. 주변의 분위기는 걱정 반 그리고 기대 반으로 이루어진듯 했다. 쉬에프 종족의 사이에서 벤하르트에게 해석을 해주었던 여인은 정신없이 뭐라고 떠들어대고 있었는데, 그 말이 무엇인지 벤하르트는 알지 못했지만, 결코 좋은 의도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게 이정도로 답답한 일일줄은.'
어느샌가 분위기는 벤하르트와 호쉬르가 싸우는 쪽으로 굳혀졌는지, 다들 흥미진진한 눈으로 그들의 싸움에 기대를 하고 있었다. 벤하르트가 무엇이라고 변명을 하거나 수습을 하기도 전에 이미 주변의 분위기는 싸우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어느 누구도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고, 믿었던 캐뱃 조차도 무언가 기대에 찬 눈으로 벤하르트를 보고 있었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호쉬르의 말은 벤하르트에게 전해지지 않았지만, 벤하르트는 그의 적의를 충분할정도로 느낄수 있었다. 그의 맹렬한 공격에 벤하르트는 허리춤의 검을 완벽하게 풀어 검집째로 검을 쥐어 들었다.
'얕보다니!'
바람처럼 움직이는 호쉬르의 움직임은 실로 대단했다. 쉬에프 마을의 최강자라는 명성에 걸맞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타고난 힘 속도 순발력은 발군이었다.
'대단하군.'
순수하게 벤하르트는 호쉬르의 움직임을 칭찬했다. 호쉬르는 분명히 벤하르트보다는 밑이었다. 벤하르트는 자신보다 떨어지는 상대에게는 어지간해서는 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호쉬르의 잠재력을 보았다. 호쉬르는 그대로 대성하게 되면 벤하르트 정도까지도 성장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쉬에프는 본디 근본이 요정족이었다. 요정들은 선천적으로 날래고 움직임이 빠르고 기를 운용하는 것이 능숙했다. 그중에서도 가끔 전투에 뛰어난 자질을 가진 자가 나오곤 하는데, 가렌더 부크의 요셉이 바로 그 예시라 할 수 있었다. 쉬에프 종족은 숲의 가호를 통해 '순환'하기 위해 스스로의 수명을 강제로 인간 수준으로 끌어 내렸기 때문에 100세 전후로 죽어 나가는 종족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수명이 바뀌었다고 한들 그들이 '요정'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한둘씩 정말 강한 쉬에프도 태어나곤 하는데, 그것이 바로 호쉬르였다.
벤하르트는 피할 수 없는 것은 검을 들어 막고 피할 수 있는 것은 종이 한장 차이로 피하며 호쉬르의 움직임에 응수했다.
"피하기만 하다니!"
싸움에 있어서 수비는 공격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다. 공격과 수비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나 다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격을 할때는 언제나 수비를 생각해야 하고 수비를 할 때는 공격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호쉬르는 벤하르트가 공격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눈치챘는지 수비를 버리고 서서히 공격을 늘려 나갔다. 거세게 퍼부어내는 공격은 폭풍과도 같았다.
마을 청년들은 약간 안색이 창백하게 호쉬르의 공격을 보았다. 한번씩은 전부 저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당했던 까닭이었다.
쉴새 없이 몰아치는 공격의 소용돌이 하지만 벤하르트는 맞지 않았다. 맞을듯 맞을듯 맞지 않았다. 손톱만큼만 옆으로 움직인다면 닿을수 있을 것 같은데, 닿지 않는다. 마치 그곳에 없는 환상이라도 노리는 듯 호쉬르의 공격은 허공을 가로 질렀다. 호쉬르는 점점 공격에 힘을 더 가져가고 있었다. 이윽고 수비를 완전히 버린 공격만을 추구하는 자세가 되었다.
'아..'
벤하르트의 검술을 바로 옆에서 지켜 보았던 캐뱃은 알 수 있었다. 벤하르트의 검술은 '허'를 찌르는 것에 극단적으로 특화 되어 있었다. 방어를 완벽하게 버린 호쉬르의 공격은 벤하르트에게는 빈틈 투성이나 다름 없었다. 그야말로 먹이감이나 다름 없는 그 빈틈을 벤하르트는 치지 않았다.
'어째서..?'
내심 그녀는 벤하르트가 이겨주기를 바랬다. 그녀가 호쉬르와 약혼을 하게 된 것은 부모의 강요 때문이었다. 캐뱃의 집안은 부족의 최강자와 약혼을 한 것에 만족스러워하고 있었지만, 캐뱃은 그렇지 않았다. 딱히 호쉬르가 싫은건 아니었다. 하지만 딱히 좋은 것도 아니었기에, 그녀의 마음은 호쉬르에 이르지 않고 있었다. 그 뜨끈 미지근한 마음과 약혼 때문에 그녀도 호쉬르와 결혼을 하려고 했었지만, 뜻밖에 벤하르트를 만나게 된 그녀는 벤하르트를 연모하는 감정이 생겨 버렸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그 여인'은 독처럼 파고 들었던 것이다.
'어째서 이기지 않는거지?'
벤하르트는 이기지 않았다. 승리는 목전 코앞이라는 것을 이미 많은 쉬에프들은 눈치 채고 있었다. 그 강맹한 공격이 벤하르트의 움직임에 하나하나 와해되어 '스치지도' 못했다. 당사자인 호쉬르는 미칠지경이었다.
호쉬르도 나름 강자에 속했다. 숲의 가호를 받는다면 강한 난적이라고 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만큼 그의 실력은 출중했다. 실력이 출중하다는 것은 '적의 실력' 또한 잘 알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호쉬르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전력'을 벤하르트는 '공격'하나 없이 무산시켰다. 자신에게는 벤하르트의 공격을 무산시킬 방법이 없었지만, 벤하르트는 공격을 취하지 않아도 자신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다.'
내지르는 작대기의 끝에는 언제나 공허한 감각 뿐이었다. 단 한방도 다다르지 못한다. 마치 허상과 싸우는듯 하지만 눈앞에는 언제나 벤하르트가 서 있었다. 호쉬르는 이를 물고 벤하르트에게 달려들었다.
'제발 닿아라..'
그는 간절히 바랬다. 바라고 또 바랬다. 얼굴의 자신감은 절망감으로 뒤바뀌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진심으로 캐뱃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에게 캐뱃은 단순한 약혼녀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한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이 벤하르트에게 희희낙락하며 춤을 배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쉬에프의 '최강자'라는 그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는가. 거기에 일은 커지고 커져 '캐뱃'을 건 싸움으로 번져 버렸다.
그는 후회했다. 한번 참았다면, 이 대결까지는 이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캐뱃'을 건 결투가 되지 않았을텐데, 하고 정신없이 작대를 휘두르며 생각했다. 치사하다고 해도 쓸개빠진 녀석이라고 매도를 당해도 캐뱃과 결혼할 수 있었다면, 그정도는 참을 수 있었을텐데, 지금에 와서는 그 사실을 지키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전력을 다해 그는 작대기를 휘둘렀다. 이미 형식이라고는 없는 형편없는 움직임이었다. 맞기는 커녕 스칠리도 만무한 공격 쉬에프의 최강자의 '그런 모습'을 어떤 이는 고소하다고 생각했고 어떤 이는 불쌍하다고 생각했으며, 어떤 이는 자신의 종족이 그정도로 유린 당하는 것이 모욕이라고도 생각했다.
'닿아줘 닿아다오.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닿아다오..'
그는 진심으로 캐뱃을 좋아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승부만큼은 질 수 없었다. 얼굴에는 절박함이 묻어 있었고, 손을 부들 거리면서 그는 생전 타인의 앞에서 내보인적이 없었던 눈물 마저도 보였다.
'왜.. 닿지 않는거지.. 어째서 한번 스칠수조차 없는건가. 그정도로 나와 저자가 실력이 차이가 난단 말인가!'
부족 최강의 남자. 그것 하나에 자부심을 가졌던 호쉬르는 자신의 여자와 최강의 힘 자신이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벤하르트로부터 부정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서 작대기를 휘둘렀다.
[푸욱]
기분나쁜 감각이 손 끝에 전해졌다.
"어?"
가장 먼저 놀란 것은 호쉬르였고, 그 뒤를 이어 캐뱃과 여인 쉬에프 종족들까지 그 상황을 이해했다. 마치 거짓말처럼 호쉬르의 작대기는 벤하르트의 옆구리를 관통하고 있었다.
"크윽.."
벤하르트는 흐느적 거리면서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졌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호쉬르는 자신의 작대기를 보았다. 이겼다라는 생각보다 더 먼저 든 의문이 있었다. '왜 저녀석은 '일부러' 이 승부에서 져 주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벤하르트가 진 것을 보고 캐뱃은 놀라며 그에게 다가갔다.
"어째서! 어째서 진거냐!"
그 모습을 호쉬르는 씁쓸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자 이로써 캐뱃을 손에 넣은 것은 호쉬르가 되었네요. 자 자 일단 벤하르트씨를 치료 해야 하니까, 다들 돌아가서 놀고 계세요."
활짝 웃으면서 여인은 상황을 정리 했다. 그녀는 쫑쫑 걸음으로 벤하르트에게 돌아왔다.
"후우.."
벤하르트는 찔린 배에서 나오는 피를 기로 틀어 막고 있었다. 하지만 호루탈 숲의 신의 나무로 만들어진 호쉬르의 무기의 상처는 생각보다 많이 깊었다.
"너라면 호쉬르를 분명히 이길 수 있었을텐데 어째서?"
"어째서? 캐뱃 나는 오히려 네게 묻고 싶은데, 너는 어째서 제대로 내 말을 통역 하지 않았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나, 한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너는 그때 거짓말을 했어."
"헛소리!"
"호쉬르라는 녀석은 네게 '진심'이었다. 내가 전하라고 했던대로 전했다면 그런식으로 '도박'을 할 남자가 아니었어. 그는 '그렇게'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거다."
벤하르트는 초인적인 실력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몸이었다. 상처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기를 두르고 강화하고 피하고 막는 것은 가능하지만, '상처'가 나면 결국은 '인간'의 범주에서 고통을 느끼게 된다. 리스가 반신이 날아가도 삽시간에 돌아오는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차이였다. 그는 충분히 피하거나 막거나 혹은 '기'로 방어할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기를 풀고 호쉬르에게 맞아 준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생각보다 거셌다.
"나는 놀아나는 것은 사절이야.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에 놀아나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 말하며 벤하르트는 여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나, 그렇게 보면 창피한데, 하지만 벤하르트씨 캐뱃도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뭐?"
"그도 그럴 것이 캐뱃은 그쪽을 '사랑'하게 되었으니까요. 호쉬르와는 약혼자지만, 이방인에게 사랑을 느껴버린 어린 소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 방법 뿐이었겠죠."
그제야 벤하르트도 사건이 어떤식으로 진행 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이니프!"
"그게 '사실'이잖아요? 캐뱃 한가지 말해두겠는데,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만 있다가는 절대로 마음은 손에 넣을 수 없어요."
캐뱃은 분한듯 고개를 떨구고 벤하르트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녀는 벤하르트에게 죄스러운 마음 뿐이었다.
"그래.. 그런건가. 하여간 나도 어지간히도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는군."
그는 꾸역꾸역 고통을 참아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읏.."
그는 심한 어지러움증을 느끼고, 그자리에 고꾸라져 버렸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여인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 작가의말
저도 계속 쓰고 싶습니다 (....)
그나저나 요즘 여행준비하랴 기타 등등 일이 많아서 급하게 쓰니 정리가 잘 안되네요. 후우,, 묶어서 조금씩 수정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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