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502화-라스펠(4)
수도 라스펠로 향하는 도중 벤하르트는 레니아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레니아 조금 신경 쓰이는게 있는데,"
"음 뭔데?"
"별것은 아니지만, 방금전 전투에서 약간 이상한점을 발견했거든."
"이상한점?"
"그래 방금전에 싸울때 알아차린건데, 마누어가 이전에 상대했던것보다 월등하게 강해졌어."
"강해졌다고?"
"그래. 사실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의 차이이기는 했지만, 여력을 남겨둔채 그정도의 실력이라는것은 확실히 지난번보다 강해졌다는것을 뜻하거든. 아무래도 숨겨진 실력은 그보다 더할텐데 그것이 이상한 일이거든. 우리와 싸웠을때는 그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레니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리가 없어. 그때는 그럴 이유도 그럴 여유도 없었으니까, 벤 네가 느낀게 확실하다면 아마 마누어의 진짜 실력은 이곳 라스펠에 있어야만 발현 되는것이었을거야."
"뭘 그렇게 둘이서 쑥덕 거려?"
"별일 아냐. 조금 궁금한게 있어서 말이지. 이봐 마누어."
벤하르트는 레니아가 방금 이야기했던것을 묻나 싶어 살짝 놀랐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것은 다른 질문이었다.
"라스펠에도 통치 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 왕같은?"
"없는것은 아니지만, 지상의 왕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통치를 하고 있지."
"어떤 방식인지 알수 있을까?"
"통치는 왕과 왕비 둘이서 하고 있지."
"둘?"
"아마 지상의 왕은 일인이 중심이 되어 통치하는 방식이겠지만, 이곳 라스펠은 다르지. 왕과 왕비 두 기둥으로 이 도시는 유지 되고 있지."
착찹한 심정이었지만, 그는 무엇인가라도 이야기를 해서 지금의 현실을 일시적이나마 잊어 버리고 싶었다.
"두사람이서 통치를 한다고?"
정치의 이야기는 익숙치 않은 레니아였지만, 그런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 지상과는 다르겠지. 왕과 왕비 둘에게서 나온 그 직계와 결혼하게 될 다른 한쪽의 여자가 대를 이어 통치하게 되지. 권력에 대한 다툼은 없지만, 있을수도 없는게 이 방식이지."
"무슨 뜻이지?"
"외적과 내적을 방비하는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뭐라고 생각하나?"
"글세."
"그건 압도적인 힘과 지식이지. 흔들리지 않는 기반이 되어 주는 힘과 그릇된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 지혜가 있다면 안에서도 밖에서도 적이 있을수 없는것이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간단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확실한 방법이겠네. 하지만 압도적인 힘이라니 어떻게?"
"이곳 라스펠에서는 힘을 계승 할수 있다. 대대로 왕이 될 남자는 무력을 계승 받게 되고 여왕이 될 여자는 마력을 전승 받게 되지. 왕과 왕비 이상가는 힘을 가진 사람은 라스펠이 생겨난 이래로 없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방식이네."
"압도적인 힘이라는건 알겠는데, 그렇다면 흔들리지 않는 지혜는 어디서 얻게 되지?"
"사실 라스펠의 시조는 여왕이었다고 한다. 그 여왕님은 오로지 라스펠을 위해서 평생을 바쳤다고 하지. 지금 라스펠에 관한 지상의 전설들과 형태는 그 여왕님이 만드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것과 지금의 이야기가 무슨 상관이 있는건데?"
"여왕이 될 사람에게만 특례적으로 그분의 인격이 계속해서 계승되게 되지. 실질적으로 통치를 하게 되는것은 왕비쪽이다. 물론 왕에게도 발언권은 있지. 하지만 왕도 왕비의 의견에는 불만을 가지지 않아. 왕비는 주도하지는 않지만, 왕의 의견을 검토하는 자로써 존재하고 있다. 그렇게 양쪽의 균형을 맞추는 제3의 존재가 바로 흔들리지 않는 지혜를 받쳐 주고 있는 것이다."
레니아는 물론이고 지상과는 전혀 다른 라스펠의 이야기에 다른 사람들도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곧 도착한다."
마을로부터 라스펠까지의 거리는 상당히 먼 편이었지만, 그들의 속도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비교할수도 없을정도였기 때문에 그 대화를 하는 도중에 라스펠에 도착할수 있었다.
라스펠은 하나의 도시처럼 생각되고 있었지만, 벤하르트는 그것이 하나의 작은 나라라고 생각했다. 지나 오면서 보았던 지금은 변모해 있는 수많은 마을들과 라스펠 그리고 마누어가 해준 이야기를 보면 천공의 도시 라스펠은 하나의 독자적인 나라라고 해도 무방했다. 아니 실제로 이곳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도시라고 칭하는것은 지상의 사람들이 멋대로 만들어낸 전설기에 지나지 않았다.
도시 라스펠은 거대한 오각형의 경계로 둘러져 있는 도시였다. 다른곳과는 다르게 순백색의 매끄러운 건축물은 지금까지의 광경과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거대한 벽 앞에서 마누어는 안도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이다."
무릎을 꿇고 마치 기도를 하는것 같은 그 자세에서 느껴지는것은 무한한 감사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들어가야 되는거지?"
"결계는 없는것 같은데, 잠시 기다려 줘."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마누어는 거대한 문을 따기 시작했다. 마법의 주문을 읊어내자 거대한 문은 조심스레 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을 연 눈 앞에 기다리고 있는것은 사람들의 따듯한 환영이 아닌 기괴하게 생긴 기계들의 공격이었다.
"뭐!?"
송곳같은 강철의 창이 마누어를 노리고 들어오는 것을 벤하르트는 사뿐하게 차서 밀어 주었다. 걷어 찬것에 지나지 않는 행위 였음에도 마누어는 부드럽게 착지할수 있었다.
"뭐.. 뭐.."
안심을 하게 되면 그런 바랬던 희망이 사라지게 되면 그만큼 충격도 큰 법이었다. 벤하르트의 도움에도 마누어는 쉽게 정신을 차릴수 없었다. 기계들은 벤하르트보다 곱절은 더 거대했다.
"저건 뭐지?"
벤하르트는 물론이거니와 레니아도 트레이야나 제네스도 그런 것은 본적이 없었다. 마수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 아니 결정적으로 살아있는것도 아닌 철의 괴물은 수를 헤아릴수 없을정도로 많이 라스펠을 좀먹고 있었다.
하얀 연기와 함께 증기의 소리가 들리고 기계의 배에서 한차례 빛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조심해!"
가장 먼저 알아차린것은 벤하르트였다. 몸을 던져 한차례 빛나는 광선을 피하고 그는 다리에 기를 집중해 힘껏 기계의 하체를 내리 찼다. 정확하게 이음새를 노린 그의 공격은 기계의 다리를 부숴 버렸고 기계는 더 일어나지 못하고 연신 광탄을 쏘아내었다. 어느샌가 달려온 제네스는 머리를 뭉개 그것을 정지시켰다.
벤하르트의 지식에 그런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벤하르트뿐 아니라 그자리에 있던 라스펠에 살았던 마누어와 그 부하들 조차도 지금의 상황과 그것의 정체를 알지는 못했다.
"수가 꽤 많은데,"
트레이야는 약간 난처해하면서 말했다. 그도 그럴것이 방금전의 광탄은 벤하르트가 아니면 저런 많은 수를 상대로는 피할수가 없었다. 제네스의 최면이 듣는다면 모를까, 그것조차도 듣지 않는 이 시점은 확실히 난처한 상황이라 할수 있었다.
또다시 쇄도하는 백색의 광선에 레니아는 마누어를 잡아 끌었다.
"뭘 멍하니 있는거야!"
"....."
멍한 상태로 마누어는 주변을 둘렀다. 어디에도 그가 기억하고 있었던 그가 지키고 싶었던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대한만큼 실망은 커지기 마련이었다. 마누어의 상태는 실망이라기 보다는 절망에 가까웠다.
"너희들!"
"예.."
"이녀석을 잘 간수해둬."
"알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들도 사실은 이 잔혹한 현실에서 달아나고 싶은 마음들 뿐이었다. 다만 그들의 경우는 마누어처럼 정신을 놓지 않았을뿐 뒤숭숭해서 마치 토할것만 같은 도저히 견딜수 없어 말로 형언할수 없는 그 기분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위험한데,"
벤하르트는 피할수는 있어도 확실하게 적을 제압할수 있는 공격력을 가지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트레이야나 제네스의 경우는 기계들을 방패로 삼아 몇체를 분해해 부수어 버리고 있었지만, 위험하긴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모두 달려!"
벤하르트의 외침에 레니아가 뒤를 이어 트레이야와 제네스 그리고 마누어 일행이 그 뒤를 쫓았다. 왼쪽에 고정 시켜둔 검에 맞닿은 손에서 백색의 빛이 일더니 전방으로 쇄도해 기계들을 쓸고 지나갔다. 그들은 길을 뚫어 내달렸다.
"저 광탄은 직접적인 살상능력은 강하지 않은것 같아. 집중하면 쇠망치로 얻어맞은 정도의 충격 정도인것 같은데,"
이미 일반인들은 즉사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정도의 공격력이었지만, 거리낌 없이 트레이야는 그렇게 말했다.
"그정도라고 한다면, 역시 위험하잖아."
"그렇지. 몇대 정도 맞게 되면 움직임이 멎을지도 몰라. 치명상은 아닐지라도 충격량은 엄청나니까 움직임이 먼저 멎어 버릴것 같아. 그나저나 왜이렇게 수가 많은거야!"
트레이야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벤하르트가 뚫어낸 길을 뛰었지만, 어느 순간에 그들은 수십에 달하는 기계들에게 둘러 쌓여 버렸다.
"으."
둘러 쌓였다 라는 것은 진형적으로는 최악의 상황이나 다름 없었다. 아군의 공격은 분산되고 적의 공격은 집중되기 가장 효율 좋은 진형이기 때문이었다. 아까와 같은 난전보다도 상황은 더욱 안좋았다. 위잉 거리는 진동 소리와 함께 가슴에서 빛나는 광탄을 보며 트레이야는 먼저 손을 쓰려고 했으나 레니아가 소리쳤다.
"가지마 트레이야 일단 모여."
일제히 발사되는 형형 색색의 빛의 광선들은 그들에게 쇄도 했지만, 그것을 레니아는 마법의 벽으로 막아냈다.
"대단해 레니아."
"칭찬은 고마워. 그나저나 이제 공격을."
레니아는 저 광탄이 발사 되기 전에 어느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시간이라고 해도 극히 미세한 차이였지만, 트레이야나 제네스라면 그 틈을 찌르는것은 손쉬운 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한차례 공격을 막고 반격을 할 생각이었다. 마법의 벽을 풀려고 했지만 레니아는 그럴수가 없었다.
"이것들이.."
1진 2진 3진으로 나누어 쉴틈없이 광선을 쏘아냈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마법 벽을 풀었다가는 못해도 수발은 맞고 시작해야 될 정도로 정밀하게 계산된 광선의 세례에 그녀는 당황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레 레니아."
벤하르트와 트레이야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레니아를 바라보았다.
"걱정 없어. 아직은.."
자신있게 말했지만, 레니아도 이 상황은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모두 움직일 준비를 해줘!"
어디선가 들려온 그 목소리에 마누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 목소리는?"
"그레스 홀드!"
회색의 빛이 주변을 덮는가 싶더니 주변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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