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2부 85화-시공(時空)(15)(644화)
공간을 이동하는 특유의 어지러움이 끝나고 벤하르트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여기는..?'
주변은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나무 한 그루 존재하지 않는 거친 땅에는 벤하르트만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아저씨는 또 다른 곳에 떨어져 버린 건가?'
벤하르트는 검을 뽑아 발판을 만들어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삭막하군.'
이 세계는 벤하르트의 세계나 카실러스의 세계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삭막했다.
'음?'
주변을 둘러 보던 벤하르트의 시선이 먼 곳에 머물렀다. 생명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한 황야로 가득한 세계에 무언가 튀는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 멀어서 벤하르트의 육안으로도 무엇인지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장소는 유달리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져 벤하르트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그대로 높은 곳에서 내려왔다.
'며칠은 내달려야 할 거리겠는데..'
벤하르트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 혼자라면 별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섣부르게 움직였다가는 케이슨과 동선이 꼬일 문제도 생기기 때문이다. 일전의 카실러스의 세계에서는 한 눈에 보이는 마을이라는 지표가 있었지만, 이 세계에는 눈에 띄는 지표도 없을 뿐더러 그 지표라고 생각할 이질적인 장소조차 작은 대륙을 횡단해야 할 정도의 거리니 적지 않게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레니아였다면 쉽게 해결할 수 있었겠지.'
작은 한숨을 내쉬고 벤하르트는 공중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거대한 백색의 덩어리는 공중에서 밝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케이슨 아저씨가 근처에 있다면 보고 와주시겠지.'
벤하르트는 그리 생각하고 마른 절벽에 등을 기댄 채 잠시 기다렸다. 곧 공중에서 기색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케이슨 아저씨? 아니.. 달라.'
케이슨이 공중으로 날아 왔다면 공중을 박차는 기색이 느껴져야 했을텐데 그런 기색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벤하르트는 살짝 마른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하늘을 바라 보았다.
공중에는 검은 날개를 파닥이는 푸른 피부의 무언가가 보였다.
'마족인가? 상당히 강해 보이는군."
벤하르트가 마족이라고 예상한 생물은 두리번 거리면서 주변을 살펴보는 듯했다. 벤하르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을 드러낸 벤하르트를 보고 마족은 놀란 얼굴을 하고 말했다.
"괴상한 빛이 나기에 와봤더니 아직도 이런 곳에 인간이 존재할 줄이야."
"어라?"
여기가 어디인지. 케이슨을 본 적은 있는지 한번 물어보려 모습을 드러낸 벤하르트였지만, 그는 이내 자신이 실수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체불명의 생물이 자신을 햐해 내뿜는 적의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물을 여지를 줄 것도 없이 마족은 벤하르트를 향해 손톱을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바람을 가르는 엄청난 속도의 공격이었지만 벤하르트는 한 발을 뒤로 하며 공격을 피해 버렸다.
"저기 잠시 대화를 할 수는 없습니까?"
"대화? 하하 목숨 구걸이라고 하고 싶은 거냐?"
마족은 자유롭게 공중을 누비며 아니꼽다는 듯한 눈초리로 벤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어떠한 정도 느껴지지 않는 역겨운 벌레를 보는 듯한 그 시선에 벤하르트는 조용히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에 마족은 다시 한번 벤하르트를 공격했다.
"안일해."
벤하르트는 작게 중얼거리고 검을 뽑아 그대로 직각으로 휘둘렀다. 카실러스에 의해 교정된 검술은 그대로 마족 여인의 날개를 잘라 버렸다.
"크으으으아.."
벤하르트에게 잘린 날개에서는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말도 안돼 인간이 어떻게 그런 실력을.. 서 설마 네가 그 이세계 용사!?"
마족 여인은 뒷걸음질치면서 질겁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가 어딘지 그리고 혹시 주변에서 인간을 본 일은 없는지 묻고 싶군요."
"이세계인! 역시 네가 바로 그 '용사'구나!"
"무슨.. 읏."
검은 여인은 그 말과 동시에 검은 형태를 취하며 벤하르트를 덮쳤다. 카실러스의 만월참처럼 공간째로 소멸시켜 버리는 공격이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벤하르트에게는 닿지 않았다.
"자폭.. 한건가? 그보다도 뭐지? 이세계 용사라는 건.."
마족 여인과 싸우고 난 뒤 한나절쯤을 기다린 벤하르트는 더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케이슨과 동선이 꼬일 걱정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정도 시간이 지났음에도 케이슨이 오지 않았는데 언제까지고 하염없이 케이슨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마족 여인이 소멸하면서 지형을 바꿔버린 결과물을 보며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눈여겨 보았던 장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오차율은 99%!? 이렇게 높을 수도 있는 건가? 년도는 +743년인가.. 이번에는 상당히 미래구만.'
가는 도중 벤하르트는 자신의 현재 시간대를 확인했다. 자신의 현재 시간보다는 700년이나 뒤. 카실러스의 세계와 비교하면 1500년이나 뒤인 어느 세계일 것이다.
벤하르트는 자신을 습격했던 마족 여인을 떠올렸다. 용사인지 뭔지는 뒤로해도 자신이 '이세계인'이라는 것을 그녀는 한눈에 알아봤다.
'뭔가 이곳 세계의 사람들이라면 하지 말았어야 할 행동을 한 건가?'
생각해도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레니아라면 이 작은 정보를 가지고 알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시간 여행을 시작한 뒤로 유달리 벤하르트는 레니아를 자주 떠올린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운이 좋았지.'
마족 여인은 강했다. 마계에서 마왕과 비교하면 한단계 정도 격이 떨어지는 정도였다고 생각했다. 마왕의 위세를 생각했을때, 그 강함은 결코 평범하다 할 수 없었다. 그 강함을 다루는 자가 마족 여인이었던 것이 벤하르트에게 있어서는 행운이었다. '방심하지 않거나' 혹은 '케이슨 수준의 기술'이 있었다면 벤하르트라 해도 쉽게 제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기에 저런 마족이 나.. 아니 인간을 노렸던 걸까.'
벤하르트는 달려서 목적지로 가는 것을 포기했다. 주변에는 생명이라고는 단 한 점도 존재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의 '죽어있는 땅' 이대로 목적지까지 달려간다면 상당한 시간을 굶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우.. 배운 것을 복습한다고 생각해 볼까?"
본래라면 이세계에서는 본연의 기술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이런 예외의 상황에서는 어쩔수가 없다고 자신을 타이르며 벤하르트는 자세를 취해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일섬 백봉."
거대한 백색의 새가 벤하르트의 앞에 나타났다. 카실러스의 가르침 덕에 벤하르트의 기술(氣術)의 효율은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좋아졌다. 형상을 만드는 것에는 상당한 체력을 소모했던 이전과는 다르게 백봉을 소환해도 그는 전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괜찮은걸."
만족스런 미소를 띠고 그는 백봉에 올라 타 누웠다. 여러 지형과 협곡을 건너야 하는 지상과는 다르게 공중이라면 그런 걱정 없이 빠르게 날아가는 게 가능했다.
"좋아. 이 속도라면 몇 시간 정도면 갈 수 있겠지."
백봉을 조율해 놓고 벤하르트는 백색의 푹신한 기 덩어리에 몸을 맡겼다.
한동안 백색의 새를 타고 날았던 벤하르트는 드디어 목적지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목적지를 보고 그는 어째서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장소는 살아 있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단순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고, 생명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이 황량한 세계에서는 단순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야 말로 가장 이질적인 풍경이었던 것이다.
"음..?"
그 목적지의 근처는 술렁이고 있었다. 하늘을 메운 날개 마족들의 무리는 인간을 사냥하고 있었다.
"뭐..."
비명소리와 함께 인간의 배가 꿰뚫리고 내장이 뽑히며 사지가 절단된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벤하르트가 간단하게 제압했던 것은 그저 그가 강했기 때문인 것이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단 한번의 공격으로 살점이 터져 나가고 잘 익은 고기를 뜯어대듯 뜯길 뿐이다. 아니 강자라고 해도 그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지옥같은 풍경 안에는 유달리 튀는 한 무리가 있었다.
'케이슨 아저씨!'
케이슨은 발에 빛을 두르고 한 합에 몇이나 되는 마족들을 소멸시키고 있었다. 방어를 완벽하게 무시하는 케이슨의 일격 앞에 마족들은 그저 힘쎄고 빠른 표적에 불과했다. 케이슨을 중심으로 몇몇의 사람들은 마족을 향해 저항하고 있었다.
벤하르트는 이를 물고 검을 뽑아 들고 날개 마족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카앗?"
마족들도 벤하르트를 감지하고는 벤하르트에게 달려들었지만, 빠르고 강맹한 움직임이 너무 아까울 정도로 그 움직임은 단순하기 짝이 없다. 한합을 스치고 지나간 사이 수십의 마족이 공중에서 베어 떨어져 내렸다. 그제서야 벤하르트는 마족 여인 뿐 아니라 이곳의 마족 전부가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베! 아니 에르니아!"
케이슨은 벤하르트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변의 청년에게 말했다.
"바보 같은 녀석들 어쩌자고 저런 괴물들을 상대로 도망을 치려 한건지. 이봐 에르니아가 온 지금이 기회야. 퇴각해야 한다고!"
"하지만.. 아직 사람들이."
"그럼 어서 그 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으란 말이다! 그게 안된다면 구하러 나온 무리들이라도 수습해야지!"
"네 알겠습니다."
케이슨과 대화한 남자도 상당한 고수였는지 재빠르게 이동하면서 흩어져서 살육당하는 사람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케이슨도 이리 저리 잔상을 남기면서 전의를 상실하고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노리는 마족들을 하나 하나 소멸시켰다.
"우 우우.."
케이슨과 벤하르트의 실력에 마족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 중 한 날개 마족이 기괴한 괴어를 말하기 시작했다.
'뭐지?'
기괴한 말. 벤하르트가 모를 뿐인게 아닌 근본적으로 언어가 아닌 것 같은 그 말에 벤하르트는 잠시 멈칫 거렸다.
"칠흑의 밤."
"서 설마."
벤하르트는 재빨리 백붕에서 멀어져 그대로 공중을 박차고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늦었다 인간."
하나 둘씩 공중을 가득 메우고 있던 마족들은 검은 덩어리가 되어 거대한 어둠으로 바뀌어 휘감았다. 지상에 있는 무리들과는 다르게 벤하르트는 사방에 포위되어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예의 그 자폭에서 벗어날 시간이 부족했다.
"늦기는!"
그 말과 동시에 한차례 광풍이 벤하르트에게 쇄도했다. 마치 형체를 이루고 있는 바람에 얻어 맞은 것처럼 벤하르트는 무서운 속도로 튕겨져 나갔다.
"우왓."
몸을 가눌 겨를도 없이 벤하르트는 자신을 메우려 하던 검은 소멸의 구체에서 벗어났다.
"크으.. 네 이놈 인간!!"
마족은 분한 듯 케이슨을 향해 외치며 그대로 스스로의 몸마저 거대한 검은 구체의 덩어리를 이루며 소멸해 버렸다. 케이슨은 발을 털면서 공중을 보며 말했다.
"음.. 설마 행성을 벗어날 정도로 날려 버린 건 아니겠지?"
"으아.. 멈추질 않아."
벤하르트는 공중에 기의 덩어리를 만들어 자신을 가로 막았다.
"으 그그그그.."
퉁겨져 나갔던 자신을 겨우겨우 수습한 그는 드높은 공중에서 별을 바라 보고는 오싹해 졌다. 자신이 온 이 세계는 문자 그대로 죽어가고 있었다. 보이기에는 그저 황량하기만 할 뿐인 땅은 너무도 쉽사리 벤하르트에게 '멸망'이라는 단어를 연상케 했다.
멍하니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말라 비틀어지게 만드는 광경을 보던 그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지상으로 내려갔다.
벤하르트는 공중을 퉁기면서 케이슨과 사람들이 있는 지상으로 사뿐히 내려왔다.
"휴. 너무 강하게 차서 이탈해 버렸나 걱정했다고."
"따지고 싶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었으면 죽었을테니 뭐라 하지도 못하겠네요."
주변의 참상은 참혹했다. 사지를 잃고 신음을 내지르는 사람부터 시작하여 몸의 형체도 남기지 않고 그저 고깃덩이가 되어 있는 시체에 이르기까지 벤하르트는 도저히 눈을 뜨고 주변을 볼 수 없었다.
"도대체 이건 무슨.."
"글세다. 내가 묻고 싶다 그건."
"여기 계셨군요. 두분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을 지킬 수 없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케이슨을 따르며 수습하던 남자가 감사를 표하며 말했다.
'이걸 지켰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벤하르트의 책임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지만, 눈앞의 참상은 순수한 감사조차도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참혹했다.
"저.. 두분을 저희 수장님이 뵙고 싶어 하십니다."
- 작가의말
공부를 하다가 하루가 끝날 무렵에 글을 끄적이고 자고 싶은데,
그게 참 쉽지가 않네요.전에도 그러했지만, 연참대전이니 뭐니 이런 족쇄 채찍질을 달아야 쓰는 게 저라는 인간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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