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2부 90화-시공(時空)(20)(649화)
붉은 혈기가 벤하르트의 몸을 휘감아 두른다.
"원의.. 흡혈귀."
제온의 표정이 굳는다. 항상 일관된 표정으로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는 제온에게는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이 상황은 제온에게 있어서도 최악이었다.
"죽인다.."
붉은 눈으로 벤하르트는 제온을 노려 본다. 그제야 제온은 벤하르트가 이 싸움에 걸고 있던 무게를 알아 차렸다. 제온은 자신이 격을 보여준다면 벤하르트가 절망을 느끼든 느끼지 않든 승부자체는 결착을 지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벤하르트가 이 싸움에 걸고 있던 무게는 그렇게 가벼운 게 아니었던 것이다.
'죽을지도.. 모르겠군.'
벤하르트에게는 내용으로도 결과로도 제온에게 참패를 당한 것처럼 여겨졌지만, 아오이스의 최강이라고 불리우는 제온도 절대 벤하르트를 쉽게 이긴 것은 아니었다. 천륜요란을 경계해 상처의 비율을 맞추어 빈사 직전의 벤하르트와 뒤바뀐 제온의 몸 상태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그 처참한 상태로도 벤하르트를 꺾을 수 있다고 그리 생각했지만, 아무리 제온이라고 해도 이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벤하르트가 리스의 피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예상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벤하르트가 가지고 있는 미약한 원의 흡혈귀의 힘에 자신을 내던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제온이 알고 있는 벤하르트는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
만약 벤하르트가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절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벤하르트 정도 되는 사람이 그 위험을 모를 리 없다. 알면서도 혹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부서져 있지 않았다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찰이로군.'
벤하르트라면 이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 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자신을 질타한다. 하지만 생각을 달리하면 이미 벤하르트라는 존재는 제온에게 있어, 대충 상대해도 좋을 만큼 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길 요인을 '갖추었기에' 이겼지만, '갖추지 못했다면' 졌을 것이다.
돌려서 말하면 이길 수 있는 요인을 갖추었음에도 제온이 이렇게 밖에 이기지 못할 정도로 벤하르트는 강한 것이다.
설령 벤하르트의 레니아를 향한 마음의 무게를 알았다고 해도 고의로 패배하는 선택을 하지 않는 이상 결과가 달라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제온에게 고의로 패배한다는 선택지가 있을 리 없는 고로, 지금의 이 상황은 어찌 보면 필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크아아아아아!"
이미 이성이라고는 한 톨도 남지 않은 벤하르트가 달려든다. 돌풍처럼 달려드는 벤하르트를 상대로 제온은 각오를 다잡고 검을 휘둘렀다. 붉은 궤적과 그 공격을 넘기는 은빛 섬광이 격돌한다.
그 격돌만으로 주변의 대기가 저린다.
벤하르트의 움직임은 제온의 신속만큼이나 빠르다. 신력만큼이나 강하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 궤적만이 잔재해 있었다.
'읏.'
검을 놀리는 제온의 표정이 변한다. 일합 일합 노림수가 쉽사리 통하지 않는다. 이성을 잃은 상태의 벤하르트라고 해도 유려의 움직임은 건재했다. 정상적인 상태로도 붙잡기 쉬운 움직임이 아닐진대, 지금의 제온은 이미 만신창이나 다름 없는 꼴이었기에 기회를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잡고자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각오가 필요하다.
한차례 벤하르트의 공격과 제온의 공격이 가로지르며 지나간다. 벤하르트의 팔은 제온의 팔을 짓뭉갰고, 제온도 벤하르트의 팔을 잘라낸다.
"만월참."
검은 원이 벤하르트를 두르려 하자 벤하르트는 발을 퉁겨 멀리 떨어졌다.
"과연.. '원의 흡혈귀'인가."
피로 얼룩진 왼팔을 늘어 뜨리며 제온은 쓴웃음 짓는다. 제온이 베어낸 벤하르트의 팔은 붉은 안개가 되어 언제 잘렸냐는 듯 벤하르트의 팔에 붙어 있었다.
원의 흡혈귀의 능력과 강함에 벤하르트의 기술이 얹혀진 것은 성가시다. 그나마도 이성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제온은 잠시 맞붙은 것만으로도 깨달았다. 지금의 벤하르트를 상대로는 만전의 자신이라 해도 불리할 지 모른다고..
그리고 그것이 뜻하는 바는 지금의 자신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벤하르트!"
'케이?'
한참의 공방에 나서지 못한 케이슨은 잠시 공방이 그치자 벤하르트에게 말을 걸었다. 벤하르트의 시선이 케이슨으로 향했다.
"진공섬."
제온은 검을 놀려 그대로 벤하르트에게 접근하려 하는 케이슨에게 휘둘렀다. 케이슨은 그대로 제온에게 당겨졌다.
"뭐하는 짓이냐?"
제온은 눈짓으로 케이슨이 있던 장소를 가리켰다. 케이슨이 서 있던 자리는 산산히 부서져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벤하르트가 주먹으로 내리 찍었던 것이다.
케이슨은 등골이 오싹해 졌다. 벤하르트의 상태가 이상하다고는 하지만, 설마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터라 제온과 싸울 때의 그 속도로 자신을 노렸다면 자칫 위험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멀쩡한 한 손으로 검을 휘두르자 주변의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다시 한번 제온이 검을 휘두르자 그 방향으로 검기의 덩어리가 쇄도했다. 이성을 잃은 벤하르트가 짐승처럼 그 검기를 향해 달려든 사이 그와 동시에 제온은 검을 집어 넣으며 말했다.
"잠깐 실례하겠다."
제온은 케이슨의 목덜미를 잡았다.
"라 에르피도."
제온의 손에 이끌려 케이슨은 제온과 함께 그대로 도시를 이탈했다. 실로 일순간에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제온은 벤하르트에게서 잠시 벗어나는 것을 성공했다.
"기를 숨겨라. 케이 너를 죽이고자 했을 정도로 이성을 잃었으니, 찾아내지는 못하겠지."
"어째서.. 벤하르트가 나를."
"지금의 벤하르트는 벤하르트가 아니다. 후우. 이미 승부고 뭐고의 영역을 벗어나 버렸군."
제온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무슨 소리지?"
"승부따윈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저건' 내가 상대하려던 마신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괴물이다. 도움을 받으려고 승부를 받아 들였지만, 이래서야 주객전도지."
"어이.. 벤하르트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 거겠지?"
"글세. 나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죽일 생각을 하고 있다만,"
"뭐라고!? 그럼 승부는?"
"말했을 텐데? 이미 승부는 의미가 없다고.. 벤하르트를 죽이는 쪽이 마신을 상대하는 것보다 몇배는 더 어렵다. 거기에 이 몸상태. 나라해도 목숨을 부지하기는 힘들겠지."
"웃기지 마! 벤하르트를 죽이게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냐?"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쩔거지? 벤하르트를 도와 나를 죽이기라도 할 건가? 그 뒤에 죽는 건 네놈이 될 거다. 다름아닌 저 벤하르트의 손으로 말이지. 케이. 네 입장에서는 내가 이기는 쪽이 더 나을텐데?"
케이슨은 주먹을 들어 제온에게 휘둘렀다. 제온은 그 공격을 종이 한장 차이로 피해 버렸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된 것은 다 네녀석이 쌓은 업보 때문이 아니냐?"
"뭐 틀리진 않군."
벤하르트가 저렇게 이성을 잃은 것은 결국 제온이 행한 일 때문이다.
"나는 설사 죽더라도 벤하르트가 죽는 것을 볼 수는 없어. 내가 쌓아 온 그간의 악행에 대한 대가를 여기서 친구의 아들을 살리는 데 사용한다고 각오하겠다."
자잘하게 쌓아 온 잘못이라는 족쇄에 케이슨은 제온에 대한 적의를 드러낸다.
"그런가. 하지만 벤하르트의 저건 나나 너 하나로 끝나지는 않을 거다. 역시 원의 흡혈귀. 이 작은 세계의 틈 정도는 벌써 집어 삼켜 버린 건가."
벤하르트의 포효 소리가 들려 온다. 실로 짐승 같은 그 소리와 날뛰는 소리 나름 떨어진 곳이지만, 케이슨도 그 이변을 눈치챌 수 있었다.
"저건 뭐냐."
"공간이 찢기고 있지. 여기 뿐이 아니다. 이곳이 찢기면, 마신이 있는 그 세계가 멸망하고, 마신이 있는 세계, 다음에는 다른 세계를 멸망 시키겠지. 저것이 자신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원의 흡혈귀의 말로다."
"젠장. 벤하르트 어째서. 단순한 승부로 끝내지 않은 거냐."
케이슨은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말했다.
"너는.. 어째서 목숨을 걸고 벤하르트를 죽이려 하는 거지? 본래의 시간대로 도망을 쳐도 되었을 텐데."
"내 손으로 일으킨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니까. 여기서 내가 돌아가 버리면 이 세계는 멸망하겠지. 이 시간대에서 벤하르트를 놓친다면 얼마나 많은 세계가 사라질 지 상상도 할 수 없다."
"네 입으로 할 이야기냐? 너는 벤하르트의 레니아도 그렇고, 우리 나라의 링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을 짓밟아 왔잖냐."
"링? 아아. 그렇군. 시간의 세례. 생명력을 태우는 기술을 사용하던 그 남자였나."
"그런 네 녀석이 책임을 지겠다니? 그게 무슨 개같은 소리냐?"
"조금 다르군. 그래 감당이다."
"뭐?"
"나는 내가 저지른 일들에 대한 감당을 한다. 너나 벤하르트에게 목숨을 위협 받아도 그건 마땅히 내가 감내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가 죽음이라고 해도.. 그건 자업자득인 것이다. 벤하르트가 저 지경이 되어서 세계를 멸망시키고 다니는 것이 내 목적이라면, 나는 그 상황에 대한 감내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그런 목적은 없어. 그렇기에 그저 나는 내가 벌려놓은 이 일을 내가 수습하고 싶은 것 뿐이다."
"어째 지금까지 벌인 일들이 원치 않았던 일이었다는 듯이 들리는 군."
"부정은 하지 않겠다만, 변명도 하지 않겠다. 너나 벤하르트는 나를 미워하면 된다. 그건 당연한 것이고, 나는 그것을 감내해야 할 입장이지. 그건 내게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해도 뒤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하..."
케이슨은 욕을 한 사발 내뱉었다. '무슨 사정이 있기는 한 모양이군.' 이라고 일순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짜증난다. '죽일 수 있다면 죽여봐라 당한다면 그때는 죽어줄 테니..'라고 말하는 듯한 저 떳떳함이 얄밉다. 그러면서도 그 진심이 느껴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짜증났다. 느낌으로 알 수 있다. 제온의 말은 케이슨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죽어주겠다. 라는 듯이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제온은 케이슨이 공격한다면 설사 그것이 부조리한 일이라고 해도 제온은 덤덤하게 그 상황을 받아 들일 것이다.
제온은 벤하르트나 케이슨에게 있어선 심플하게 악역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필시 벤하르트도 비슷한 심정을 느꼈겠지.'
가슴에 답답함이 쌓인다.
"한가지 벤하르트를 죽이지 않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뭐? 정말이냐?"
케이슨은 고개를 벌떡 들며 말했다.
"하지만 목숨을 걸어야 겠지. 나는 그래.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으니, 죽을 각오는 되어 있다. 하지만 케이. 너는 어떻지?"
"뭐가 어떻다는 거냐? 아까 말했을 텐데? 친구의 아들놈을 구하기 위해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한다고. 죽을 각오는 언제든 되어 있어."
"벤하르트와 싸우는 건 어떤가?"
"대련 정도라면 이전에도 많이 싸워 봤지."
"그런 각오라면 1분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거다. 벤하르트를 죽인다는 각오로 싸울 자신은 있나?"
"....."
"나와 공투하게 될텐데 그 부분은? 죽여도 시원찮은 나와 공투할 수 있겠나? 이건 네가 내개 목숨을 맡겨야 하는 일이다. 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도 불사할 각오가 되어 있나?"
"하지."
너무도 가볍게 케이슨이 말한다.
"그거면 벤하르트를 살릴 수 있는 거지? 저 상태를 해결할 수도 있을 거고?"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 전에 네가 죽을 수도."
"상관 없어. 그딴 건. 가능성이 희박해도 좋아. 그 가능성이 만분의 일이라고 해도, 방법이 있다면 쫓는다. 그게 벤하르트를 살리기 위한 목적이라면 개죽음이라 해도 웃으며 받아 들여 주지."
케이슨에게 벤하르트는 아주 잠시 만난 사이에 지나지 않는다. 인연이라고는 친구의 아들이라는 점 하나 뿐이다. 하지만 그걸로 좋다.
돌아갈 장소가 없는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 준 보답이든, 친구의 아들이든, 그냥 벤하르트라는 개인이 마음에 들었든, 이유따위는 가져다 붙히면 그만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도 나쁘진 않구만,'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게 없기에, 설사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인연일지라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다가 온다. 만약 케이슨에게 남아 있는 게 있었다면, 지금 이 순간 얼마나 목숨이 아까웠을까. 아무 것도 없기에 역설적으로 친구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행위가 두렵지 않다.
"각오는 된 모양이군. 케이."
"케이가 아니다. 케이슨이야."
목걸이를 풀며 케이슨이 말한다.
"그런가. 그럼 작전을 설명하지."
- 작가의말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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