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2부 86화-시공(時空)(16)(645화)
주변을 수습하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벤하르트와 케이슨은 남자를 따라 도시로 향했다. 도시는 얇은 커튼을 연상케 하는 무언가의 막으로 덮여 있었다.
'결계인가'
벤하르트도 본업은 대장장이라 칭하나 모험가. 한 눈에 그것이 결계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겉으로만 보기에는 옅어서 약해 보였지만, 보기와는 다르게 그 결계는 굉장히 강력하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케이슨 아저씨라면 쉽사리 부수겠지만, 내 경우에는 조금 힘드려나? 하긴 저 정도가 아니라면 밖의 저 강한 마족들을 상대로 인간이 버틸 수 있을 리 없겠지.'
묵직한 결계에 감탄하며 벤하르트는 도시의 안으로 들어갔다.
도시에 들어서자 벤하르트와 케이슨은 동시에 놀랐다.
"이건.."
밖에서 보기에는 굉장히 안정적인 것처럼 보였던 결계였지만, 도시의 내부에서 본 결계의 현실은 참담했다. 결계에는 무수히 많은 검은 금이 가 있었다. 도시의 전역을 뒤덮은 결계의 검은 상처는 흡사 하늘에 새겨진 것만 같았다. 그 상처는 마치 금방이라도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불안과 초조를 불러 일으켰다. 벤하르트와 케이슨과는 다르게 '이곳 사람'들은 결계가 부서진다는 것은 하늘이 무너진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거야 미쳐 버릴만도 하겠구만."
케이슨은 못마땅하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미쳐버리다뇨?"
벤하르트의 물음에 케이슨은 귀찮다는듯 손사래치며 말했다.
"너는 늦게와서 모르겠지만, 밖에서 죽은 녀석들은 이성을 잃고 있었거든."
"아.."
"말씀대로입니다. 자세한 것은 저희 수장님이 설명해 주실 겁니다."
남자를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큰 건물을 통해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 벤하르트의 케이슨은 수장의 방에 도착했다.
"이곳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두분만 들어가시면 됩니다."
벤하르트와 케이슨은 남자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이세계에서 온 이방인이시여."
그곳에는 누덕진 옷을 입고 있는 한 노인이 서 있었다. 풍성한 흰 수염과 눈썹은 각각 입과 눈을 뒤덮어서 순하고 인자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도시 사람들을 대신하여 이 늙은이가 감사의 인사를 하고자 이렇게 불렀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실례라뇨."
"그보다 지금 방금 우리를 이세계 사람이라고 확정 지은 이유부터 들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케이슨의 말에 수장은 눈썹을 까딱이며 말했다.
"아. 그렇군요. 확실히 의아해 하실만 하겠습니다. 그보다 먼저 통성명을 했으면 하는데,"
"에르니아라고 합니다,"
"케이..라고 합니다."
케이슨은 자신의 이름을 살짝 숨겨 말했다.
'응? 이름을 숨기시네?'
"저는 이 도시 아니 이 세계에 살아남은 마지막 인간조직의 수장 무드라고 합니다. 아까 어떻게 이세계에서 오셨는지 알았는가를 물으셨지요?"
케이슨을 보며 무드가 말했다.
"이유는 두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이미 이 세계에 우리 도시 외에 생존한 인간은 전무하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저희는 이미 이세계에서 온 용사님에게 여러차례 구원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림새도 여기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도 있습니다만,"
"이세계 용사?"
벤하르트는 자신을 습격해 자폭한 마족처럼 보이는 여인이 말한 단말마를 떠올렸다.
'분명 이세계인이라 말하며 날 용사라고 칭했었지.'
"뭔가 짐작가는 게 있으신지..?"
"음.."
벤하르트는 잠시 망설이다 도시에 도착하기 전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렇군요. 그건 그 라키스의 착각이었겠지요."
"라키스?"
"아 저희 세계에서 그 생명을 부르는 용어입니다. 에르니아님은 그대로 마족이라 부르셔도 좋습니다. 아니 애초에 라키스가 아니라 마족이겠지요. 에르니아님뿐 아니라 용사님도 그렇게 칭하신 것을 보면,"
"그 용사라는 게 뭡니까?"
"이야기 하자면 조금 길겠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이 에르니아 너무 다른 세계에 관심을 가지는 거 아니냐?"
"일단은 들어 보자구요."
"으음. 어째 이런 부분은 데인 녀석과 꼭 닮은 듯한.."
"저는 다른 세계를 겪어 보지 못했습니다만, 저희 세계는 다른 세계처럼 평범한 세계였다고 생각합니다. 어딘가에는 평화로웠고, 어딘가에는 사리사욕을 위한 전쟁으로 그득한 그야말로 인간이 사는 세상이었다고 이 늙은이는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묻고 싶습니다만, 다른 세계는 다릅니까?"
"별로 다를 바 없어. 세계라는 곳은 어딜가나 똑같지. 비단 인간뿐 아니라 마족이든 천족이든 하다못해 금수든 모두 같아."
벤하르트는 케이슨의 말에서 경험을 느낄 수 있었다. 케이슨의 본래 성격을 알지는 못하지만, 하찮은 잘못을 만들고 다니며 자신에게 짐을 짊게 만드는 그 행위도 따로 놓고 볼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우리 세계에 한차례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3년 전의 일입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바다가 갈리며 땅을 부수며 그것이 등장했습니다."
노인의 눈썹이 덜덜 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누가봐도 괴물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생명체였습니다만,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괴물은 스스로를 마신이라 칭하며 이 세계를 멸망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마신이라니.. 마계에서의 그 마신은 아니겠지..?'
"그 괴물은 자신을 마신 '라키아'라고 부르며 인간을 사냥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사냥이라기 보다는 청소라고 하는 게 옳겠군요. 라키아의 논리로는 우리 인간들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해충인 모양이니."
"그녀라고 칭한 걸 보니 그 괴물은 여자인 건가?"
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고 말했다.
"라키아는 자신의 분신들을 만들었습니다. 그것들을 우리들은 라키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최대한 라키아를 상대로 버티고자 했습니다만, 보시다시피 상대조차 되지 않는 게 현실이었죠.우리 인간의 모든 문명과 생명들은 그 괴물들 앞에서는 모래성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대로 철저하게 유린당하며 처참하게 죽어갔죠. 이미 밖에서 보셨겠지요."
무드의 가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 세계의 모든 게 황폐화되고 인간들에게 이 최후의 도시 피그마르가 남았을 때, 그 용사님이 나타났습니다."
"용사라. 나도 몇번은 그렇게 불리기도 했었지."
무언가 과거를 회상하는 케이슨을 뒤로하며 벤하르트는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요?"
"용사님은 우리 도시를 지키고 결계를 설치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결계 밖으로 나가 마신과 싸워 승리했지요."
"응? 그건 이상하잖습니까? 승리했다면 우리가 싸운 그건 뭡니까?"
케이슨이 물었다.
"하지만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습니다. 용사님이 말하길 마신은 평범하게는 죽일 수 없는 존재.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마신을 봉하는 것 뿐이라고 말하셨습니다. 때문에 봉인이 풀릴 때 다시 오겠다고 말하셨지요. 그렇게 이세계에서 온 용사님은 마신을 봉하고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셨지요."
"그 뒤로 소식이 없게 되고 마신의 봉인이 풀린 건가? 하긴 그 용사가 어떤 방법으로 시간을 넘나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 여행이라는 건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지."
케이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아서 결론지었지만, 그에 무드는 부인하며 말했다.
"아니 아니. 그 뒤로도 용사님은 오셨습니다."
"뭐라고요?"
놀라는 케이슨에게 무드는 약간 의아한 어조로 말했다.
"1년에 한 번. 결계를 보수하고 봉인이 풀린 마신을 다시 잡아 봉하는 것을 두번 해주셨지요. 그 모습은 우리에게는 희망 그 자체셨는데.."
"두번이나??"
"그리고 1년이 지나가는 이번에는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당연히 마신은 부활하기 시작했고, 이 세계에는 라키스들이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언제까지고 버텨줄 것이라 생각했던 결계마저 저 모양이 되었지요."
벤하르트는 하늘이 무너질 듯한 결계의 참상을 떠올렸다.
"결계가 저 모양이 된 이후로 사람들은 조금씩 미쳐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불안 때문인 작은 이변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 작다고 생각했던 불안의 싹은 사람들을 광기로 몰아 세웠지요."
"그리고 오늘의 일이 터졌다 이건가."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죽고 싶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데요. 어째서 결계 밖으로 나간 건지."
"라키스들은 바보니까요."
"네?"
"그것들은 우리 세계의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강한 힘을 가진 존재입니다만, 머리가 상당히 나쁩니다. 이곳에서 결계가 깨지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나가서 살 방법을 모색하는 게 낫다는 그런 비이성적인 생각을 한 것이겠지요. 사람은 미치게 되면 자신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판단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하니까요."
무드는 연이어 말했다.
"아마 에르니아님을 보고 용사라고 말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 추측되는군요. 아마 마신에게서 들은 정보로 용사는 이세계에서 왔으니 이세계에서 온 에르니아님은 용사일 것이다. 라는 1차원적인 생각을 한 게 아닌지.."
"확실히 그녀석들은 마족이라고 하기에는 머리가 굉장히 나빴지.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였어."
"그랬죠."
벤하르트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단신으로 마왕보다 한 수 정도 떨어질 뿐인 강함. 하지만 그 강함을 다루는 존재인 라키스들은 움직임이 너무나도 단순하고 둔했다. 충분히 더 빠르고 예리할 수 있는데도 그것을 생각하지 못해 행하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이 세계에서도 라키스는 잡을 수 있는 인간들이 존재하기는 하지요. 에르니아님와 케이님을 데리고 온 페이군 이라던가."
"아.. 그녀석은 꽤 쓸만 했지."
케이슨은 무드의 말에 맞장구 쳐 주었다.
"마계에서도 마왕의 수준보다 한 서너 단계 떨어지는 실력자 정도라면 쉽게 잡을 수 있겠죠."
"그래? 나는 마계의 상식은 잘 몰라서 뭐라 말하기 힘든데."
"하지만 그런 존재를 쉽게 뽑아내는 존재라고 한다면.."
벤하르트는 그 마신이라는 존재가 리스에 버금가는 존재는 아닐까 하는 불안을 품었다.
"뭐든 무슨 상관이야?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네? 아."
"도 도와 주실 수 없으십니까?"
무드는 멈칫 거리고 찔끔하며 당황했다. 그에 케이슨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보쇼. 수장양반. 이 무른 녀석이 선수를 치기 전에 내가 미리 이야기 하겠는데, 우리는 곧 떠날 사람입니다. 떠나기 직전까지 이 도시를 지키는 건 아마 당연한 것처럼 하게 되겠지. 거기에는 보답도 필요 없고, 아마 그쪽에서 하지 말라고 해도 돕겠지만, 그걸 넘은 문제에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어요. 댁이 어디까지 부탁할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신을 잡아달라느니 봉해달라느니 하는 부탁을 꺼낼 생각이라면 그건 목구멍 안에 담아두는 게 좋을겁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정해져 있으니.."
"하지만.. 그걸 어떻게든 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만의 사정이라는 게 있단 말입니다. 애시당초에 그 마신이라는 걸 우리가 잡을 수 있다는 보장은 있고요?"
벤하르트는 케이슨이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았다. 마신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없애면 필연적으로 거대한 운명을 바꾸게 된다. 본래 있었어야 할 운명이 '인류의 멸망'이었다면 그것을 뒤엎을 정도의 엄청난 사건. 그것은 단순한 여행자에 불과한 벤하르트가 건드릴 수 있는 영역을 현저히 넘어섰다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세계의 사람들이 멸망하는 것을 손 놓고 보아야만 하는 걸까?'
벤하르트의 표정을 보고 케이슨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어허. 섣부른 생각 하지 마. 에르니아. 이번에는 카실러스때처럼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야. 애초에 그 사건 자체가 만번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할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고."
"그걸 제발.."
"케이..ㅅ 아저씨."
케이슨은 벤하르트의 말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수장님! 수장님!"
벤하르트와 케이슨을 데리고 왔던 페이라고 불리운 남자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이세계 사람들 외에 들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분이 도착했단 말입니다."
"무 뭐라!? 그분? 서 설마."
"네! 용사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방금전까지만해도 벤하르트와 케이슨에게 무엇이라도 좋다며 구걸하고 있던 무드는 냅다 자리를 박차고 페이를 따라갔다.
"휴. 다행이군요."
"엉? 우릴 무시하고 저리 불티나게 나간 사람을 보고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케이슨 아저씨와 저는 이 세계를 구할 수 없지만, 그 용사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왔으니 적어도 이 세계는 구원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후우. 너는 세례를 받았다면 운명을 뒤집어 놓았을 상이었겠다."
"예?"
"뭐 됐다. 좋은게 좋은거지. 용사라는 놈이 와서 이 세계를 구한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여튼 벤하르트 오해는 하지 마라. 나라고 이 세계가 멸망하기를 바랬던 건 아니야."
"그런 오해는 안한다구요. 별 걸 다 걱정 하시는 군요?"
"흥. 어쨋든 그 용사인지 뭔지가 누군지 한번 보러 가보자."
벤하르트와 케이슨은 광장에 도착했다. 언제 죽을지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면서 활기를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한창 분위기 타고 있는 축제의 한복판에 들어선 것만 같아 보일 정도였다.
"대단하네요."
"그만큼 몰려 있었다는 거겠지. 결계도 수복된 모양이네."
"그렇네요."
밖이 황량하다는 것을 잊을 정도로 결계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은 따스럽기 짝이 없었다. 곱게 펴진 하늘의 결계의 감상을 끝내며 벤하르트는 이세계 용사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나저나 그 용사라는 사람은.."
"....."
"아저씨?"
케이슨은 느슨하게 흩어진 기를 갈무리 하며 차가운 얼굴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바로 곁에 있었던 벤하르트는 그 이변을 바로 알아차리고는 케이슨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벤하르트는 케이슨과 같이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환호를 받는 그 얼굴은 벤하르트가 잘 알고 있는..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제온..!"
- 작가의말
흐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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