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507화-이물(異物)(1)
뷩기르에 마을까지 가는 길은 의외로 순탄했다. 간간히 습격해 오는 무리들도 있었지만, 벤하르트의 일행들에게 통용될 정도의 능력은 아니었다. 벤하르트는 뷩기르에 마을이 어딘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지금 그들이 가는 방향이 뷩기르에 마을이라는것은 확신할수 있었다.
벤하르트가 제 7법을 사용하기 전 까지 여왕은 수도 라스펠 도시를 결계로 두르고 있었다. 때문에 기계병이 라스펠을 점령했어도 아직 주변이 기계의 영역화 되지는 않았던 것이었는데, 뷩기르에 마을로 향하는 길은 생체라고는 단 한점도 보이지 않을정도로 은백의 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라스펠의 전 지역이 기계화 되어 가고 있어도,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투박했다. 거대한 녹이 도시를 침범하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뷩기르에의 마을로 향하는 길은 그것과는 달랐다. 한없이 차갑지만, 잡티 하나 없는 은백으로 칠해진 길은 아름답다고 말할수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느낌이 오히려 불쾌했다.
그들은 뷩기르에 마을에 도착했다. 이미 원형이라고는 전혀 남아 있지 않은 뷩기르에 마을을 보고 자고왕은 고개를 떨구었다. 실질적인 통치에 대한 허가를 통해 통치하는 사람이 여왕이라 할지라도, 그도 어엿한 라스펠의 왕. 이런 일이 일어난것에 일말의 책임을 느끼지 않을리 없었다.
"여기가 뷩기르에.."
"그래. 여왕님의 말로는 아마 심층부로 향하는 입구가 있을거라고 하더군. 그 입구를 통해 가장 안쪽까지 가게 되면 그곳이 본체가 있는 곳이라고 하셨다."
"그래.. 쉽사리 보내줄 생각은 없는것 같군."
벤하르트의 말에 일동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무기를 챙겨들었다. 어둠속에서 날아오는 한차례의 섬광과 함께 전투는 시작되었다.
'더 강해졌다.'
라스펠을 점령하고 있었던 기계병들과 생김새는 같았지만, 그 정교함은 이전과는 비교할수도 없었다. 이전의 기계병이 한방을 쳐서 바로 제압할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의 기계병은 포석을 날리고 다음의 공격으로 끝을 내야 하는 수준까지 성장해 있었다. 일대일의 승부였다면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일지 모르나, 상대는 수십 수백에 달하는 수였기에 그 차이는 굉장히 껄끄러운 것이었다.
'그래. 이런 것이었구나.'
고작해야 몇번 싸우지도 않았는데, 이 짧은 사이에 이정도의 능력이 향상되었다. 전력을 다해 싸웠다면 그 뒷일을 감당할수 없다.
'레니아의 말이 맞겠어.'
이번에 자신들이 패하게 되고 여왕이 이 이물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비단 라스펠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멸망하는것도 터무니 없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것들 꽤 짜증나는데,"
아직은 여유있는 트레이야 였지만, 분명히 이전과의 차이를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벤. 저쪽으로 길을 뚫어줘."
레니아의 말을 듣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비켜줘."
벤하르트의 검은 흔들림이 없었다. 한 점으로 모인 백색의 검기는 이변없이 기계병들을 분쇄해 길을 만들었다.
"저쪽이야."
레니아의 말에 트레이야가 물었다.
"뭐? 그걸 어떻게 알아?"
"방금 싸우기 전에 주변을 살폈거든, 지키고 싶어 하는 곳이 눈에 띄더라고,"
그녀의 손에는 붉은색 마력이 팽창 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은백색의 벽을 향해 레니아는 붉은 번개를 쏘아 냈다. 그 벽은 흐물 거리는가 싶더니 레니아가 쏘아낸 붉은 마법과 섞여 소용돌이 처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공간으로 몸을 날렸다.
"의외인걸. 이런 멀쩡한 건물일거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는데,"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것을 제외하면 별로 특이할것도 없는 내부의 모습을 보고 레니아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레니아 대단한걸?"
"뭐 폼으로 여행을 다닌건 아니니까, 그리고 아마 내가 아니었어도 너희나 벤이 알아서 확인할수 있었을거야."
트레이야는 레니아의 말에 동의했지만, 실제로 그녀가 대단하다는것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물론 싸움이 계속되면 벤하르트나 자신이 그 변화를 알아차리기 위한 생각을 할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답을 도출해놓고 행동하는것은 정말로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때는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훌륭해."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쨋든 이곳이 그 이물이 머무는 곳이라는건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그런 방 같은 분위기인데,"
"저건 뭐지?"
일동은 마누어가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무언가 판 같은 곳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여러가지로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우리잖아."
"이거야 벤. 이건 우리들의 자료야. 이런 자료를 수집해서 이녀석은 자체적으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어. 모두 느꼈지? 방금전 기계병의 움직임을 이미 이녀석은 성장하고 있어. 서두르지 않으면 따라 잡히게 되겠지. 뭔가 친숙한 분위기가 난다고 생각했는데, 여긴 연구실 같은 분위기가 나는것 같아."
"그런가?"
레니아의 연구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모습이었는지라 벤하르트는 쉽게 공감하지 못했지만, 레니아의 의견 자체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서두르는게 좋겠군. 이곳의 심층부에 본체가 있다는 이야기는 좀더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일 테니까."
방을 넘어 그들은 지하로 내려갔다. 긴 통로와 큰 방등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공간 활용이었지만, 그들은 따로 놀라지는 않았다.
"신기하군 이정도로 내려오고 있는데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다니,"
자고왕은 이해할수 없다는듯 말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니?"
벤하르트는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공격하지 않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간단한건 아닐겁니다."
기계들은 기라는것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벤하르트는 뜻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공포나 초조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인간의 살기를 느끼는것처럼 '조심'하는 차원의 주의였지만, 그 육감을 느끼고 있는것은 현재로써는 벤하르트 뿐이었다.
"그렇겠지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을것은 사실일 것이네."
자고왕은 벤하르트가 그저 자신의 의견을 내세웠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한 층을 더 내려가자 무언가의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파악한것은 벤하르트였다.
'신음소리다. 기계의 음성이 아니야.'
"저쪽에서 신음소리가 들립니다."
그들은 벤하르트가 가리키는 곳으로 달렸다. 얼마 멀지 않은곳이라고 생각했지만, 몇개의 통로를 넘어야 했고, 도착했다.
그곳은 한마디로 사육장이었다.
"....."
정신없이 일을 하는 사람들 어떤 장치에 몸을 구속당한 사람들 액체 속에 갖혀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관할하는 기계병. 신음과 비명 절규어린 목소리는 아비규환의 상태를 말하고 있었지만, 감정이 없는 괴물들은 들은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 이자식들!"
마우너와 자고왕은 동시에 몸을 날려 기계병을 박살내버렸다. 적이 왔음에도 저항한번 하지 못하고 당하는 기계병들을 보고 벤하르트는 무엇인가 위화감을 느꼈다.
"레니아. 이곳은 아무래도 그 이물이라는 녀석이 관할하는 곳이겠지?"
"그렇겠지."
"그렇다면 우리가 이곳까지 도착한것도 알고 있을텐데 왜 저녀석들은 반응한번 하지 못하고 당해버린거지?"
그 말을 듣고 레니아도 살짝 표정이 변했다.
"마 마누어님!"
"자고님!"
쉴새 없이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자고왕과 마누어를 알아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다가 표정을 바꾸었다.
"조 조심하십시오."
"무슨 뜻이지? 이미 저 기계는 처리 했다."
"아니 아닙니다."
어두운 통로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 왔다. 기계병의 거친 발걸음이 아닌 분명 인간인 발걸음 소리에 방금까지 다행이라고 안심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갔다.
"누가 오는거냐!"
어둠속에서 그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너 너! 로이한!"
같은 12장군중 하나 사류에유 마을에 머무르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안됩니다. 마누어님 물러 서세요! 그자는 이미 로이한님이 아닙니다!"
로이한은 마누어를 향해 붉은 검을 휘둘렀다. 한발이라도 더 접근했다면 마누어의 목은 반토막이 나 버렸을 터였다.
"로이한!"
"침입자는 제거한다."
로이한은 붉은 검으로 정신없이 마누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본래 마누어와 로이한의 힘은 거의 같았지만, 마누어는 피하는것도 제대로 못할정도로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뭐 뭐지!?'
자고왕이 검을 휘두르자 로이한은 거리를 벌리고 섰다.
"조종.. 당하고 있는건가?"
'대단한 투기다.'
"조종이라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로이한의 말에 자고왕은 놀란 눈을 할수밖에 없었다.
"로이한 의식이 있는거냐!?"
"의식이야 있지요. 전 주인이셨던 자고왕. 하지만 당신의 말대로 저는 조종 당하고 있습니다. 조종인지 아닌지 이제는 잘 알지도 못하겠습니다만,"
"의식이 있다면 당장 그 길을 비켜라! 뭘 하고 있는거냐 너는!"
"자고왕. 저는 분명히 의식이 있습니다. '아마도' 조종당하고 있는것도 사실이겠지요. 하지만 제게 그것을 거역할 의지는 들지 않습니다. 아마도 미쳐버렸겠죠. 뇌부터가 말입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저는 제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데도, 어째서인지 잘 모르겠어요. 자고왕과 마누어 그리츠 너희들은 인간이기에 지금 인간의 편에 선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런데 이상해. 나는 도저히 지금 그 동질감을 느낄수가 없어. 이 기계편에 선것이 정답이고 너희들이 적인것이라는것에 거부감이 없어. 이상해 정말 이상해! 이상하다고! 너희들과 사람들과의 추억도 전부 존재하고 있는데, 라스펠의 12장군이라는것도 기억에 있는데! 나는 인간을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눈물을 흘릴것만 같았다. 감정도 기억도 전부 존재하는데도, 스스로의 감정을 믿을수가 없다. 감정대로 움직일수가 없었다. 인간은 인간이기에 연합하고 사회를 이루어 나간다. 그 안에 다른 이종이 참여할 틈 따위는 주지 않는다. 서로간에 편을 가르고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는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자 단점. 그리고 이물은 그 단점에 파고 들었다. 인간을 자신의 편에 서도록 만들었다.
"싸워야 합니다. 자고 왕.. 저는 이자들을 괴롭히는것도 죽이는것도 아무런 망설임이 없습니다. 머리로는 잘못이라는것을 알지만 그것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태연하게 괴롭히고 죽여 나가겠지요. 그리고 지금도 전력을 다해 당신들을 상대할 겁니다. 그러니,, 죽여주시죠!"
붉은 검은 자고왕에게 쇄도했다. 자고왕은 여유롭게 막고 역공을 취했다.
'움직임이 예전과는 다르군.'
자고왕은 라스펠에서 최강. 12장군인 로이한으로는 범접할수도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거진 호각에 가까운 상태로 싸우고 있었다. 자고왕이 본 실력을 내지 않았다고는 하나 그것을 감안해도 이전의 실력은 아득이 넘어선 상태 적어도 마누어로써는 전혀 감당할수 없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으아... 아아아!!"
'괴롭겠지.'
자고왕은 로이한이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올바르고 누구보다도 신념이 있었다. 죽을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목숨을 바쳐 싸웠다. 그런 남자가 이런 행동을 하려면 도대체 어느정도로 미쳐야 하는걸까."
"붉은 검 크리판 내가 주었던 검이로군."
'저건.'
누구보다도 검에 대해 잘 아는 벤하르트였기에 다음에 일어날 일을 짐작할수 있었다. 산산히 부서진 붉은검과 함께 한번의 섬격으로 로이한은 쓰러졌다.
"주 죽여... 줘.."
"알았다 곧 편하게 해주지."
"잠깐 기다려."
"음?"
제네스의 말에 로이한은 검을 멈추었다.
"이녀석의 세뇌 잠시만 조사해볼게 있다."
제네스는 로이한의 머리를 만졌다. 로이한은 순간 눈을 부릅뜨더니 제네스의 목을 노렸지만, 제네스는 여유롭게 제압해 한쪽 다리로 그의 팔을 엉망으로 구겨 짓눌렀다.
"크으윽."
"대단하군 이런식으로도 사용할수 있는건가.. 한낱 생물도 아닌 주제에 잘도 여기까지.."
"무슨 말을 하는건가!"
"어이 벤하르트 이녀석의 이곳의 안에 있는 것 파괴할수 있나?"
그는 귀에 있는 기계부터 시작해 머리통의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글세. 그런건 해본적이 없어서 자신은 없는데,"
"뭘 하려는거냐!!"
로이한은 극렬하게 발버둥을 쳤다.
"훌륭한 자기 보호다. 다음에 해야 할 일도 눈치 챌수 있겠군."
"그으으으윽"
제네스는 번개같이 손을 움직여 그의 귀를 강타했다. 한줌의 핏덩어리와 함께 펑 하는 작은 폭발이 일었다.
"자고왕 이라고 했나? 방금 이녀석을 죽이려고 했으니까, 죽었다고 생각하고 내게 맡겨 줬으면 하는데,"
- 작가의말
나눠서 올립니다. 원래 더 쓰려고 했는데, 시간이 모자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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