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2부 88화-시공(時空)(18)(647화)
"당신은 분명 이세계 용사라고 불리우던..?"
벤하르트는 이미 제온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모른 척 하며 말했다.
"이곳의 사람들이 멋대로 붙이긴 했지만, 여기선 그렇다고 해두는 게 편하겠군."
"그래 그 이세계 용사께서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신가?"
케이슨은 특유의 비꼬는 말투를 담아 제온에게 말했다.
"조금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시간을 내어줄 수 있을까?"
제온의 권유에 벤하르트는 살짝 망설이고 케이슨에게 물었다.
"아저씨 괜찮을까요?"
"나는 입장상 별로 얽히고 싶진 않지만, 결정은 네가 해라."
벤하르트는 잠시 생각했다. 벤하르트는 지금까지 수차례 아오이스와 부딪혀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필연적으로 부딪힐 것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에 아오이스의 최강이라는 제온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지금 제온의 이야기를 피할 수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결국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회피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잃는 것은 없지만, 얻는 것도 없다. 하지만 아오이스, 나아가 그 아오이스 내에서도 최강이라는 제온을 상대로 그런 안일한 태도로 좋은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아.'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사실상 레니아를 놓친 그 때의 일도 그만큼 적을 몰랐기에 벌어진 참사였다. 벤하르트뿐 아니라 레니아조차도 상대를 알지 못한 채 리스를 믿고 강행을 했기에 그 날의 일이 벌어진 만큼 상대에 대한 정보란 중요한 것이다.
눈앞에 있는 검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도 넘을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는 난적. 벤하르트는 여기서 제온과의 대면을 피한다면, 필시 나중에 후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설사 여기서 이야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시도를 하는 것으로 후회는 남기지 않을 수 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건 뭐지?"
"일단 자리를 옮기고 싶은데 괜찮을까?"
제온은 벤하르트와 케이슨에게 살짝 눈치를 주었다. 눈치를 주지 않았어도 이미 주변을 감시하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벤하르트나 케이슨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 무리들은 무드가 보낸 일행들이었다. 무드에게 있어 벤하르트와 케이슨은 둘째 치더라도 제온은 절대로 놓쳐서는 안되는 이 세계의 구원자였다. 실례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무드는 적어도 마신을 토벌할 때까지는 제온을 자신의 시야에 두고 싶어 했다.
"자리를 옳기는 건 괜찮지만, 어차피 이 도시 안은 무드 씨가 꽉 잡고 있을텐데.."
"도시가 아니다. 초면에 믿어 달라고 하는 건 조금 염치 없지만, 믿어 주겠나?"
사실상 벤하르트에게 제온이라는 존재는 원수에 가까웠기 때문에 벤하르트는 제온을 그다지 좋게 여기지 않았지만, 그는 제온이라면 영악한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온은 품에서 큐브를 꺼내들고 벤하르트와 케이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이 달리 저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제온은 큐브를 향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큐브가 번쩍이자 주변에 느껴지던 사람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주변의 외견은 달라진 게 없다. 제온과 만났던 도시의 변두리 골목길 그대로의 외견을 취하고 있었지만, 그 자리에 존재하는 사람은 벤하르트와 케이슨 그리고 제온뿐이었다.
"뭐 뭐지 여기는..?"
그들은 주변의 풍경은 무엇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그 외에는 모든 것이 다르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일전에 케이슨이 벤하르트를 돕기 위해 대기를 차서 이탈 당했을 때 느꼈던 멸망의 느낌이다. 그리고 벤하르트는 그와 비슷한 경험을 이미 한번 한 적이 있었다.
이 장소는 케이슨과 시공을 표류하기 전, 한번 겪었던 리스마저 사로잡혔던 망자의 무리들로 가득찼던 마굴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도 제온과 만났던가.'
"여기는 어디지?"
"이곳은 평행세계의 파편이다."
"평행세계의 파편?"
"아까 너희들이 있던 세계가 멸망한 평행세계가 있다면, 그 찌꺼기라고 할 수 있겠지. 존재했던 세계의 잔해만으로 구성된 가짜의 세계지."
제온의 설명은 들었지만 벤하르트는 정확히는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네가 이곳에 우리를 두고 나가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제온은 딱 잘라 말했다.
'내 정체도 모르면서 잘도 딱 잘라 말하는군.'
"그나저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 전에 서로 이름도 모르는 건 불편하니 통성명을 하도록 하지. 이세계 용사 같은 거추장 스러운 명칭으로 부르는 건 그쪽도 싫겠지? 나는 제온이라고 한다."
제온의 권유에 벤하르트와 케이슨은 살짝 눈치를 살피고는 말했다.
"나는 에르니아."
"나는 케이라고 한다."
"음?"
제온은 답지 않게 살짝 놀랐다.
"왜?"
"아니 아는 사람과 동명이기에, 하긴 그리 흔하지 않은 이름은 아닌가. 그래. 에르니아에 케이인가."
벤하르트는 제온이 언급한 사람이 K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는 입장에서 보면 어떤 의미로는 반갑게도 느껴지지만, K나 제온이나 그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존재들이었기에, 마냥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카실러스가 만들어 준 마도구는 굉장하군.'
제온조차도 눈앞에서 이야기 하는 게 자신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을 보고 벤하르트는 새삼스럽게 카실러스의 실력에 감탄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마신을 죽이는 것을 도와주지 않겠나?"
"마신을 죽이는 것을 도와달라고?"
"그래."
벤하르트는 살짝 가슴이 답답해 졌다.
"지금까지 마신을 홀로 해결해 왔을텐데, 이제와서 우리들에게 도움을 요구하는 이유가 뭐지?"
"해결하지 못했으니까다. 에르니아 네가 말하는 해결이라는 것은 이 세계에서 마신이 사라지는 것. 하지만 마신은 여전히 날뛰고 있지. 나는 마신을 죽이지 못했다."
'제온마저도 감당하지 못하는 건가?'
벤하르트는 리스를 상대하던 제온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리스에게도 물러서지 않던 제온이 한 발 물러서야 할 정도로 라키아라는 마신이 강하다는 사실에 그는 적잖게 놀라고 있었다.
"그 마신이라는 건 그렇게나 강한 건가?"
"아니.. 라키아는 마신치고는 그렇게 강한 존재는 아니다."
예상과는 다른 대답에 벤하르트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하지만 방금은 죽이지 못했다고.."
"그래 죽이지는 못했지. 썩어도 준치라고.. 강한 존재는 아니어도 마신은 마신. 홀로 죽이기에는 한발씩 부족하더군."
'따로 대행자들의 도움을 받지는 않는 건가?'
지나가던 표류 여행자인 벤하르트와 케이슨에게 권유할 정도라면, 아오이스의 대행자들의 힘을 빌린다면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도움이 있으면 마신을 죽일 수 있다고?"
"아마 충분하겠지."
벤하르트는 미간에 힘을 주었다. 이런 일이 아니라면 그가 제온을 도울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돕지 않기에는 눈앞에서 벌어진 참상이 잊혀지지 않았다. 문제는 설사 돕고 싶다고 해도 벤하르트는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어이. 뭘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는 거냐?"
보다 못한 케이슨이 나섰다.
"미안하지만, 이쪽도 사정이 있어서 손을 델 수가 없거든. 그쪽에서 이해를 해줬으면 하는데."
"그건 시공을 표류하고 있기 때문인가?"
"읏!"
제온의 말에 케이슨은 당황했다.
"그렇게 놀랄 것 없다. 이곳은 누구나 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니지. 올 수 있는 방법은 한정되어 있다. 내 방법을 택할 수 있는 자는 나뿐일테니, 남은 것은 시공을 넘나드는 사람들 뿐 정도겠지."
벤하르트는 카실러스의 말을 떠올렸다. 아는 사람에게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
"알고 있다면, 더 이상 권유해도 우리가 도울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그걸 모를 리가. 하지만 에르니아 너희들이 시공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권유하는 게 이상하다 생각되지는 않나?"
확실히 시공을 여행하는 사람을 알 정도라면 그들에게 부여된 규율이 무엇인지를 알텐데도 마신 토벌을 도와달라는 권유는 이상했다.
"이곳은 원본이며, 폐쇄된 세계다. 모든 시간과 공간이 연결된 세계의 섭리에서 벗어난 격리된 세계지. 너희들이 나를 도와 마신을 토벌한다고 해도 운명의 변동에 의한 책임을 지게 될 일은 없다. 이 세계의 운명은 이 세계가 중심이며 유일하니까."
벤하르트는 제온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케이슨은 놀라며 되물었다.
"그 말은 이 세계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는 이야긴가?"
"그렇다. 있는 것은 오직 현재 뿐."
"무슨 이야긴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우리가 도와도 시공을 비튼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는 이야긴가?"
"그래. 그렇다면 도와줄 건가?"
그 말을 들었을 때, 벤하르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가지 묻고 싶다. 너는 왜 이 세계를 구하려 하고 있지?"
"별다른 이유는 없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구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다."
벤하르트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답답한 이유를 알았다. 비단 벤하르트뿐 아니라 케이슨도 그 말에는 인상을 찌푸렸다. 구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구하려 한다. 하지만 벤하르트는 레니아와의 인연을, 케이슨은 도시와 자신의 걸었어야 할 인생을 잃었다.
비록 그것이 제온이 주도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도 원인의 한 축에 분명히 들어가 있었다. 자신들의 인생을 찢어놓은 원인이 이 세계를 구한다고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그들은 쉽게 수긍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가슴이 답답하다. 자신과 레니아를 찢은 아오이스는, 제온은 순수한 의미로 악이었으면 했다. 그쪽이 마음이 편했다. 제온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제온에 대한 이야기와, 지금 직접 마주하면서 벤하르트는 그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세치 혀를 가지고 사람을 농락하는 사람과는 다르다. 악행과 선행을 구분짓는다면 악행이든 선행이든, 자신이 책임을 가지고 행한다.
그러니 이 세계를 구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구한다는 저 말은 빈 말이 아닐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그 점이 너무 싫었다.
'차라리 카이후 같은 성격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벤하르트는 마음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하나 제안이 있다."
"뭐지?"
"나와 싸우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제온뿐 아니라, 케이슨도 당황하며 말했다.
"어이 에르니아 너 무슨."
벤하르트는 곧장 목걸이를 벗었다.
"벤..하르트?"
"이걸로 싸울 이유는 충분하겠지?"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냐?"
"괜찮아요. 아저씨. 제온이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여기서 일어난 일의 책임은 지지 않을테니까. 그렇지?"
"그래."
"하지만 그렇다고 저녀석과 싸우는 건."
"지금이 아니면 안되요. 제온이 홀로 이곳에 있는 이 때. 그리고 저를 죽이지 못하는 이 때야 말로 절호의 기회인 겁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제온. 네가 이기든 지든 나는 마신의 토벌을 돕겠다. 하지만 만약 내가 이겼을 때는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 겠어."
"과연.. 그렇기에 죽이지 못하는.. 인가."
마신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벤하르트의 힘이 필요하다. 토벌을 돕는다는 조건을 걸고 그것을 받을 경우, 필연적으로 제온은 벤하르트를 죽이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부탁은 내용에 따라겠군."
"그렇겠지."
세계를 구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구한다. 그런 적당한 생각으로 이런 거창한 일을 벌이고 있는 게 제온이라는 남자다.
'그렇다는 건 들어주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들어 줄 수도 있다는 이야기겠지.'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라면 거절해도 좋다. 그쪽은 네 양심을 믿도록 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벤하르트는 이길 경우에는 확실하게 '졌다'는 말을 하게 만들어 부탁을 강요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치사하다면 치사한 행위였으나, 제온이 상대라면 전혀 거리낄 게 없었다. 이보다 더한 속임수라도 할 수만 있다면 행했을 것이다.
"이기든 지든 나를 돕고, 이겨도 행동을 강제하지 않는다라.. 너무 형편 좋은 이야기로군."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너를 상대로 안전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일터."
그는 제온만은 피하라는 루크의 말을 떠올렸다. 실로 그 말대로 제온을 만났을 때, 벤하르트와 레니아의 여행은 끝을 고했다.
"벤하르트. 아마 내가 네 제안을 거절 했다 해도, 너는 이 세계를 구하려 들었겠지."
벤하르트는 순간 자신의 마음을 훤히 꿰뚫린 것만 같은 생각에 가슴이 철렁 거렸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그 의기, 무시하고 싶지는 않군."
'그래. 그런 인간일 거라고 생각했다.'
선인은 아니다. 그가 저질러 온 행동만 따지면 악인이라고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제온이지만, 그는 어딘지 정정당당했다. 모든 것을 밝히고 제안한다면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벤하르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좋다 받아주마."
제온은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을 뽑는 모습을 눈으로 뻔하게 보고 있음에도 그 절제된 움직임에 벤하르트는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여기서.. 잡는다!'
"와라. <신검>의 힘. 보여주도록 하지."
- 작가의말
이번 화는 금요일에 작성이 끝났었는데,
보니 너무나도 마음에 안들어서 지우고 다시 쓰고또 지우고 다시 쓰고를 반복..오늘에야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수정 전보다는 마음에 드는 것 같네요.분명 좋은 주말 되세요. 라는 코멘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지금에야 올리게 되었는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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