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2부 56화(614화)-왜억(孬憶)(1)
"사 살려줘!"
병사의 차림을 한 남자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서서히 다가오는 그럼에도 뿌리칠수 없는 기척이 그를 뒤쫓고 있었다.
"괴 괴물놈이.."
등의 상처가 욱신 거리는 것을 느꼈을때 가차 없는 일섬에 그의 목은 떨어져 내렸다.
"이게.. 뭐지..?"
벤하르트는 붕 떠 있는 듯한 감각 속에서 영문도 모른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병사가 죽는 것을 보고 그는 병사를 죽인 자의 얼굴을 살펴 보려 했으나 도저히 누군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뿌옇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는 검을 들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벤하르트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회색의 공간 마치 가렌더 부크로 향할때의 이계를 보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삭막하기 짝이 없는 멈춰진 시간의 세계 속에서 벤하르트는 그를 따라갔다.
그 순간 소용돌이처럼 휘몰아 쳐 세계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읏.. 도대체 이건..'
다시 장면이 바뀌는가 싶더니 그는 한 마을에 서 있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색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 색은 전체적으로 붉은 느낌이었다.
"어..."
벤하르트는 그 곳을 보고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본 적이 있었어.. 여기는.. 그래.. 그거다."
벤하르트는 천공의 섬 라스펠에서 보았던 경험을 떠올렸다. 그 날 정보의 보고를 통해서 보았던 자신의 기억. 아직 마을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 장소는 분명 그가 보았던 그 붉은 언덕의 경치였다.
"노을.."
붉게 물들어 가는 노을 그리고 그는 이후 일어날 일을 예감했다.
"안돼."
헐레벌떡 그는 마을로 가서 사람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은 허공을 가로 질렀다. 투과 되는 자신의 손을 보고 그는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그는 그 허상의 세계를 부수기 위해서 바로 검을 들어 허공에 휘둘렀지만, 검은 그저 허공을 허무하게 갈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완연한 노을이 마을에 드리웠을때 그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마을에 발을 들이 밀었다. 그리고 친절하게 말을 건네는 마을 사람을 그대로 양단했다. 삽시간에 마을은 소란 스러워졌고, 마을사람들중 건장한 청년들은 저마다 무기를 들고 싸울 태세를 갖추 남자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일개 평범한 마을사람에 불과한 그들이 싸우기에 남자는 너무도 강했다. 제대로 손 한번 써보지도 못한채 마을사람들은 그의 검 앞에 처참하게 목숨을 잃어갔다. 싸움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죽고 난 뒤에 남자가 한 일은 도망치는 마을사람들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어린아이 부터 여자 노인에 이르러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사람도 놓치지 않고 그는 죽이고 또 죽였다. 그의 검에 자비란 없었고 망설임조차도 없었다. 그 죽이는 과정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마치 기계처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듯 보였다. 평화로웠던 마을이 피로 물든 붉은 폐허로 변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해야 한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아비규환의 지옥같은 광경속에서 남자는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말을 묵살한채 마을 사람들을 문자 그대로 남김없이 말살시켜 버렸다.
단 한사람도 남기지 않고 일방적인 살육을 저지른 남자는 쓸쓸하게 느껴지는 걸음으로 붉은 언덕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벤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읏.."
벤하르트는 주변을 둘러 보고 그 남자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깨달은 그 순간 벤하르트는 인식할 수 없었던 그의 얼굴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벤하르트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싹 가셨다. 그 무지막지한 살육을 저지른 사람은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속에서 들끓는 듯한 느낌과 함께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우웩.."
헛구역질을 하면서 그는 일전에 자신이 피를 토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래... 그때 나의 모습을 한 '그것'이 했던 말.. 그것은..'
그는 라스펠의 정보의 보고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자가 하는 말을 떠올렸다. 그 당시에는 입모양 밖에 보지 못했고, 그것 하나만으로 의미조차 알지 못한채, 그는 하루동안이나 피를 뿜고 최악의 몸상태가 되어야만 했지만, 그는 지금에 와서 그 때 중얼거렸던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너는... 나자신이다.'
그때 그는 말하고 있었다 그 피로 얼룩진 언덕의 한때는 마을이었으나 이제는 마을이라고 부를 수 없는 곳의 언덕 위에서 그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벤하르트는 언덕 위의 또다른 자신. 지금의 자신보다 조금 더 젊어 보이는 청년의 벤하르트를 노려보았다.
"눈빛을 보니 어느정도 눈치는 챈 모양인가.."
"너는.. 나 자신인건가?"
"....."
"어째서.. 내가 이런 짓을.. 아니 그 이전에 너는 뭐지?"
"글세. 어느것 하나 명쾌하게 대답할 수는 없겠군. 아니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정확할까?"
벤하르트의 모습을 한 청년은 씁쓸한 표정으로 벤하르트를 보며 중얼거렸다.
"악질적인 장난이로군."
"뭐가 말이지?"
벤하르트의 물음에 아랑곳 하지 않고 벤하르트의 청년 모습을 하고 있는 남자는 또다시 혼잣말로 중얼 거렸다.
"후우. 네가 이 기억을 더듬게 되었다는건, 이 일은 아오이스와 관계 있다는 이야기인가.."
"도대체 소리를 하고 있는거냐?"
"벤하르트 네가 이 기억을 보게 된 것은 이 기억이 너에게 있어서 가장 충격적이고 보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기 때문이다. 즉 네가 지금 걸린 주박은 바로 그런 것을 만들어내는 환상이라는 것이지. 누군가의 취미가 생각나는 방식이로군."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거냐.. 그것보다.. 기억..? 기억이라니, 이게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건가?"
"....."
청년 벤하르트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네가 알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단 한가지다."
그는 똑바로 벤하르트를 응시하면서 말했다.
"나는 너.. 즉 너는 나 자신이라는 말이다."
청년 벤하르트는 피로 얼룩진 손으로 벤하르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웃기지 마! 나는 너와는 달라!"
"그런가.."
처음으로 청년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네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것이겠지. 너와 나는 다르다. 그걸로 좋다면야 나도 불만은 없다. 그런것보다 네게 중요한 것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이 공간에 대해서 설명을 조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 너는 지금 주술의 주박에 빠져 있다. 아마도 그 주술의 내용은 '자신이 일생을 살면서 겪었던 가장 보기 싫었던 추억 일 사건 삶과 같은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었을 거다."
기억이나 추억이라고까지 말하는 청년 벤하르트의 말을 벤하르트는 그냥 넘길수만은 없었다.
"잠깐.."
하지만 그런 벤하르트의 말은 청년 벤하르트의 말에 단칼에 잘려버렸다.
"들어."
여지를 남기지 않는 그의 말에 벤하르트는 더 추궁하지 못했다.
"네가 지금 여기서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내 기억은 다름 아닌 네 기억이다만, 이쪽이 지키고 있는 기억의 틈을 네가 읽는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이지. 그런 의미에서 네가 아까 말한 너와 나는 다르다라는 것도 별로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해도 좋아. 요약하자면 너는 특수한 경우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어떤 자라고 해도 이 주술에 걸리게 되면 끝없이 고통스러운 보고 싶지 않았던 경험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혹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없나?"
"....."
"있는 모양이로군.. 지금의 너조차도 이렇게 쉽게 걸려 드는 주술이다. 아마 어떤 자라고 해도 이 주술을 회피하는 것은 쉽지 않을터, 거기에 한번 걸리고 나면, 헤어나올수 없는 뼈아픈 기억을 보여 주게 되는 무한지옥인 것이다. 당한 자는 자신이 주술에 걸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채 끊임없이 고통속에서 헤메게 되겠지. 그것을 해주하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아니면 벗어날 수 없어."
"나를 도와준건가?"
"본의 아니게 다만,"
"도대체 너는 뭐지?"
"말했을텐데? 네가 생각하고 싶은대로, 그것이 나의 정체다."
그 말에 벤하르트는 눈앞의 자신을 보면서 묻고 싶은 것도 따지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눈 앞의 자신은 자신이 정말로 묻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좋아. 이곳을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되지?"
"정신동조.. 아마도 지금의 네가 이렇게 쉽게 걸려들었다는 것은 네가 지금 속해 있는 공간은 타인의 정신에 침식하기 쉬운 공간이라는 것이겠지. '이 곳'에 네가 들어온 것을 보면 알다시피 말야. 그 말은 달리 말하면 너 자신도 타인의 정신에 관여 하기 쉽다는 이야기가 된다. 자.."
청년이 신호하자 벤하르트는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으로 타인에게 동조해서 '네가' 지금의 나처럼 구해주는 수 밖에 없다."
"어째서 나를 도와주는거지?"
"어째서라고 한다면, 내 입장에서는 네가 나이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이야기 할 수 없겠지."
"나는..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아.. 절대로.."
"그래. 그렇겠지. '당연한거다.' 네가 그렇게 주장한다면 나도 억지를 부리고 싶지는 않아. 나는 네가 아니다. 이 기억도 네 기억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너를 구한 이유는 네가 나이기 때문이다. 그것뿐이야."
"그건 모순이다."
"그래 그 '모순'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닫는 것은 네 몫이다. 깨닫는 것도 깨닫지 않는 것도 네 자유이기도 하지."
"네가 나라면 어째서 이런 짓을 저지른 거지? 이유가 있다면 시원하게 말을 해보라고!"
청년 벤하르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없어. 하지만 벤하르트 원한다면 찾아 봐라..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를,, 지금 네가 여기서 본 것은 분명 어느 한때 일어났던 현실. 허상의 세계라고는 하나 이것은 전부 '내'가 저지른 일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나는 어떤 것도 말 할수 없어. 내가 주장할 수 있는건 '너는 나 자신이다.' 라는 것. 이 말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그것은 네 자유이며 그것은 진실이다. 어느쪽이든 말이지."
"그게 무슨 소리냐고!"
"자.. 작별이다. 아마 다시는 만날 수 없을테지만, 뭐.. 운이 나쁘면 한번 정도는 보게 되려나? 아 참고로 밖으로 나가게 되면 명심해라.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그것에는 '아오이스'가 관련 되어 있다는 것을 말야. 루크형님이 일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리는 없을테니, 연관된건 나 스스로인건가?"
벤하르트는 뻐끔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미 몸의 형상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 세계에서 사라지기 직전 벤하르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쓸쓸하디 쓸쓸한 자신의 얼굴 뿐이었다.
"후우.. 잘도 자라 주셨군. 하여간 나라는 녀석도 악운에는 어지간히도 강한 모양이야.. 그러고 보면 언젠가 '두어번' 이곳의 문 앞에 들렀던 여인들이 있었던가.."
재생되는 기억의 파편. 살육의 광경을 보며 그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정신이 날아가 버릴 듯한 다시는 보기 싫은 그 기억들 하지만 그가 가진 것은 '그 세계'뿐이었다. 그것이 정신을 갉아 먹는 무한지옥과 같은 것이라고 할 지라도 그에게 있어서는 견디지 않으면 안 될 장소일 뿐이었다.
살려달라고 아우성 치는 여인의 목에 검을 찔러 넣는 것을 보며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나는 벤하르트고,, 벤하르트는 나... 그래.. 그렇겠지.. 그렇다고,, 나는 믿어도 되는 것이겠지?"
끝도 없을 정도의 고독함을 느끼며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작가의말
벤하르트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
이제부터 슬슬 풀어 나갈 이야기들중에 하나입니다.
시험 기간때문에 못쓰다가 얼마전에 끝내고 이렇게 소설을 써 올립니다.
자꾸 노트북 키보드가 안눌려서,, 오타가 날 지도 모르겠네요..
묘사가 제대로 되었는지 의문이네요..
제가 생각한 것을 독자님들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워낙 추상적이게 제멋대로 휘갈겨 버린 듯한 느낌이라 조금 뭣하네요..
참고로 벤하르트가 중간에 떠올린 기억은 라스펠에서 자신의 기억을 뒤졌을때 피를 토하면서 괴로워 했던 그 때의 일입니다.
그나저나 게으름병이 도져서 한동안 소설을 못썼는데,(시험이 있던 것과는 별개로 끝내고도 적지 못했다는게,)
이제 곧 연참대전이니 조금 힘내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Commen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