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1화-프롤로그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느 한 겨울 노시엘트의 산속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길을 걷고 있었다.
"....."
그가 원하는 것은 '죽을 곳'을 찾는것이었다. 그의 나이는 올해로 96세. 얼굴에는 온갖가지 주름이 씌여 있었고 온몸은 깡마르기 그지 없어 그 어떤 누가 보더라도 한번쯤 얼굴을 찡그리며 동정어린 시선을 보낼만큼 그의 얼굴은 끔직했다.
살면서 96세가 될 때까지 그에게는 진실된 행복이란 없었다. 적어도 그는 자신에게 진정한 행복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불행하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다. 그는 반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살았던 서쪽의 도시 라프티에서 대장장이의 일을 하면서 자신이 먹고 살 만큼의 충분한 돈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애에는 결함이 있었다. 그는 어느 누구와도 접점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괴롭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일생을 보내 왔다.
친구도 아내도 자식도 이웃조차도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고립된 마음으로 누군가에 부탁이나 명령에 무기나 도구를 만들어 주는 기계와도 같은 삶을 살아 왔던 것이다.
그런 그가 죽을 곳을 찾는 것은 한가지 변덕 때문이었다.
어니스력 9999년. 나약한 몸뚱이와 생애 마지막으로 제련한 검 한자루를 지닌 노인은 이 만년을 앞두고 있는 년도에 한순간 마음이 혹했던 것이다.
앞으로 단 1년만 더 산다면 자신은 만년째를 겪는 사람이 될수 있다고, 아무 것도 쌓아오지 못한 자신에게 무언가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묘한 집념이라고 생각하면 집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돈이라는 것을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할 뿐 자신의 자산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손에 쥘 수 있었던 돈을 재산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시점에서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그는 자신에게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기 위해 산을 오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덧없는 자신의 몸뚱이를 만년을 기념하는 재물로 바치기 위한 뒤틀린 아집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그런 여행이다.
혹독한 추위였다. 노시엘트의 산은 어니스 대륙 중 겨울에 가장 춥기로 소문난 산. 보통 일반인들조차 이동하기 힘든 산을 90년을 넘게 산 노인이 오르고 있었다.
사실을 그도 가지고 싶었다. 친구나 연인이나 자식과 같은 인연을.. 하지만 그에게는 용기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친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모종의 일을 계기로 그는 인간불신에 빠지게 되었고 인간을 멀리하게 되었고,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의 마음은 나약해져만 갔다.
온갖 모략과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그는 아무것도 믿을수 없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런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사실은 나도 인연을 가지고 싶었지..'
지난 일을 회상할 때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나온다. 발밑의 눈이 그의 발을 점점 죄여 들어가는 듯했다. 지난 날의 추억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이런 나에게조차 추억이란 게 있을 줄은.'
평소에는 아무런 감흥조차 없던 이런 저런 일들이 어찌된 일인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새록 새록 싹을 틔우는 것 같이 머리 속에 선명히 떠오른다. 그는 이 외진 곳 '정말로' 혼자가 되어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자신은 인연이 없었다고 생각해 왔던 반 평생을 살아 온 라프티에서도 인연은 존재 했음을. 그간 살아왔던 어느 도시에서도 인연이란 항상 그 곁에 존재 했다는 것을..
그것을 외면한 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나약한 마음이었다는 것을..
주위는 마치 칼을 휘두르는 것과 같은 흉흉한 바람소리만 들린다. 조용히 그는 눈물을 닦았다.
세기의 세기를 장식하는 죽음을 얻기 위해서 그는 산을 올랐다. 오르고 또 올랐다. 2000기아(:미터)가 넘는다는 노시엘트의 산을 오르고 또 올라 체력이 한계에 다다를 무렵 그는 드디어 찾아낼수 있었다.
죽음을 맞이하기에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되는 장소를..
그곳은 동굴이었다. 산의 구석에 틀어 박힌 동굴이 아닌 동굴에 앉아 있기만 해도 산의 정경이 전부 보이는 생성된 것 자체가 기적인 것마냥 생각되는 동굴이었다.
"대단한 곳이로군.. 이런 곳이 있다니.."
그에겐 이미 식량도 돈도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두껍게 끼워 입은 옷가짐과 대장장이로서 자부심을 걸고 만든 검 한자루 그리고 여행의 끝에 이르러 텅 빈 가방 하나만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이런 외진 산속에서 죽게 되는 것이군.. 아무도 알지 못한 채 쓸쓸하게..'
또 다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는 재빨리 눈물을 닦고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마음 때문에 내가 이런 꼴이 되지 않았는가!!'
죽기 일보 직전까지 마음이 약한 자신이 이렇게 미울 수가 없다. 마음 같아서는 자학 하고 싶을 정도로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난 노인이었으나 그마저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있는 힘껏 벽을 주먹으로 쳤지만 그 아찔한 고통에 방금 피어 올랐던 분노가 삽시간에 가라 앉았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신을 보면서 다시 한번 속을 쌔까맣게 태웠다.
"슬슬 힘이 빠지는군."
이미 하루가 지나고 새해가 밝아 오고 있었다. 어떤 자들은 새해를 기념하면서 여행을 떠났을 것이고 또 어떤자는 평상시와 같이 일을 했을 것이며 어떤 자는 오늘 하루를 신나게 놀 궁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노인에게 이 날 어니스력 10000년 1월 1일은 기일이 될것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내 나이 97. 살만큼 살았지. 죽기 직전에 할말은 아니지만 죽을 각오로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지금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 것이든지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미 시간이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군."
누가 듣고 있는것도 아니었지만 생애 마지막 말을 내 뱉기라도 하는듯이 그는 나지막이 혼잣말했다.
"다시 태어 난다면 마음 강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기를.. 이런 나약한 사람이 아닌."
그렇게 마음을 다 잡아 눈을 감고 저승으로 가는 길을 기다리는 그는 달콤한 냄새에 슬쩍 눈을 떳다.
'무슨 냄새지?'
죽자고 마음 먹은 지금에 와서 허기 따윈 아무래도 좋았지만 생애 '마지막 식사를 하고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이라는 생각으로 그는 냄새의 근원을 찾기 시작했다. 이미 그 생각 자체가 나약한 마음의 근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마음속으로 '마지막'을 강조하며 애써 그 진실을 외면했다.
냄새는 동굴의 안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거였군."
수수하게 생긴 꽃이었다. 새하얀 꽃잎 녹색의 줄기 어디에서라도 볼 수 있는 흔한 꽃이었을 것이다.
노인도 이 꽃은 어디서라도 볼수 있는 흔하게 생긴 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눈앞의 꽃은 그 어떤 꽃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착시일까? 하고 고개를 갸웃 거렸지만 그는 신이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하고 그 꽃을 감상했다. 꽃에서 풍겨오는 달콤한 잔향이 노인의 코끝을 찌른다. 그것은 꽃의 향기라기 보다는 음식의 단향에 가까웠다.
순수하게 꽃을 두고 그는 갈등 했다. 이 아름다운 꽃을 한때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먹어야 하나. 아니면 자신의 죽음을 기리는 묘비로 남겨둘 것인가를..
곧 감상 같은 것은 죽고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 말을 떠올리며 그대로 꽃을 들어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굳이 먹을 필요는 없었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란 대단한 것이었다. 노인은 속으로 생애 마지막 만찬이라는 허울 좋은 변명을 속으로 늘어트린다.
달콤한 즙이 입안에서 노니는데 그 맛은 지금껏 먹어 봤던 어떠한 것보다도 맛이 좋았다.
달콤한과 상쾌한 기분이 입안에서 멤돌고 있는것 같은 느낌으로 꽃을 먹어 치운 것에 한치의 후회가 일지 않을 정도였다. 이 꽃이 극독이어서 당장 즉사를 한다고 해도 만족스럽게 웃으며 죽을 수 있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맛이 입가를 멤돌았다.
"그럼 이제 죽을까.?"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기분이 된 그는 웃으면서 동굴의 바닥에 앉았다. 몇시간 후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는 자신을 상상하면서도 그의 입가에는 가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만년을 기념할만한 날에 이런 멋진 장소에서 이런 만찬과 함께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서히 추위에 눈이 감기는 것을 느끼며 노인의 시야는 검게 물들었다.
"음.. 음?"
얼마나 지났을까 잠에서 깬 그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무겁게 죄여 오는 몸은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는 것이었을까.
'아니 이건.'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이내 깨달았다. 그 느낌은 낯설지만 낯익은 느낌이다. 아주 오래 전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을 미숙하고 또 미숙했을 무렵의 통통한 몸이다. 그때와 같은 피로감과 움직임이 느껴진다. 눈을 뜬 곳은 어두워서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바닥의 차가움과 은근히 비치는 윤곽을 보건대 분명 자신이 올라왔던 노시엘트의 산속의 동굴임에 틀림 없었다.
잠이라도 잤던 것일까. 왜 이렇게 몸이 무거울 걸까? 하는 의문이 그의 머릿 속을 엄습했다.
"뭐지?"
늙고 힘없는 목소리가 아닌 젊은 날 그가 가졌던 목소리. 오랜만에 들어 보는 목소리. 다시는 들어 볼수 없을 것 같았던, 없어야 정상일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당혹감을 느꼈다. 꿈인가? 그래 꿈일 거야. 하고 스스로 되뇌었다.
"드디어 일어 나셨군? 이 도둑놈.."
어벙하게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노인의 근처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서서히 어둠에 눈이 익숙해져 갈 무렵 그는 자신의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 정도 되었을까 어떻게 보면 성숙해 보이고 어떻게 보면 앳되어 보이는 신기한 인상을 가진 여인이었다.
환상이나 꿈에서 혹은 상상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아니 상상에서조차 그리기 힘들 정도의 미인이 그의 옆의 바위에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며 앉아 있었다.
"당신은 누구야?"
- 작가의말
안녕하십니까 색향입니다.
저의 글을 읽어 주신분들께 우선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혹시 오탈자나 오류 같은것이 보인다면 댓글로 올려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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