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6 부. 솔로우스 - 58 화

솔로우스 – 58

텔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 알겠다고. 그러니 그만 얘기해줘도 돼. 그리고 난 엘리시움으로 돌아갈 거야. 가서 좀 정리할 일들이 있어. 듣자하니 별별 잡신들이 다 등장한 모양인데 그놈들도 다 추수할 거야. 어차피 바이베노파시스도 감옥에서 나온 이상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이디레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베노파시스가 감옥에서 빠져나온 건 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적어도 그의 정신만을 말한다면 말이지요.”

“그런데 왜 그걸 내게 미리 얘기해주지 않았지?”

“난 적어도 그가 그의 육체까지 포기하면서 탈옥하리라 예상하지 못했어요. 설마 파괴신이 이 지구의 인간의 몸으로 들어갈 거라고는......”

이디레이아는 바이베노파시스가 후안 마르티네즈의 육체에 들어간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텔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역시 그랬겠지. 그 형이란 놈은 정말이지 포기를 모르는 자야. 사실 그것밖엔 내세울 게 없지. 그것 빼면 그냥 멍청이니까. 파괴신이라고 하면 그저 뭐든지 파괴할 수 있다고, 아니 파괴해야 한다고 믿는 놈이잖아. 에휴....”

텔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텔리와 이디레이아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만 있던 알렉시스는 그 대목에서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파괴의 신이 이 지구의 인간에게 들어갔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일까? 그런데 왜 갑자기 이렇게 내 마음이 불안해지는 거지?’

텔리는 계속 흥분하지 않고 이디레이아와 대화를 이어갔다. 사실 그가 이만큼 진지하게 대화하는 것은 쉽게 보지 못하는 일이라, 미스터 황은 지금 옆에서 보고 있는 텔리가 진짜 그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의 눈에도 텔리가 어엿한 엘리시움의 신처럼 보였다.

“아버지와 나의 일을 아는 자는 바이베노파시스뿐이야. 그러니 그는 내가 어디에 있든 반드시 나를 찾아올 거야. 그가 오랫동안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그래서 내가 그를 찾아갈 거야. 그리고 일을 매듭지을 건데......”

텔리는 차마 말을 다 마치지 못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알렉시스 때문이었다. 그가 바이베노파시스와의 일을 매듭 짓는다는 것은 그녀에게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디레이아도 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후엔 엘리시움으로 돌아가겠어. 모든 일이 끝나면 내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는 거잖아?”

이디레이아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렇죠. 당신이 바이베노파시스를 감시하는데 실패했다고 신들, 그중에서도 오래된 신들은 분명 당신을 비판하겠지만, 전 당신 편에 서겠어요. 당신을 돕겠습니다.”

“그까짓 신들. 날 비판하려면 얼마든지 하라지. 그런 것쯤은 난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아. 다만 언젠가 내가 그들을 찾아갈 날이 오게 될 지도 몰라. 그 때 그들의 얼굴이 볼만하겠지. 정의로운 척 하는 놈들일수록 추수할 때 더 비굴하게 굴더군.”

“그리고 한 두 가지 더 당신에게 알려줄 게 있어요. 엘리시움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는데 바이베노파시스와 당신의 여동생, 키쥬아가 연관되어 있어요. 당신이 말했다시피 바이베노파시스가 혹시 죽음의 신과 당신의 일을 안다고 했는데, 그가 키쥬아에게도 알려주지 않았을까요?”

“바이베노파시스가 키쥬아에게 뭘 알려주지 않았겠냐고? 이디레이아, 당신은 정말 그 둘을 잘 모르는군. 만약 바이베노파시스가 키쥬아에게 아버지와 나 사이의 일을 말해줬다면 둘 중 하나는 벌써 죽었어. 키쥬아가 알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 둘은 경쟁상대가 되어 버리는 거야. 그런데 둘은 아직도 서로 협력 관계지 않아? 그렇다면 바이베노파시스는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거야. 그가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자기 밥그릇까지 빼앗길 정도로 바보 천치는 아니야.”

이디레이아는 입가에 씨익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군요. 그것 참 잘 되었군요. 그런데 이걸 어쩌죠? 비밀이 새어나갔을 지도 모르겠는데요?”

“그게 무슨 소리야?”

텔리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다시 물었다. 그러자 이디레이아는 눈을 내리 깔면서 대답했다.

“바로 당신 몸에 있던 키쥬아의 환영 말이에요. 혹시 그녀가 당신의 비밀을 알게 되진 않았을까요?”

“아니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 아!”

이디레이아는 텔리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당신이 베토케로우스와 처음 대결했을 때, 당신은 그녀에게 당신의 환영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었죠.”

“그.... 그랬지.”

텔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시다시피 키쥬아가 환영을 만드는 방식은 엘리시움 전체에서도 매우 독특합니다. 그녀는 마치 분신을 만들 듯 환영을 만드니까요. 그래서 그녀의 환영은 기본적으로 본체의 모든 능력을 전부 구사할 수 있게 되지요. 아니, 당신이 더 잘 알겠네요. 당신에게 분신을 만드는 것을 가르쳐 준 게 바로 키쥬아니까요.”

“아.....!”

텔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은 지금 매우 혼란스러워졌다. 이디레이아는 말을 이어갔다.

“그래요. 당신도 감을 잡았군요. 당신의 환영을 만들 때, 키쥬아의 환영은 당신의 모든 것을 마치 유리관 속을 들여다보듯이 다 볼 수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키쥬아의 환영이 어디에 있죠? 당신의 새로운 몸 안에 있나요?”

“여... 여기 안엔 없... 없다! 그녀는 아직 예전의 내 몸에.....!!”

이디레이아는 급히 피곤함을 느끼는지 두 손을 올려 눈가를 비볐다.

“어휴.... 텔리. 텔리. 왜 그랬어요? 신중했어야죠.”

텔리는 다시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아니야! 그녀는 아직 내 옛날 몸 안에 있을 거야! 그 몸 안에 있을 게 분명해! 내가 당장 나가서 확인해 보겠어!”

“그럼요. 당연히 확인해봐야죠.”

“그... 그리고 키쥬아의 환영 녀석은 어차피 엘리시움에 갈 수도 없잖아! 검은 방을 어떻게 토... 통과하겠어? 케르케로우스는 지금 불새군 녀석들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바... 바빠서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아, 그렇군요.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이디레이아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지금 검은 방의 문은 열려 있잖아요. 어떻게 검은 늑대들과 불새군 병사들이 검은 방을 통과해서 이곳에 왔죠? 그들도 케르케로우스의 허락을 받았나요?”

아니다. 그들은 케르케로우스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 베토케로우스가 엘리시움 쪽의 문을 열어줬더니 리베우스와 검은 늑대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검은 방으로 들어섰고 이후에는 이미 열려 있는 지구쪽의 문을 통과했다. 솔로우스와 불새군의 경우, 단순히 그들을 쫓다가 함께 넘어온 경우였다. 검은 늑대들의 경우, 텔리도 그들을 직접 봤으니까 상황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지금 그는 너무 흥분한 상태라 똑바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그래도 그 동안 걔랑 내가 한 육체를 공유했던 것도 있고 서... 서로 도우면서 얼마나 사이가 좋았는데, 설마 내 상황을 키... 키쥬아에게 알리려고 할까? 비밀을 지켜주지 않을까?”

이디레이아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지만 본체에게 돌아가는 일은 끝내 그녀 자신의 생존에 관계된 문제잖아요. 어떻게 당신은 그 일을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얘기할 수 있어요? 설마 키쥬아의 환영이 당신을 위해 본체에게 돌아가지 않고 순순히 자살할 거라고 믿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순진하게 생각하는 건 영 당신답지 않군요.”

“이... 이런! 실수다! 그것도 너무 어이없는 실수!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아아아.......”

텔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신음했다. 미스터 황과 알렉시스는 그와 여신의 대화를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가 몹시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는 것은 대충 알 수 있었다. 왜냐면 그의 얼굴에 식은땀이 잔뜩 흐르고 눈에는 절망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렇게 긴장하는 모습 역시도 조금 전 이디레이아와 진중한 대화를 나누는 것만큼이나 평소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