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부. 솔로우스 - 18 화
솔로우스 – 18
땅위의 그림자에서 나온 거인은 미스터 황과 데디쿠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둘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거인이 신기한지 마냥 쳐다보았다.
“이봐, 불새군 남자. 방금 저걸 보고 거인이라고 그랬지? 그러니까 넌 저 괴물의 정체가 뭔지 안다는 거네? 너희 세계에는 거인도 있는 거냐?”
“아냐. 나도 처음 봐. 그리고 정체가 뭔지 너도 보면 모르겠냐? 어떻게 봐도 그냥 딱 거인처럼 보이잖아. 거인이라고 하면 전설에서나 나오는 건줄 알았는데..... 심지어 여기 지구에도 거인에 대한 전설은 있잖아.”
“그래. 그런데 그건 네 말대로 전설일 뿐이지. 우리 눈앞에 있는 이건 진짜고.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내 눈앞에서 벌어질 수 있지?”
한 동안 둘은 계속 위를 쳐다보며 감탄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거인이 한쪽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더니 둘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뭐, 혹시라도 그 거대한 몸집을 보게 되었다면 쉽게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목소리는 상당히 낮으면서도 또 웅장했다.
“빽빽빽빽빽. 어휴. 시끄러워. 너희 둘은 아까부터 뭔 할 말이 그렇게 많아서 시끄럽게 구는 거냐? 아주 귀가 따갑구나.”
거인의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지만 말투는 영락없는 텔리였다. 그를 알아본 미스터 황의 눈이 커지면서 말했다.
“세상에! 그 말투는 혹시 텔리님? 역시 텔리님이었군요! 그런데 어떻게 된 거에요? 어떻게 거인이 되어서 나타나신 거예요?”
거인은 영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아까 내가 가지고 있던 육체는 너무 훼손이 심해서 좀 수선이 필요할 것 같더라구. 그래서 벗어버리고 부득이 이런 모습이 되어버렸다. 사실 이건 내가 별로 좋아하는 육체는 아니야. 이런 모습이 되어버려서 기분이 좀 안 좋아졌어.”
“뭐라고요? 아까 육체는 수선이 필요하다고요? 그래서 육체를 바꿨다고요?”
미스터 황과 데디쿠스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텔리의 새로운 거인 육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몸집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커다랗기가 작은 건물 만큼이나 되었고, 머리카락과 수염은 길게 자란 채 마구 엉켜있어서 더러워 보였으며, 코는 심하게 매부리코에, 눈두덩이 앞으로 툭 튀어 나와 있었다. 전체적으로 생물학 책에 나오는 인류의 조상 혹은 아주 먼 옛날 돌도끼를 가지고 다닐 법한 원시인 같은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비호감으로 느낀 것은 거인 텔리가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온 몸을 새카맣게 덮고 있는 털들 때문에 당장 중요부위에 눈길이 가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텔리는 둘의 시선이 좀 따가웠는지, 그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두 손 가락을 ‘딱’ 하고 퉁기며 말했다.
“야, 그렇게 자꾸 쳐다볼 게 뭐 있어? 몸은 바뀌었지만 난 그대로인데. 내가 말했잖아. 나도 지금 이 모습이 마음이 드는 건 아니라고.”
미스터 황은 텔리에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려달라고 졸랐다.
“텔리님, 진짜 어떻게 된 건지 말씀해주세요. 모습을 바꿔도 그렇지 어떻게 인종이 달라져요? 아니다. 이건 인종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생물이 되어버린 거잖아요?”
그러자 데디쿠스가 시선을 텔리에게 고정한 채 미스터 황에게 말해줬다.
“아무래도 살육의 신께서는 여러 육체를 가지고 계시고 경우에 따라 바꾸실 수 있는 것 같아. 마치 우리가 때에 따라 옷을 갈아입듯이 말이야.”
“아니, 그게 말이 돼? 세상에... 내가 살다 살다 이런 일을 다 목격하게 되다니.”
데디쿠스의 말을 듣고 거인 텔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불새군 녀석의 말이 맞다. 아까 육체는 당장 사용할 수 없어서 내 개인 공간에 벗어두었고 대신 이 육체를 꺼내서 ‘입은’ 거야.”
“세상에! 그래도 거인이라니! 와... 몸집 좀 봐봐. 와와.”
“넌 신기하게 보이겠지만 내 눈엔 쓸데없이 큰 몸집에 둔하기 짝이 없는 육체다. 지금 이걸 보고 놀란다니 우습군. 만약 아주 오래 전 이런 거인들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던 세상을 봤었더라면 넌 아마 너무 놀라서 뒤로 자빠져 버렸겠다. 내가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싶지만 이 육체는 기능이 완전하지 않아서 내가 좀 서둘러야 해. 왜나면 이 육체는 몸집도 거대하고 신진대사도 너무 빠르기 때문에 쉽게 배가 고파지거든. 정말이지 여러모로 엉망인 육체야. 조금 전 서서 보니까 여기서 가까운 곳에서 릴리카와 베토케로우스가 싸우고 있는 것 같다. 그 뒤엔 알렉시스가 있었고.”
“알렉시스가요?”
거기까지 말한 텔리는 다시 허리를 펴고 두 발로 서서 릴리카와 베토케로우스가 있는 곳을 잠깐 쳐다보았다. 높은 위치에서 보니 둘의 행동이 단번에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릴리카와 베토케로우스가 서로 공격을 주고받다가 릴리카가 입은 특별한 갑옷의 힘에 의해 튕겨져 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베토케로우스놈, 겨우 릴리카를 상대로 고전하고 있군. 저건 내가 알던 그 괴수가 아니야. 아마 아까 내게 치명상을 입은 게 분명해. 아니고서야 겨우 인간인 신전 전사를 상대하면서 저렇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 없겠지. 릴리카도 내 예상보다는 실력이 좀 있군. 어쨌거나 이번에도 베토케로우스, 널 죽이는 건 당연히 내가 될 거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육체를 그렇게 심하게 망가뜨리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뭐 죽여도 어차피 언젠가는 또 부활하겠지만. 흥!”
텔리는 다리를 구부렸다가 피면서 하늘로 뛰어 올랐다. 거인이 되니까 나무 몇 그루쯤은 쉽게 뛰어넘을 수 있었다. 미스터 황과 데디쿠스는 그 박력 넘치는 모습에 놀라 입을 벌리고 쳐다보다가 곧 둘 다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우웩! 못 볼 걸 봐버리고 말았어!”
미스터 황이 눈을 질끈 감고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곧 이어 데디쿠스도 손으로 이마와 눈을 가리며 대꾸했다.
“진짜야..... 내 평생 저렇게 털로 지저분하게 뒤덮인 큰 엉덩이는 본 적이 없어! 무슨 엉덩이가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 만해! 우웁....! 우웩! 웩!”
아마 둘은 벌거벗은 거인의 몸을 하고 있는 텔리가 점프할 때 바로 아래서 그의 엉덩이를 정면으로 본 모양이다. 미스터 황은 토하는 시늉만 냈던 것이지만, 데디쿠스는 정말로 속이 안 좋아졌는지 그만 수풀 위에 토해버리고 말았다.
* * *
그 시각, 릴리카는 핀치에 몰려서 상당히 고전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녀를 한계까지 몰아붙인 것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의 손이었다. 그녀의 손은 불이 붙은 채 활활 타면서 그녀 얼굴을 노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베토케로우스가 그녀 신체의 제어권을 빼앗아서 손에 불을 붙이고 그녀를 해치도록 조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릴리카는 사력을 다해 정신을 집중해서 그녀의 손을 막았다.
“으으윽! 베토케로우스, 이 망할 놈! 내 손을 가만히 둬! 내 머릿속에서 나가!”
그녀가 자기 손을 어쩌지 못해 쩔쩔 매는 모습을 보고 즐거운지 베토케로우스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멍청한 계집. 네 몸은 이미 내 것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더 이상 쓸모없는 저항을 그만 두고 네 운명을 받아들여라! 크하하하!’
“절대... 그렇게는.... 안 돼!”
릴리카는 이를 꽉 깨물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불타는 손은 그녀의 얼굴로 점점 가까워졌다. 이제 그녀는 뺨에 열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곧 그녀의 얼굴은 자신의 손에 의해 처참하게 변할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해도 자신의 손을 막을 수 없게 되자 그녀의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악! 이제 더 이상은...!”
그 때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떠오르더니 릴리카와 베토케로우스 사이에 떨어졌다.
‘툭! 툭!’
베토케로우스는 자기 앞에 떨어진 두 덩어리를 유심히 보았다. 그가 자세히 보니, 그것들은 절반으로 찢긴 늑대의 사체였다. 그는 등 뒤로 고개를 돌려 어두운 숲속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늑대? 누구냐? 어떤 놈이 내 늑대를 이렇게 만들었어?”
“누구긴 누구겠냐? 텔리님이시다! 이 지저분한 늑대 놈아!”
숲속에서 거대한 검은 물체가 일어나더니 그대로 뛰어올라 앞에 있는 나무를 훌쩍 뛰어 넘었다. 그는 괴수에게 달려오면서 검은 늑대 몇 마리의 꼬리를 손에 쥐고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베토케로우스는 웬 벌거벗은 거인이 자신에게 돌진해오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 그 와중에 릴리카는 다시 자신의 손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재빨리 손에 붙은 화염을 끄더니 공기 중에 손을 몇 번 흔들었다.
“하하하! 이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구나. 병신 늑대 놈아! 이번에야 말로 네 최후를 맞아라!”
거인의 목소리를 들은 베토케로우스는 그제야 거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누... 누구냐? 설마 넌 텔로토마?”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