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부. 만월의 밤 - 60 화
만월의 밤 – 60
고개가 뒤로 젖혀있는 채로 몸이 마비된 릴리카는 눈을 깜박이며 자기 앞에선 알렉시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알렉시스는 단번에 그녀의 몸이 마비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혹시 몸이 마비된 건가? 그렇다면 에뮤니우스가? 그래...... 나도 그놈에게 똑같이 당한 적이 있었지.”
알렉시스는 예전에 에뮤니우스의 기습에 당해 하루 동안 몸이 마비된 채 감금당했던 일을 기억했다.
“에뮤니우스. 그놈에게 난 엄청난 빚이 있다. 반드시 갚아야 할 빚이지.”
도대체 그 빚이라는 게 참 이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아까 에뮤니우스도 릴리카에게 빚을 갚겠다고 하면서 그녀를 이렇게 마비시키지 않았던가. 그런데 알렉시스 역시 에뮤니우스에게 큰 빚이 있다고 하니 말이다. 지금 보니까 이들은 서로 빚진 것을 계산하다가 더 큰 원한을 갖게 될 것 같다. 원한만 있지, 용서는 절대 없구먼.
“하지만 지금 네가 눈을 깜박이는 걸 보니까 마비가 풀리고 있구나. 곧 온몸을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될 거야. 그때까지는 기다려주마. 너와는 그때 겨루겠다. 우리 서로의 빚을 갚도록 하자. 누가 더 큰 빚을 졌는지는 최후에 선 자가 알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고 알렉시스는 뒤돌아 건수와 일행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 * *
미스터 황은 부상 입은 데디쿠스와 그를 따르는 다른 병사들의 몸에 옴니테바를 갖다 대고 치료해주었다. 신기 할머니는 어느새 케르케로우스가 있는 쪽으로 이동하여 검은 늑대들과 싸우고 있었다. 미스터 황이 건수를 보며 말했다.
“야, 너도 저기로 가서 그 늑대 신수랑 함께 싸워야 하지 않아?”
“아, 저기는 텔리님이 계시는데요. 제가 가서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혹시라도 검은 늑대들이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게 되면, 지금 형이 치료해주고 있는 그 사람들을 지키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흐음. 저쪽은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미스터 황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하필이면 텔리가 검은 늑대를 잡고 마치 육포 찢듯이 몸을 부욱 찢는 것을 보았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토하는 흉내를 냈다.
“우웁. 저 양반은 내가 볼 때마다 꼭 저렇게 징그러운 짓을 하더라.”
“예? 텔리님이 뭘 하셨어요?”
“아니, 맨날 자기의 철학은 ‘사자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면서 고통 없는 죽음을 주는 것’이라고 말은 하면서 꼭 저렇게 찢어 죽이잖아. 저게 어디 봐서 예의를 갖춘 거냐고. 고통이 없긴 뭐가 없어?”
“아... 그 찢어 죽이시는 거요. 어후.... 우웁.”
그 말을 듣고 건수는 와본동의 건물 주차장에서 데디쿠스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텔리가 그의 동료 뒤에서 나타나 그를 절반으로 찢어 죽였던 것이 생각나서 속이 울렁거렸던 것이다. 미스터 황은 오랜만에 건수를 만나서 그런지 계속 말을 걸었다. 그런데 어떤 놈은 싸우고 또 어떤 놈들은 이렇게 태평하게 대화를 하고 있다니... 이게 과연 전장이 맞을까 싶었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야. 아까 알렉시스가 하는 말 들었지? 죽음, 그분의 영역, 생사여탈권, 어쩌고 하는 거. 야, 그거 너무 유치하지 않냐?”
“아..... 예. 음음.”
“그런데 우리가 모두 멧돼지 산신령님의 공간에 있는 동안, 텔리님이 우리를 훈련시키면서 무슨 동작 한번 할 때마다 계속 그 바보 같은 구절을 말하라고 시키는 거야. 뭐라더라? 살육의 신이 준 임무를 수행하기 직전에 꼭 말해야 하는 거라나? 신의 임무는 개뿔.”
“아... 아... 예예. 그런데 형이 방금 병사들을 치료할 때 그런 구절은 읊지 않던 데요?”
“미쳤어? 내가 그런 걸 하게?”
“아... 그렇군요. 음음음.”
“야, 넌 왜 계속 ‘아... 음음음’ 그렇게만 대답하는 거야? 오랜만에 만나면서 영 처음보는 사람처럼 행동하네.”
“오랜만이요? 겨우 며칠만인 것 같은데요?”
건수는 바깥세상에서만 있었기 때문에 며칠밖에 지나지 않은 것이지만, 미스터 황은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멧돼지 산신령의 공간에 있었기 때문에 훨씬 많은 날을 보냈던 것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멧돼지 산신령님 공간에 있었다고. 거긴 시간이 좀 다르게 흐르잖아. 그런데 거기서 한 달도 넘게 있었다니까. 아, 맞다. 네 친구들 말이야. 걔네는 아직도 거기에 있어. 원광이도 좐슨도 싸이언스도 다 거기 있어. 원광이랑 좐슨이 불새군한테서 도망쳐 나왔을 때 우리가 길에서 발견해서 데려갔지. 펠리시아 때처럼 말이야. 아, 참. 싸이언스는 이제 몸이 많이 회복되었어.”
“네? 싸이언스가요?”
“그래. 내가 오랫동안 계속 이 옴니테바로 그 녀석을 치료해줬거든.”
건수는 싸이언스가 건강을 되찾고 있다는 소식에 무척 기뻐했다.
“형 덕분에 그 녀석이 깨어났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미스터 황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야, 나도 그 녀석 덕분에 거의 의사가 다됐다. 봐봐. 이렇게 옴니테바로 못 고치는 병이 없다니까. 심지어는 암도 고쳤지.”
“예? 암을 고쳤다고요?”
“그래. 이제 인류는 어떤 종류의 암도 극복할 수 있게 된 거야. 아... 물론 그건 나중에 시간 있을 때 자세히 말해줄게.”
알렉시스가 걸어오면서 잡담하고 있는 둘을 보며 말했다.
“멍청이들아. 너희는 싸우다 말고 무슨 얘기를 하고 앉아 있는 거야? 놀러왔어?”
그녀가 사납게 말하는 태도에 건수는 조금 주눅 들었지만, 그녀에게 좀 친근하게 대하려고 했다. 일단 그녀가 보여준 놀라운 전투 능력을 칭찬하며 말을 걸었다.
“알렉시스 누나, 텔리님께 힘을 받아서 그렇게 강해진 거예요? 그러면 혹시 절 이렇게 묶고 있는 이 빨간 밧줄 좀 잘라주실 수 있어요?”
“뭐? 누나?”
알렉시스는 한 손으로 건수의 볼을 세게 잡더니 자기에게 끌어당기며 말했다.
“이 머저리 같은 사제 놈아. 잘 들어둬. 다시 한번 너가 날 누나라고 부르면 그땐 네 놈의 몸을 절반으로 잘라버릴 거야. 알겠어? 역겨운 새끼야?”
“네? 예예....”
건수는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알렉시스가 그를 거칠게 뒤로 밀더니 땅바닥에 털썩 앉았다. 미스터 황이 겁에 질린 건수 곁으로 와서 그를 위로했다.
“신경쓰지 마. 최근 알렉시스가 텔리님과 하도 오래 붙어 있더니 못된 말버릇도 배웠나 봐. 나랑 대화할 때도 말끝마다 날 죽여버리겠다고 한다고. 그러니까 아예 말도 붙이지 마.”
“예....”
건수는 울상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옴니테바를 몸에 지닌 검은 늑대들을 상대하느라 잠시 고생했던 케르케로우스는 텔리와 스라소니 산신령이 등장한 덕분에 이제 별로 할 일이 없을 정도로 한가해졌다. 한 때, 백 마리도 넘는 검은 늑대가 포위하기도 했었던 그의 주변엔 이제 늑대들의 사체가 즐비하게 쌓여있었다. 텔리도 대단했지만 특히 모습을 감추고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스라소니 산신령은 아예 태어날 때부터 검은 늑대들의 천적인 것 같았다. 그는 지쳐서 숨을 헐떡거릴 때까지 늑대들을 물어 죽였다. 둘의 악귀같은 모습에 늑대들이 겁을 먹고 더는 접근하지 않자, 텔리는 베토케로우스가 서 있었는 곳을 보며 소리쳤다.
“베토케로우스! 이런 시시한 놈들을 보내지 말고 네놈이 직접 나와! 괜히 내가 늑대 피만 뒤집어쓰게 하지 말고! 아니면 너무 겁이 나서 나서지 못하는 건가? 내가 또 네 놈의 정수를 부숴버릴까 봐? 아, 맞다. 어디서 듣자 하니 넌 완벽하게 부활하지 못했다면서? 그래서 네가 직접 나서지 못하는 거야? 엉? 그런 거야?”
그 말이 베토케로우스를 제대로 자극했는지, 그는 대단히 분노하며 포효했다. 그가 울부짖는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웠던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피부로 음압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텔리! 네놈을 죽여버리겠다!”
그러자 텔리는 새끼 손가락으로 귀를 파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나 역시 같은 생각이야. 오늘 밤 또 한 번 너를 끝장내주마. 베토케로우스. 훗훗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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