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5 부. 만월의 밤 - 47 화

만월의 밤 – 47

카베쿠스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는 릴리카를 보고 씩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뭐 아무렴 좋다. 네 이름이 릴리카라고 했지? 너희가 오래전 이 세계로 온 이유는 오로지 케르케로우스를 제거하기 위한 임무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네, 그렇습니다.”

“너희들은 운이 좋군. 너희가 섬기는 그 탐욕스러운 불새는 세상을 자신의 날개로 덮겠다는 허황된 꿈을 좇아 온 세계를 전쟁의 불꽃으로 활활 태우고 있는데 말이다. 그의 명령에 따라 얼마나 많은 너희들의 동료가 목숨을 잃었겠는가. 그러나 너희는 이 세계에서 평화로움에 젖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니, 아마도 불새군 중에선 너희가 가장 축복받은 존재들임에는 틀림없을 거다.”

“.......”

릴리카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군이 되자고 불러놓고 계속 그녀가 모시는 신과 그 아래 성전사들을 거침없이 모욕하는 데도 말이다. 오히려 릴리카의 건방지고 급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이사우라는 혹시라도 그녀의 정신이 홱 돌아버려서 베토케로우스에게 덤벼들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베토케로우스는 계속 자기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릴리카의 무반응에 놀리기가 시들해졌는지 본론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너희가 온 목적을 이루는 데 난 방해하지 않겠다. 난 얼마 전 내 동생, 케르케로우스을 만나 검은 방을 내게 내어놓으라고 점잖게 요구했지만, 그가 내 말을 듣지 않아선 온 것이다. 너희에게 그를 쓰러뜨릴 기회를 먼저 주겠다. 너희가 그를 제거하고 그의 생명의 정수를 취한다고 해도 난 문제 삼지 않겠다. 왜냐면 너희가 그 정수를 가지고 불새에게 갖다 준다고 한들, 그가 검은 방의 주인이 될 일은 절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그에게 가는 사이, 검은 방의 원래 주인인 내가 검은 방을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불새가 여전히 나와 검은 방을 두고 싸우겠다고 하면 기꺼이 응할 것이다. 하지만 나와 싸우지 않겠다면, 같은 신수로서 불새의 세력에겐 내가 최대한 편의를 봐줄 것이니 그 말도 생명의 정수와 함께 전하거라. 알겠느냐?”

릴리카는 자기들이 케르케로우스를 쓰러뜨려도 검은 방의 주인 자리를 불새 에피로제에게 가져다 줄 수 없을 것이라는 말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은 베토케로우스의 제안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에피로제님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대답을 듣자 베토케로우스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음흉하게 웃었다.

“크크크. 좋다. 이제 곧 검은 방의 문이 열릴 것이다. 그러면 케르케로우스는 그곳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 세계와 이 세계를 이어주는 검은 방은 한 달에 단 한 번, 보름달이 뜨는 밤에 반드시 그 문이 열리게 되어있다. 하지만 많은 곳에 있는 검은 문들이 일시에 열리는 것이 아니다. 오직 검은 방의 주인이 직접 나와 있는 땅의 검은 문만 열리게 되어있다. 그런 이유로 지난 여러 해 동안 검은 방의 문은 그의 육체가 묻혀있는 이곳에서만 열렸었다.”

릴리카는 놀라서 검은 괴수에게 급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 검은 문을 열고 나가 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 남극이나 어느 사막에 그가 나가 있겠다고 하면 베토케로우스님이나 저희 불새군을 쉽게 피할 수 있지 않습니까?”

릴리카의 날카로운 질문을 듣고 무릎을 꿇고 있는 불새군 병사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만약 그녀의 말대로 케르케로우스가 이곳이 아닌 남극이나 다른 오지에 그 문을 열어놓는다면 그들은 괜한 헛걸음을 한 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케르케로우스는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좋은 질문이다. 케르케로우스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겠지. 누가 적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에 일부러 검은 문을 열겠느냐? 하지만 너희는 그의 유일한 사제를 인질로 잡고 있지 않느냐? 내가 아는 케르케로우스는 반드시 그 사제가 잡혀 있는 이곳에 검은 문을 열 것이다.”

릴리카는 그 말을 듣고 안심했다. 적어도 자기들이 헛걸음을 하게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또 다른 의문이 생겼는지 베토케로우스에게 하나 더 질문했다.

“신수님께 감히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왜 그렇게 중요한 정보를 저희에게 알려주시는 겁니까? 저희 불새군이 알아서 좋을 정보가 아니지 않습니까?”

“쿠쿠쿠쿠. 너희가 한 달에 한 번 반드시 열리는 검은 방의 비밀을 알면 뭐하겠느냐? 내가 다시 검은 방의 주인이 되면 절대로 엘리시움 땅에서 검은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일은 없을 것인데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릴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토케로우스의 말을 들어보니 불새의 신수 에피로제가 검은 방을 차지할 방법은 현재 전혀 없었다. 그러니 그녀에게 남은 선택은 단 하나뿐이었다. 빨리 케르케로우스를 무찌르고 그의 정수를 에피로제에게 가져다주며 지금까지 들은 검은 괴수의 말을 전하는 것 말고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베토케로우스는 무릎을 꿇고 있는 불새군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얼굴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어디 보자..... 저 녀석이 케르케로우스의 마지막 사제로구나. 그리고 저기에는 에뮤니우스가 있구나.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라.”

호명을 받은 건수와 에뮤니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토케로우스 뒤에 있던 카베쿠스가 에뮤니우스에게 소리쳤다.

“에뮤니우스, 지금 주인님 말씀을 듣고도 뭐하고 있느냐? 냉큼 주인님 뒤로 와서 엎드려라!”

에뮤니우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발걸음을 한 발짝 앞으로 내딛었다. 그를 보고 이사우라가 호통쳤다.

“에뮤니우스, 이 배신자 놈! 어디 감히 몸을 움직이려 드느냐?! 릴리카님께서 네게 보여주신 은혜를 그새 잊었단 말이냐! 네놈이 저쪽으로 가버리면 누가 케르케로우스의 정수를 뽑아 우리에게 주겠느냐? 네놈이 수없이 배신을 하다못해 이제 검은 늑대의 사제까지 되려 드느냐?”

그 말을 들은 카베쿠스는 엎드린 채로 이사우라에게 소리쳤다.

“멍청한 인간 계집애 같으니! 우리 주인님께서는 어느 인간도 당신의 사제로 삼지 않으신다. 오직 검은 늑대만이 주인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이사우라는 자기를 멍청이라고 부르는 늑대의 말에 울컥했지만 뒤로 팔을 뻗어 그녀의 돌발행동을 제지하는 릴리카의 손짓을 보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에뮤니우스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베토케로우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불타는 두 눈을 바라본 순간 에뮤니우스는 그의 눈빛에서 생각을 읽어냈다. 그리고는 미소지으며 다시 무릎을 꿇고 앉으며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검은 늑대의 신수시여. 전 인간으로서 여기 불새군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이들을 도와 케르케로우스님을 쓰러뜨리고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제발 제 청을 들어주시옵소서.”

베토케로우스는 눈을 한번 길게 감았다가 뜨면서 대답했다.

“에뮤니우스, 넌 내가 네 마음에 전하는 메시지를 맘대로 차단한 것을 난 알고 있다. 크크크.... 일단은 너가 좋을 대로 하거라. 너와는 엘리시움에서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나를 돕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주인님.”

에뮤니우스는 얼굴을 땅바닥에 붙이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때였다. 불새군의 한 병사가 손가락으로 앞에 보이는 숲속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 저기! 밝은 빛이 납니다!”

모두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그쪽으로 향했다. 그의 말대로 새카만 숲속에 하얀빛이 뿜어 나오는 장소가 있었다. 건수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름달 바로 아래 일직선의 위치에 보름달과 똑같이 밝게 빛나는 빛이 덩어리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 케르케님. 나오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