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4 부. 예언자들 - 82 화

예언자들 – 82

건수와 미스터황이 알렉시스와 펠리시아를 집안으로 데려오자 거실 소파에 앉은 텔리는 그들을 자신 앞에 앉혔다. 펠리시아는 들어오자 마자 텔리 옆의 소파에 앉으려고 했다. 그러자 알렉시스는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안 돼, 펠리시아. 넌 여기 바닥에 앉아야지.”

알렉시스는 마룻바닥에 꿇어앉더니 머리를 조아렸다. 펠리시아는 알렉시스를 보면서 말했다.

“언니가 왜 그러는지 충분히 알겠는데, 텔리와 전 친구에요. 게다가 난 바닥에 앉는 게 전혀 익숙하지 않다고요. 난 그냥 소파에 앉을 게요.”

“펠리시아, 네 어머니도 신수 뷰라우크스를 모시던 사제였어. 너가 엘리시움인의 후손이라면 우리가 모시는 신을 모욕하지 마라.”

“뭐야..... 텔리는 내 친구인데.”

알렉시스는 펠리시아를 째려봤다. 펠리시아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는 알렉시스 옆에 앉았다. 텔리는 그 모습을 보고 코를 씰룩거렸다.

“아이, 뭘 꿇어 엎드리고 있어. 너도 펠리시아처럼 그냥 바닥에 앉아. 뭐야, 어떻게 갑자기 아까와 태도가 180˚로 바뀌냐고.”

알렉시스는 당황하며 몸을 벌벌 떨었다. 숙인 얼굴을 땅에 더 가깝게 붙이면서 말했다.

“전... 당신이 신이신 줄 전혀 몰랐습니다. 하지만 알았건 몰랐건 제가 오랜 시간 동안 당신을 모욕한 것은 분명 제 잘못입니다. 전 신을 모시는 입장입니다. 신전에 속한 전사인 제가 비록 모시는 신은 아니지만 당신께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절 벌해 주십시오.”

“응. 알고 있어.”

텔리는 고개를 한 바퀴 돌리면서 나른한 톤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절 죽이신다고 해도 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제 목숨은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그래서 아까 죽이려고 했잖아.”

“그럼..... 저를 살려주시는 겁니까?”

“그래. 아까는 너무 화가 나서 그랬는데 생각해보니까 드라마 한 편 놓쳤다고 사람을 죽인다니 어이가 없는 일이지 뭐야. 훗훗훗. 우리가 그 동안 알고 지낸 시간도 있고.”

텔리의 말을 듣고 건수는 기가 막혔다.

‘와.... 아까 일이 났을 때부터 내가 계속 말했던 거 아니야? 드라마 최종화를 못봤다고 사람을 죽이는 게 말이 되냐고 내가 계속 그랬잖아. 아까는 듣지도 않고 말리는 사람을 패더니 지금은 어이없다고? 뭐 저런 정신 나간 신이 다 있지?’

자기를 살려준다는 텔리의 말에 알렉시스는 크게 감격했다.

“가... 감사합니다! 텔리님의 은혜를 받은 이 목숨,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얻은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텔리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텔리는 알렉시스가 충성을 다하겠다는 말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야, 알렉시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원래 죽어야 할 제 목숨을 살려주셨으니 제가 텔리님께 충성을 다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하. 이건 뭐 진짜 상황이 딱 180˚로 변했잖아.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내가 널 위해서 일했잖아. 그런데 이젠 네가 내게 충성을 다 하겠다고 하잖아. 아이러니가 이런 거구나. 훗훗훗. 음... 그런데 알렉시스 네가 날 위해서 해줄 일이 뭐가 있겠냐. 충성하겠다는 그 마음만 받겠다.”

텔리는 하던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해보았다.

“아..... 한 가지 있긴 하구만. 그래, 네가 날 위해 해줄 게 하나 있긴 하다.”

“예. 말씀하세요.”

“더 이상 케르케로우스를 쫓는 일에서 손 떼.”

“네?”

알렉시스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케르케로우스의 정수를 얻어야 후안과 함께 할 수 있는데 그걸 막겠다고 하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를 쫓는 것도 하지 말고 해치려는 시도는 더더욱 하지 마.”

“그건.....”

텔리는 흔들리는 알렉시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까 케르케로우스의 하나뿐인 사제이자 전사인 건수와 붙어봤으니 알겠지? 원래 케르케로우스는 너가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절대 만만하지 않아. 하지만 그 자의 천성이 워낙 온순하고 싸우기를 싫어하니까 늘 남에게 밟히는 거라고. 그도 나 같은 신인데 인간인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알렉시스는 밀려오는 당혹감에 고개를 숙였다. 그 자세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텔리에게 대꾸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해도 전 반드시 케르케로우스의 정수가 필요합니다. 죄송합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기의 목숨을 살려줘서 고맙다고 하던 그녀였는데 다시 또 텔리의 말에 반기를 드는 것이었다. 그것이 죽음도 불사한 행동이라는 걸 잘 아는 텔리는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어. 그래. 이해는 간다만......”

건수는 텔리의 반응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뭐? 이해한다고? 앞에서 말만 잘못해도 버럭 화를 내고 드라마 한 편 놓치게 했다는 사소한 이유로 사람을 죽이려고 했던 사신이 대놓고 자기가 내린 명령을 지키지 않겠다는데 이해를 한다니.... 뭐야. 기준이 없어.’

텔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알렉시스, 네가 아직 모르는 게 있다. 난 다른 이들의 기억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는데, 아까 가짜 에뮤니우스놈의 기억을 읽었지. 그 속에 네가 관심을 가질만한 것도 몇 개 있었지. 예컨대 후안에 관한 것.”

“네? 가짜 에뮤니우스요? 그의 기억에 후안에 관한 게 있다고요.”

“어. 아주 흥미로운 게 있었지. 게다가 그놈의 지금까지의 기억은 바로 여기, 내 머릿속에 통째로 다 들어있어. 훗훗훗.”

“텔리님, 그게 뭔가요? 후안에 관한 게 뭐가 있었나요?”

“훗훗훗. 그거? 알고 싶지 않을 텐데?”

설마 그녀가 후안에 관해 알고 싶지 않을 리가 있나. 옛 애인에 관해서라면 유난히도 쉽게 평정심을 잃는 알렉시스는 마음이 급해졌다. 만약 텔리가 에뮤니우스의 기억을 전부 가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알았던 만큼의 정보라도 그녀에겐 유용할 것이다. 빨리 텔리가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는 한껏 여유를 부렸다. 그가 늑장을 부리는 통에 알렉시스는 안절부절못해서 입안에 침이 다 마르는 것이었다.

“어. 아주 흥미로운 게 있었지.”

알렉시스는 다시 얼굴이 바닥에 붙을 듯 고개를 숙이면서 텔리에게 사정했다.

“부탁드립니다. 텔리님! 제발 제게 후안에 관한 정보를 주세요! 제발...!”

그러자 텔리는 아주 천천히, 똑 부러지는 어조로 그녀에게 말했다.

“후안은 죽었다. 포기해.”

“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는 살아 있습니다. 그가 살아서 M의 옆에서 있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어, 그래. 네가 TV에서 그 상원의원과 함께 있는 그를 보았었지. 그런데 그건 네가 아는 후안이 아니야. 네 기억 속의 후안은 죽었다. 그리고 이 후안은 널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

“네? 그... 그럴 리가....!”

“내 말이 맞아. 에뮤니우스의 기억에서 본 것이다. 후안이 직접 에뮤니우스에게 그렇게 말했다. 너는 지나간 과거의 사람이라고. 너에 대한 감정은 모두 정리했다고. 또한 너도 자기에 대한 감정을 정리해달라고 했다.”

“아아..... 어떻게 후안이....”

텔리의 말을 들은 알렉시스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잠시 동안 바닥에 엎드린 채로 꼼짝 않고 있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텔리를 바라보는 두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