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4 부. 예언자들 - 74 화

예언자들 – 74

돌무더기에서 나온 알렉시스는 그야말로 지옥에서 걸어나온 악귀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있는지 잡아 죽일 듯한 눈빛으로 건수를 노려보는데, 그의 옆에 서있는 텔리는 아예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했다. 그녀는 활활 타는 불이 타오르는 팔을 흔들며 곧장 건수에게로 걸어왔다. 그녀가 한 발짝씩 자기에게 가까이 올 때마다 건수의 마음엔 두려움이 증폭되었다.

‘헉!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은데. 이걸 어쩌지?’

아무래도 건수는 덩치만 컸지 태어나서부터 쭉 쫄보의 인생을 산지라 불새 신전의 전사 중에서도 엘리트인 알렉시스의 당당한 모습에 위압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저... 저, 알렉시스...!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아까 일은 너무 급해서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된 거 같구요. 그 후에 돌 무더기 우르르 덮고 한 것은 제가 한 게 아니고 여기 텔리님이 작품 활동하신다고 한 건데.... 아무튼 그 불 좀 어떻게 끄고 어디 앉아서 얘기로 풀어 보면 안 될까요?”

“뭘 얘기하자는 거냐! 이 자식! 싸우다 말고 어디 엉뚱한 수를 쓰는 거냐! 하긴, 네 앞에 있었던 케르케로우스의 사제와 전사들도 전부 하나같이 겁쟁이였다고 들었다. 어디 제대로 맞서 보지도 못하고 우리 불새군의 손에 몰살당했다고 하더니 네 놈도 역시 한 바구니 속의 썩은 사과였구나. 겁쟁이 늑대처럼 너도 죽여주마!”

알렉시스가 내뱉는 말은 하나같이 케르케로우스와 그의 사제를 헐뜯는 내용이었다. 건수를 자극해서 이성을 잃게 한 후 빈틈을 노려 승기를 잡겠다는 그녀의 얕은 수였는데, 어찌된 것인지 건수는 흥분하기는커녕 손사래를 치면서 뒤로 자꾸 물러서는 것이었다.

“그들이 겁쟁이었건 아니었건 난 모르는 일이구요. 그러지 말고 그냥 말로 하자고요. 저기 경찰들도 있는데 불같은 걸로 자꾸 사람을 위협하시면 나중에 크게 후회하실 겁니다.”

“이런 뼈도 없는 녀석! 케르케로우스의 마지막 사제라고 하더니, 넌 너의 신수가 모욕을 당했는데도 그 따위 말이나 지껄이겠다는 거냐? 명예라곤 조금도 없구나!”

“아니, 내 앞에 있었던 선배 사제라는 사람들과는 일면식도 없는데 나랑 무슨 상관입니까? 그리고 뭐 난 미리 듣거나 잘 알아본 다음에 케르케님의 사제가 된 줄 아세요? 나도 억울하다고요. 그냥 평범하게 사는 사람이 이런 일에 휘말리는 게 얼마나 피곤한데요!”

알렉시스는 건수를 도발하여 실수를 끌어내려고 했던 자신의 작전이 크게 틀어지는 것을 느꼈다. 건수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녀석이었다. 아니, 화만 내지 않을뿐더러 아예 신수에게서 받은 힘을 거두고 있었다. 진정으로 그녀와 싸우기 싫어하는 것이 분명해보였다.

‘뭐지? 저 녀석! 화를 낼 줄 모르는 건가? 아니면 왜 저렇게 침착할 수 있지? 혹시 반대로 날 자극해서 공격을 이끌어내려는 건가? 그런데 왜 힘을 완전히 거두고 있는 거지? 진짜 나와 대화로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자기처럼 힘을 거둘 때를 기다렸다가 기습을 하려는 건가?’

알렉시스는 건수가 아까 보여준 괴력에 한 번 제압당했기 때문에 결코 그를 만만히 보지 않았다. 아니, 그게 오히려 문제였다. 사실 건수는 만만하기 그지없는 녀석인데, 그녀 혼자 그를 심하게 과대평가하는 바람에 쉽게 얻을 수 있는 승리를 놓치고 있었다. 그냥 공격해, 알렉시스. 그 녀석 보기보다 완전 허당인데..... 쯧쯧.

“너 이놈! 어서 힘을 끌어올려라. 난 긍지 높은 불새의 전사다. 릴리카처럼 무차별적인 살육을 즐기는 저급한 전사와는 다르다. 정정당당하게 나와 맞서면 비록 네가 내게 지더라도 명예롭게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네 놈은 어차피 죽을 거, 비굴하게 굴다가 죽을 텐가!”

건수는 난감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는 계속 뒷걸음쳤다.

“명예로운 죽음이라뇨? 죽으면 죽는 거지 무슨 명예로운 죽음이 있어요? 전 전혀 죽고 싶지 않으니까 제발 그냥 살려주세요. 아까 당신을 담벼락에 던진 일은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케르케님의 육체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요. 정말 텔리님도 그렇고 알렉시스 당신도 왜 케르케님과 절 이렇게 못살게 구십니까. 제발 절 살려주세요.”

알렉시스는 그녀 나름대로 어차피 죽을 녀석에게 최대한 명예를 훼손하지 않겠다고 배려한 것인데 건수의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아니, 케르케로우스도 죽어버린 마당에 그 사제란 놈은 그와 운명을 함께 하기는커녕 자기 한 목숨만 생각하고 있다니. 비굴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구나!’

건수의 태도는 알렉시스의 타오르는 살기에 기름 한 바가지를 끼얹는 격이었다.

“이... 이... 이 버러지 같은 놈! 네놈은 모든 신전 사제들과 전사들의 수치다. 그래, 네놈 같은 녀석에게 처음부터 지킬 명예가 어디 있었겠느냐. 네놈의 이름은 후대에 남길 가치도 없다. 죽어라. 네 몸을 흔적도 없이 태워주마!”

알렉시스는 불타는 주먹을 어깨 위로 치켜 올리며 건수에게 달려들었다.

“아아악! 텔리님! 살려주세요. 알렉시스 좀 말려줘요!”

건수는 너무 급한 나머지 텔리에게 중재를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둘을 보고 웃으며 엉뚱한 대답을 했다.

“야, 너도 알렉시스와 똑같은 성전 전사인데 왜 그렇게 걱정을 하고 그러냐. 케르케로우스가 준 힘을 써봐. 훗훗훗.”

“예전에 힘을 받긴 받은 것 같은데 어디다 뒀는지 쓰고 싶어도 못 써요. 으아아. 사람살려.”

건수는 자기에게 달려드는 알렉시스를 보고 바짝 얼어붙었다. 그녀가 불이 붙은 주먹을 크게 휘두르자 그는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가 귀에 거슬렸는지 텔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손으로 귀를 막았다.

‘휘익!’

건수의 코 바로 앞에서 화염이 검은 연기를 공중에 그리며 지나갔다. 그는 운 좋게 알렉시스의 공격을 피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또 다시 주먹을 뻗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도 건수는 코앞에서 간발의 차로 공격을 피하는 것이 아닌가.

“이 자식이 죽는 것에도 늑장을 부릴 테냐!”

“제발 화를 푸시고 절 살려주세요! 텔리님! 그냥 보시고 계시지만 말고 이 여자를 말려주시라니까요!”

건수의 간절한 부름에도 텔리는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야, 건수야. 방금 알렉시스의 공격을 피한 건 어떻게 한 거냐? 그 궤도였으면 완전히 얼굴에 꽂힐 것 같은 주먹이었는데?”

“아, 몰라요! 이크! 또 온다.”

‘휘익-!’

이번에도 건수는 알렉시스의 주먹을 피할 수 있었다. 다만 지금의 경우, 간발의 차이로 피한 것이 아니라 정확히 주먹을 보고 깨끗하게 피했다.

‘뭐야! 이 녀석! 역시 실력을 숨기고 있었어.’

알렉시스는 자신의 주먹이 다가오는 것을 제대로 피하는 건수를 보고 처음으로 일이 잘못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놀라서 잠시 멈칫거렸다. 떨어진 곳에서 둘을 지켜보던 텔리가 건수에게 외쳤다.

“지금이야. 옆구리!”

그 소리를 들은 건수는 자기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공간을 만들기 위해 한 발짝 뒤로 빠지더니 오른 다리를 축으로 삼아 몸을 비틀었다. 허리와 몸통이 돌아가면서 왼 다리를 쭉 뻗었다. 보통 사람의 몇 배나 빠른 동작이었다. 그의 기민한 동작은 알렉시스가 눈으로 따라가기도 벅찼다.

‘퍽!’

“아아악!”

알렉시스는 옆구리에 건수의 일격을 맞고 쓰러졌다. 건수는 등을 돌려 텔리를 한번 쳐다보았다. 그도 건수가 방금 한 일이 믿기 어려운지 입을 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