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부. 만월의 밤 - 39 화
만월의 밤 – 39
텔리와 인간들은 멧돼지 산신령의 신령한 장소에서 지내게 된지 어느덧 한 달이 넘었다. 알렉시스는 그동안 열심히 수련한 덕분인지 텔리가 심어준 힘을 어느 정도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미스터 황도 가만히 허송세월만 하진 않았다. 한 달 동안 옴니테바를 사용해서 잠만 자고 있던 건수의 친구, 싸이언스를 치료했던 것이었다. 그 결과, 싸이언스의 상태는 조금씩 나아져서 이제는 이따금 정신을 차려서 일어나 앉아 있기도 했다. 하지만, 에뮤니우스가 그의 몸에 직접 주입한 독이 워낙 독한 것이었는지, 그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잠만 잤다. 마치 신생아처럼 말이다. 그래도 건수의 친구들은 조금씩 호전되어 가는 친구의 상태를 보고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강원도 아저씨와 함께 숲속에서 찾을 수 있는 산삼 등의 약초를 열심히 캐내서 친구에게 먹였다. 전에 아저씨는 한 번 이곳에서 산삼을 캤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산삼에 대해 꽤나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내의 중병이 다 나아서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발견한 대부분 산삼과 약초를 싸이언스의 치료를 위해 양보했다. 다시 시력을 회복해서 볼 수 있게 된 할머니는 이젠 외국어에도 관심이 생겼는지, 여신 이디레이아의 또 다른 예언자인 라볼타 사장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아니라면 알렉시스에게 다가가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렇게 영어를 배울 수 있게 된 것은 그녀가 알렉시스와 라볼타와 엘리시움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가끔씩 깊은 생각에 빠진 채 조금 우울해 보이는 얼굴을 할 때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다시 눈을 뜨게 되면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는 예언 때문인 것 같았다. 만약 그것 때문에 우울한 심정이 아니라면, 오랫동안 소경으로 살면서 좋은 세상을 보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을 느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도 아니라면, 지금은 인생을 정리하는 시간이라 많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돌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라볼타는 곁에서 할머니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는 한국에 오기 전 LA에서 매일매일 쳇바퀴가 돌아가는 듯 바쁘고 복잡한 나날을 보냈다. 그저 그런 생활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조용히 사색할 시간을 갖게 되니 자기 삶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자칫 갑갑하고 지루할 수 있었던 공동 대피 생활이었지만 그는 모처럼 찾아온 여유를 즐기는 것이 꽤 만족스러웠다.
다만 한 가지, 그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우려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식량의 고갈이었다. 할머니의 지시에 따라 최대한 식량을 많이 가져왔지만, 곧 며칠 내로 동이 날 지경이었다. 의외로 많이 먹을 것 같았던 멧돼지 산신령과 스라소니 산신령은 한 달 동안 단 한 번도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리고 텔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늘 배고프다고 투덜거렸지만, 미스터 황이 그의 접시에 음식을 담아 건네주면 먹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전혀 음식을 먹지 않아도 평소 때와 다름없는 그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 미스터 황이 그에게 물어보니, 엘리시움의 신들은 굳이 식사하지 않아도 사는 데 큰 지장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신들이 굳이 음식을 먹는 이유는 식사의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라고 했다.
강원도 아저씨와 할머니가 텔리와 신령들에게 밖에 나가서 식량을 구해와야겠다고 말하고 있을 때였다. 좀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라볼타 사장이 거구를 이끌고 어슬렁거리며 텔리에게 다가왔다. 그를 향해 오는 라볼타를 발견하고 텔리가 먼저 말을 걸었다.
“뭐야, 못생긴 뚱보?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
라볼타는 자기를 뚱보라고 부르는데도 씨익 웃었다. 텔리는 그를 보고 얼굴을 구겼다.
“뭐야? 웃어? 감히 너가 지금 날 보고 웃었냐? 이 자식, 영 기분 나쁜 놈일세. 확 그냥 네 놈 몸통을 반으로 뚝 잘라서 그 웃고 있는 얼굴에 네 엉덩이를 쑤셔 박아줘도 지금처럼 똑같이 웃을 수 있겠냐?”
텔리가 지껄이는 엘리시움어를 전부 이해할 수 있는 할머니는 놀라서 입을 벌렸다. 그녀가 듣기에도 텔리의 말투는 너무도 상스럽고 공격적이었다.
“호호호... 이런. 이런.”
라볼타가 입을 열자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디레이아의 목소리였다. 텔리는 기분이 확 상해서 경멸의 눈초리로 라볼타의 얼굴을 쳐다봤다.
“쳇. 이디레이아였군. 재수 없게......”
“텔리, 오랜만에 봤는데 나한테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나요? 정말 입에 걸레를 문 것 같아요.”
“뭐... 뭐야! 이 년이 진짜 돌았나!”
텔리의 눈이 번쩍거리며 빛을 냈다.
“너, 이디레이아! 내가 엘리시움에 돌아가면 반드시 네 본체를 찾아서 열 조각을 내버릴 거야!”
“아니, 내가 뭐라고 했다고......”
“그뿐만이 아니야! 네 생명의 정수를 뽑아내어 마셔주마!
“세상에..... 그런 끔찍한 말을....”
“다시는 부활할 수 없게 만들 거야! 아무도 네 흔적을 찾을 수 없게! 으아아아악!”
“호호호. 정말 어이가 없네. 여기 텔리를 좀 봐요. 미쳐도 한참 미친 것 같죠?”
라볼타의 몸에 들어온 이디레이아는 어이가 없어서 실실 웃으며 할머니와 강원도 아저씨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두 사람은 갑자기 길길이 날뛰는 텔리 때문에 겁을 먹고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디레이아의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었다.
“뭐, 날 죽이러 올 거면 얼마든지 그러던가요. 그게 가능하기라도 하면 말이죠.”
“뭐야! 이 요망한 년! 본체는 어디다 숨겨두고 정신만 둥둥 떠다니는 게! 귀신같은 년! 아아아아악! 죽이겠다! 널 반드시 죽이겠어! 그것이 내 목표야! 널 죽이는 것! 죽여! 죽여! 죽여! 죽여버릴 거야!”
“와.... 못 말리겠다. 진짜. 이봐요. 텔리. 그렇게 누굴 죽이고 싶으면 밖에 나가서 그러던가. 왜 여기서 난리를 피워요?”
눈에서 불을 뿜고 있던 텔리는 순간 침착해져서 그녀에게 물었다.
“엥? 이제 때가 된 거야? 오늘이 밤에 보름달이 뜨는 날이야?”
“그래요. 그동안 이곳에 있느라고 좀이 쑤셔서 민감해진 거라면 이젠 안 그래도 된다고요. 적들은 당신이 원하는 만큼 밖에 잔뜩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이젠 미쳐가지 않아도 돼요. 호호호.”
“하······. 웬일이야. 네가 좋은 소식을 가져다줄 때도 있네. 내가 좀이 쑤셨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민감해진 건 아니야. 난 이보다 훨씬 오랫동안 그 빌어먹을 바이를 가둬놓은 감옥에서 그를 감시한 적도 있다고. 심지어 그때도 난 미치지 않았어.”
“그러네요. 당신의 형 때문에 그런 적이 있었죠.”
“자, 이제 나가봐야지! 훗훗훗.”
텔리는 알렉시스와 미스터 황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아, 잠깐만! 그런데 이디레이아. 넌 어떻게 한 달 만에 여기 들어온 거지? 멧돼지 신수가 그 번쩍거리는 문을 열어주지도 않았잖아?”
“호. 호. 호. 호. 당신 일이나 신경 써요. 괜히 내가 하는 일을 궁금해하지 말고.”
“뭐야! 이게 진짜!”
텔리가 다시 성질을 내자 이디레이아는 재빨리 라볼타의 몸에서 빠져나갔다. 라볼타는 다시 자기 몸을 제어할 수 있게 되자마자 안전을 위해 텔리로부터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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