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부. 만월의 밤 - 1 화
만월의 밤 – 1
건수는 택시를 타고 친구들을 만나러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약속 장소는 다름 아닌 몇 달 전 싸이언스가 며칠 입원했었던 종합병원이었다. 그가 주위를 둘러봐도 거리에 차만 지나다닐 뿐 어디에도 친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 친구들이 어디 있는 거지? 먼저 와서 기다린다고 했는데.”
그가 핸드폰을 꺼내어 친구 도원광에게 전화를 걸려고 할 바로 그 때, 그의 앞에 한 대의 승합차와 세단이 와서 나란히 섰다. 승합차의 뒷문이 열리자 여러 사내들 사이에 앉아 있는 도원광과 좐슨이 건수의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팔이 뒤로 묶인 채 각각 두 개의 날카로운 칼끝이 양 옆에서 그들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승합차 안에서 양 형사가 고개를 내밀어 쓰고 있던 썬글래스를 살짝 코에 걸치더니 건수에게 말을 걸었다.
“네 놈이 건수냐?”
“네. 그런데 내 친구들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당신들은 누구세요?”
양 형사는 즉각 대답을 하는 대신 손가락으로 뒤에 서 있는 검은 세단을 가리켰다.
“넌 저 뒤에 있는 차를 타고 와. 허튼 짓을 하면 네 친구들은 다시 볼 수 없을 줄 알아라.”
그가 말을 마치자 승합차의 조수석의 창문이 내려가더니 조 회장이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 건수를 아래위로 훑어 본 후 그의 눈을 직접 쏘아봤다. 건수는 조 회장과 눈이 마주치자 본능적으로 눈을 아래로 깔았다. 그의 힘은 보통 사람의 몇 배나 세지만, 여전히 속으로는 소심하고 겁이 많았다. 조 회장이 건수가 체격이 워낙 좋으니까 성깔도 있을 것 같아 한 번 사납게 쳐다 본 것이었는데 그가 바로 시선을 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건수를 우습게봤는지 콧방귀를 한 번 뀌더니 유리창을 올렸다.
승합차의 뒷문이 닫히자 건수는 두려운 마음을 안고 뒤에 주차된 검은 색 세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딱 봐도 엄청나게 무서운 사람들 같은데... 그래, 조폭. 저들은 조폭이야. 아니, 원광이와 순이가 왜 저런 사람들에게 잡혀있는 거지? 손도 묶여 있고 칼도..... 어... 어떡하지?’
건수가 잔뜩 겁에 질린 모습으로 세단 앞으로 걸어가 서자 세단 뒷좌석의 유리창이 내려갔다.
“하이! 케르케로우스의 사제. 오래간만이야.”
“아니, 당신은 릴리카!”
그에게 인사를 건넨 사람은 릴리카였다. 그리고 뒷문을 열렸는데 그 문을 연 사람은 놀랍게도 에뮤니우스였다.
“에... 에뮤니우스!”
“그래, 사제. 여러 번 만나는군. 아니, 너무 자주 만나는 거 아니야?”
“당신이 어떻게.....”
“살아있냐고? 아니면 여기 이 분들과 함께 있냐고?”
“당신은 분명 그 때.....”
“응, 그래. 텔리, 그는 정말 대단하더군. 살육의 신의 잠깐 실수 덕에 이렇게 아직 살아있다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어서 차에 타. 앞 차에 탄 친구들은 자네처럼 그렇게 자유로운 몸이 아닐 테니까. 그들을 생각하면 빨리 그 고통에서 풀어줘야 하지 않겠어?”
“......”
건수는 잠시 망설였지만 친구들이 인질로 잡혀있는 위험한 형국이라 차에 타지 않을 수 없었다.
* * *
건수는 에뮤니우스와 릴리카 사이에 앉게 되었다. 릴리카의 세단은 대형 세단이었지만, 건수의 몸집이 워낙 커서 그가 아무리 양 어깨를 움츠리고 있어도 뒷좌석에 앉은 세 사람은 불편함을 느꼈다. 릴리카가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을 하고 건수에게 엘리시움어로 말을 걸었다.
“케르케로우스의 사제의 덩치가 보통 큰 게 아니네. 늑대는 사제를 뽑은 건가 아니면 전사를 뽑은 건가?”
“......”
건수가 대답하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자 에뮤니우스가 대신 대답했다.
“원래 케르케로우스님은 성격상 그리 많은 전사들을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전에도 당신의 신전을 지키는 최소한의 병력만을 두셨습니다. 사제 역시 다른 신전에 비하면 그 수는 적었습니다. 아마 이번에 이 세계의 사람을 사제로 만드신 것은 실수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이 자 외에 다른 사제를 두지 않으신 것을 봐도 제 예상이 맞을 겁니다.”
릴리카는 에뮤니우스의 말에 ‘쯧쯧’ 거리며 혀를 찼다.
“그 늑대가 워낙 멍청한 거지. 아무리 자기 영토가 중립지대로 인정받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외부의 침입에 대해 대비하지 않았었던 것 말이야. 검은 방의 주인 자리는 누구나 탐을 낼 수 있는 자리인데 그렇게 무방비였다니... 우리 불새군이 케르케로우스의 땅을 처음으로 밟았을 때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황당했었던지. 국경의 한 마을에선 주민들이 우리 군을 위해 물과 먹을 음식을 갖다 주더군. 그 때 알았지. 그 땅의 주민들은 멍청하구나. 케르케로우스도 멍청하구나. 호호호.”
건수는 릴리카가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하지 못했지만 대충 들어도 케르케로우스를 깎아내리는 내용인 것 같아 눈을 감아버렸다. 눈꺼풀처럼 귀를 닫는 덮개가 없는 것이 내심 아쉬웠다. 에뮤니우스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의 주민들은 아주 순박한 사람들입니다. 케르케로우스님은..... 일단 평화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고요. 신전의 경비대장과 치안대장이 불새군의 출정 소식을 듣고 그 분께 몇 번이고 고언을 드렸지만 늘 느긋한 자세를 고수하셨습니다. 그나마 그 곳에서 유의미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중에선 제가 가장 현실적이었죠. 그래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이었습니다.”
릴리카가 한 쪽 입 꼬리를 올리며 에뮤니우스를 쳐다봤다.
“가장 현실적인 선택?”
“네, 그리고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죠.”
“그 입 다물어라. 이 배신자 새끼야. 동료를 배신하고 우리와 내통해서 다 죽게 만들어 놓고는 뭐? 현실적이고 현명한 선택?”
그러자 에뮤니우스 역시 차가운 시선을 릴리카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눈빛을 보고 순간 맘속으로 놀랐다.
‘오, 이 녀석 봐라. 한 번도 아니고 또 이렇게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는구나. 이 늙고 겁 많은 개가 뭘 믿고 이렇게 자신만만한 거지?’
에뮤니우스는 콧구멍을 넓혀 뜨거운 숨을 한 번 내뱉더니 입을 열었다.
“배신자라뇨? 그 당시 에피로제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협조한 제 공로를 치하하셨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절 불새의 조력자라고까지 부르셨습니다. 릴리카님께서 계속 절 하대하시고 비난하신다면 그게 바로 에피로제님의 뜻을 무시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뭐야! 이 자식이 어디 감히!”
릴리카의 얼굴이 무섭게 변하면서 그녀가 버럭 화를 내었다. 그러자 앞 좌석에 타고 있던 이사우라가 고개를 뒤로 돌리며 에뮤니우스를 바라봤다.
“에뮤니우스, 더 이상 실수하지 마. 그 다음은 나도 참지 않겠어. 그리고 케르케로우스의 사제, 넌 네 친구들의 목숨을 살리고 싶다면 에뮤니우스처럼 우리에게 잘 협조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의 대장이신 릴리카님의 질문에 재깍재깍 대답하고.”
건수는 대답대신 긴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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