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4 부. 예언자들 - 91 화

예언자들 – 91

이디레이아의 갑작스런 퇴장은 등장만큼이나 예상을 깨는 것이었다. 텔리는 잠시 넋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스터 황이 그에게 물었다.

“텔리님,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떡할까요?”

“으응? 아..... 엣헴. 뭘 할 게 있겠냐. 적이 여기로 오고 있다는데. 일부러 찾아갈 필요도 없고 얼마나 일이 간편해졌어. 다만 내 형과 관계된 그 M이란 놈이 거슬린다. 내 원래 계획은 바이와 함께 힘을 합쳐서 베토케로우스를 잡는 것이었지만 그 둘이 편을 먹었을 줄이야. 일이 두 배로 힘들어진 거지.”

‘그럼 어쩌자는 거지?’

미스터 황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텔리가 뒷목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뭐, 이렇게 하자. 먼저, 피할 사람들은 다 피하자구. 특히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건수 친구는 여기 계속 누워있다간 험한 일을 당할지 모르니 이집 주인, 예의 없는 놈이 아내와 함께 차로 안전한 곳에 데려다 줘. 또 펠리시아가 아버지를 만나러 가게 공항에 가는 것도 도와주고. 벤이 오는 날이 오늘이었나... 내일이었나...? 아무튼 펠리시아는 아버지가 미국에서 온다고 하니까 맞으러 가기로 하고.”

펠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알겠어요. 하지만 아버지를 만난 후 여기 다시 올 거예요.”

그러자 미스터 황이 그녀를 말렸다.

“제발 그런 말하지 말아요. 제 느낌 상 여긴 아주 험한 광경이 펼쳐질지도 모르는데 뭐 하러 다시 오겠다는 거예요?”

“어머니의 원수, 에뮤니우스의 끝을 내가 맺어야 하니까요! 그 여신이 하는 얘기를 당신도 들었잖아요. 에뮤니우스, 그놈이 M과 함께 있댔어요. 내가 반드시 내 손으로 그놈을 끝장낼 거란 말이에요.”

텔리는 팔짱을 낀 채로 펠리시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펠리시아, 네 마음은 내가 충분히 이해하지만, 네가 진정 쥬니아의 복수를 하고 싶다면 네가 할 수 있는 일일 해줘야 돼.”

“그게 뭔데요?”

“우리가 에뮤니우스를 잡을 동안 최대한 안전하게 있기.”

“그... 그래도 난... 반드시 에뮤니우스를 내 손으로!”

펠리시아가 자기만의 고집을 부리자 텔리는 좀 더 강경한 태도로 대답했다.

“아니야. 펠리시아. 꼭 네 손을 더럽히지 않더라도 내가 에뮤니우스를 처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네가 직접 복수를 하는 것과 진배없어. 왜냐면 나는 네 대리인으로서 에뮤니우스를 처리할 거니까. 내가 약속할게. 반드시 네 어머니, 쥬니아의 복수를 해주마. 넌 내가 신이고 그 약속을 꼭 지킬 거라는 걸 믿지? 그렇지?”

펠리시아는 자기가 직접 어머니의 복수를 할 수 없는 형편이란 것이 분했다. 그녀의 두 눈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꼭 쥔 주먹을 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네... 믿어요. 텔리... 꼭 우리 어머니의 복수를 해줘요.... 꼭!”

텔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펠리시아의 말이 끝나자 건수가 손을 들었다.

“저, 질문이 있습니다.”

텔리가 손을 든 건수를 보며 얼굴을 구겼다.

“얼뜨기 자식아, 말하고 싶으면 그냥 말하면 되지. 손을 왜 들어? 여기가 학교야?”

“아니, 저... 제 친구 싸이언스를 안전한 곳에 옮기자고 하셨는데, 그럼 제가 녀석을 데리고 잠깐 집에 다녀올까요?”

텔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곤란해. 넌 사제지만 힘만큼은 다른 신전 전사나 다름없는데, 그렇다면 너도 중요한 자원이잖아. 검은 늑대들이 쳐들어오면 너도 우리와 함께 싸워야지.”

“그럼 제 친구가 있을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 베토케로우스나 M도 찾지 못할 곳이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환장하겠군!”

텔리는 입을 벌리고 이마를 쳤다. 그가 보이는 이상한 행동에 건수는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했다.

“더어! 바보야, 생각을 좀 해봐. 아무나 찾아올 수 없는 안전한 곳이 어디 있겠냐? 멧돼지 산신령의 접힌 공간으로 옮겨 놓으면 되잖아!”

멧돼지 산신령의 접힌 공간이라... 과연 그렇네. 거기가 딱 어울리는 장소다. 거기는 결계가 쳐져 있으니 함부로 누가 들어올 수는 없을 것이다. 혹시 누가 찾아보려고 해도 주인의 허락 없이는 입구를 찾을 수도 없다. 텔리는 아저씨 내외에게도 안전을 위해서 싸이언스와 함께 그곳에 있으라고 했다.

텔리는 시선을 알렉시스에게 돌렸다. 그녀는 어제부터 몸이 좋지 않은지 다소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렉시스, 몸이 좀 어때? 왠지 창백해진 것 같군.”

“잘 모르겠습니다. 어제 텔리님의 힘을 받은 후 몸살에 걸린 것처럼 컨디션이 좋지 않군요.”

텔리는 두 손가락으로 자신의 황금색 콧수염을 만지며 알렉시스의 컨디션이 왜 난조인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한 동안 그의 헤이즐넛색의 눈동자가 초점이 흐려지더니 곧 그 중간에 있는 금색 띠가 살짝 빛났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본 건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또 빛났어. 텔리님의 눈에서 아주 얇은 금색 띠가 아주 잠깐이었지만 빛났어. 겉보기에 다른 건 다 우리 인간과 비슷한데 눈만은 확실히 달라.’

다른 사람들은 유의 깊게 보지 않았지만 건수는 텔리의 눈에 순간적으로 빛나는 원형의 금색 띠를 유심히 본 것이었다. 텔리는 무슨 좋은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알렉시스에게 말했다.

“음... 좋아. 방금 내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어. 이리 와봐. 내가 잠시 네 몸 상태를 점검해 보겠다.”

그는 가까이에 온 알렉시스의 이마에 손을 댔다. 그의 손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의 몸 상태를 읽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역시... 어제 봤던 것이 정확했어. 네 안에 있는 불새의 힘이 새로 불어넣어준 내 능력과 서로 융화되지 못하고 있군.”

알렉시스의 창백한 얼굴에 실망감이 비쳤다.

“그러면 어쩌죠? 에피로제님이 주셨던 힘을 포기할까요?”

“아니. 뭐, 사실 불새 녀석의 별 볼 일 없는 힘 따위 버리라고 말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 힘도 아깝지. 검은 늑대들과 맞서 싸울 때 젖 먹던 힘까지 다 사용해야 할 것 아냐? 일단은 바닥에 바로 누워봐. 내게 생각이 있다.”

알렉시스가 마룻바닥에 눕자, 텔리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댄 채로 입으로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그의 손에서 나오던 빛이 알렉시스의 이마를, 또 조금 지나자 몸 전체에서 하얀 빛이 나오게 되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자 알렉시스 몸에서 나오던 빛이 사라지고 신기하게도 그녀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텔리님. 기분이 훨씬 나아졌어요.”

“응, 그래. 네 얼굴빛이 벌써 좋아졌어.”

미스터 황이 질문했다.

“텔리님, 지금 알렉시스를 어떻게 고치신 건가요? 어제 불어넣어주신 힘을 다시 회수하신 건가요?”

“아니야. 알렉시스 몸에는 불새의 힘이 저장되어 있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내 힘도 같이 들어있었던 거거든. 그래서 내 힘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알렉시스?”

텔리는 알렉시스에게 말했다.

“예. 텔리님.”

“내가 준 힘은 비상시에 사용하라고 네 머릿속의 다른 곳에 넣어두었다. 두 힘이 한 곳에 있으면 자꾸 서로 충돌하니까 평소에는 발현이 되지 않을 거야. 어때? 한 번 새로 힘을 저장한 장소를 느낄 수 있겠어?”

알렉시스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두 번 시도했지만 텔리의 힘이 들어 있는 장소를 느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잘 감지되지 않습니다.”

“자꾸 연습해야 돼. 내가 준 힘은 모두 네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그 보관 장소를 느껴야 돼. 그래야 어느 순간에 꺼내 쓸 수 있다. 오늘은 약간 시간이 있으니까 혼자 연습을 통해서 자꾸 의식하도록 해. 그리고 너, 쾅식이.”

이번에 그는 미스터 황을 보고 말했다.

“너도 마찬가지야. 네게 흘러들어간 나의 힘은 좀 더 직접적이었다. 원래 그런 식으로 신의 힘이 전달되면 받은 사람이 거의 반드시 죽게 되는데.....”

“그런데 전 안 죽었네요?”

“음... 그래. 아무래도 네 몸과 내 힘이 생각보다 조화가 잘 된 모양이야. 아무튼 너도 알렉시스와 비슷하게 내 힘을 받았으니 얘랑 둘이 같이 힘을 끌어오는 연습을 하도록 해. 그럼 너도 다른 신전의 사제들 못지않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능력’이란 말을 듣자 미스터 황의 눈에서 빛이 났다.

“그럼 저도 알렉시스처럼 손에서 불도 나오게 하고 그럴 수 있나요?”

“뭐? 불이라니... 뭐 하러 그렇게 남의 이목을 끄는 걸 좋아하냐? 인마, 그런 건 누굴 죽이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야. 오히려 불편하지.”

“아니, 누가 누굴 죽여요. 전 차라리 불이 좋겠네요. 사람들한테 보여주면 좋아할 거예요.”

텔리가 표정이 씁쓸해졌다.

“어휴... 어쩌다 이런 놈한테 내 능력이 흘러가서....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가 따로 없군. 쯧쯧쯧. 모르겠다. 그것도 운명인가 보지. 어쨌거나 네 능력이 어떻게 발현될 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전에 골목에서 오토바이를 아무렇지 않게 들고 유리컵도 쥐어서 깨질 정도인 것을 보니 일단 남들보다 힘은 조금 세진 것 같은데, 그게 끝이 아닐 거야. 능력이 어떻게 발전되는 지는 시간이 흐르면 알 수 있게 된다.”

미스터 황은 텔리의 말에 희망을 좀 갖게 되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앙숙처럼 서로 싸우던 미스터 황과 알렉시스는 때가 때이니 만큼 그만 싸우고 서로 협력하자고 결의했다.

* * *

사람들은 이디레이아가 준비한 아침식사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다들 일어나서 바쁘게 하루를 시작했다. 미스터 황과 알렉시스는 눈을 감고 자기들의 머릿속에 저장된 텔리의 힘을 감지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아저씨는 자신의 겉옷 주머니에 대고 멧돼지 산신령과 접힌 공간에 들어가는 일에 대해 대화하기 시작했다. 사모님은 펠리시아를 서울에 데려다 주기 위한 준비를 했다. 건수는 깊은 잠에 빠져든 할머니와 친구 싸이언스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건수가 싸이언스의 얼굴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고 있는데 그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누구지? 아직 꽤 이른 아침인데?”

그가 핸드폰을 집어 들고 발신인이 누군지 확인하자 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도원광? 원광이구나! 야, 싸이언스. 눈 좀 떠봐. 원광이가 내게 전화 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