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6 부. 솔로우스 - 57 화

솔로우스 – 57

앞장서서 걸어가는 텔리의 뒤를 따라 미스터 황과 알렉시스가 걸어갔다. 미스터 황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봐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이디레이아를 가까이서 보게 되니 가슴이 설레어 하는 듯 했다. 그는 예의를 지킨다고 겉으로는 애써 침착해하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몹시 기뻐하는 게 분명했다. 숨기려고 해도 그의 입 꼬리가 슬쩍 슬쩍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알렉시스는 표정이 그리 밝지 못했다. 그녀 역시 이디레이아 앞에선 감정을 숨기려고 했지만 어두워진 낯빛을 전등 스위치를 올리듯 쉽게 밝게 만들지는 못했다.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이는 걸로 보아 그녀는 지금 이곳에 그들이 있는 것이 뭔가 석연치 않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지금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들여다보도록 하자.

‘이상해. 이디레이아님은 분명 우릴 여기로 유인하신게 맞아. 처음엔 검은 방의 입구로 가는 길이냐며 우리에게 물으셨지. 그리고 마치 거기로 빨리, 수월하게 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하시는 것 같이 말씀하셨지만, 정확히 거기로 우리를 이끈다고는 하지 않으셨어. 다행히 그때 텔리님은 이 여신의 계략을 어느 정도 눈치 채셨던 것 같아. 그래서 단번에 거절하셨지. 그랬더니 그 다음엔 베토케로우스가 다시 부활해서 텔리님을 노릴 것이라고 하셨는데..... 하지만 그 때까지도 텔리님은 당신의 능력을 믿으시니까 넘어가지 않으셨었어. 그리고 여신이 세 번째로 꺼냈던 카드가 바로 ’운명‘이라는 것이었는데, 텔리님은 아쉽게도 거기서 넘어가셨던 거야. 텔리님은 도무지 운명이란 단어와는 전혀 연관이 없으실 것 같은데, 왜 실수하신 걸까?’

그녀의 생각은 이랬다. 다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기 나름대로 상황 판단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알렉시스를 보고 미스터 황이 그녀에게 물었다.

“알렉시스, 뭘 그렇게 열심히 생각해? 저 긴 탁자 말이야. 꼭 중세시대 왕이 연회를 베풀 때 앉는 그런 식탁 같지 않아? 맞아. 그러네. 그럼 무슨 요리도 나온다는 걸까? 아우.... 오늘 하루 종일 고생만 했더니 맛있는 밥이라도 실컷 먹고 싶다. 아마 만찬이 나올 것 같은데?”

알렉시스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 머저리 자식아. 넌 지금 이렇게 이상한 곳에 끌려오고도 겨우 생각한다는 게 음식이냐? 넌 케르케로우스님이나 건수 걱정은 안 하냐? 그리고 사라진 데디쿠스는?”

“응? 그 둘은 먼저 검은 방에 간 것뿐인데. 뭔 일이 있겠어? 게다가 케르케로우스님은 검은 방의 주인이시잖아. 무슨 문제가 있더라도 주인이 집에 딱 가서 있으면 일이 척척 해결되는 법이라고. 그리고 데디쿠스 녀석은...... 어디 보자. 그놈은 걱정 안 해도 돼. 걘 취미가 생존인 녀석 같더라고. 동료들이 다 죽어나가도 어떻게든 살아남았잖아. 뭐, 사실 그놈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왜 걔 걱정을 해야 해? 안 그래?”

“에라이. 이 한심한 놈아.”

알렉시스는 그 얘기를 듣고 당장 불주먹을 만들어서 이 녀석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놔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 이디레이아의 공간에선 그런 일은 금지된 것이었다. 더욱이 그녀의 불주먹으로 꿀밤을 주면 아마 미스터 황은 단번에 불타서 죽어버릴 것이다. 그녀의 불주먹은 진짜 불주먹, 즉, 진짜 불이 붙은 주먹이니까.

* * *

텔리와 일행은 이디레이아의 반대쪽에 가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이디레이아도 반대쪽 끝의 자리에 앉았다. 이디레이아가 먼저 대화를 시작했다.

“아니, 자리에 앉는 것 자체가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그 난리를 피워요? 내 집, 남의 집 분간이 안 가요? 손님이라면 손님답게 행동해야 하는 거잖아요.”

텔리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 다시 끓어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애쓰는 것이었다.

“이봐. 운명의 여신. 난 지금 바빠. 그리고 나도 아까 질문 하나 했는데 넌 아직도 답해주지 않았어. 너 왜 우리를 여기 데려온 거야? 무슨 목적이 있지. 그렇지?”

“호호호. 텔리.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어딨어? 바쁘면 질러가야지. 왜 돌아가? 그건 멍청한 거잖아!”

“어딨긴요? 그건 이곳 한국의 속담이라고요. 바쁠수록 천천히,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거예요. 그 정도는 알아야죠. 모처럼 한국까지 왔는데 말이에요.”

“한국의 속담? 내가 왜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지?”

“다른 나라에 방문할 땐 그 나라 역사나 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가면 좋은 거예요. 그래야 살면서 배우는 것도 많아지고 말이에요. 당신이 몇 천 년, 몇 만 년 동안 발전이 없는 게 그런 이유에서 비롯되는 거라고요,”

“뭐야! 이게 미쳤나? 진짜 아까부터 계속 내 성질을 긁기만 하네!”

“텔리님. 진정하세요......”

다시 분노하기 시작하는 텔리를 보고 알렉시스는 불안해했다. 일단 그를 진정시키고 그녀는 이데레이아를 보며 생각했다.

‘그래. 역시 수상해. 이디레이아님은 계속 텔리님을 자극하고 계셔. 텔리님이 질문하신 것에는 일절 대답하지 않으시면서 사소한 것으로 텔리님을 자극하고 계시다고. 텔리님은 화약고 같으신 분이라 조금의 자극만 있어도 크게 반응하시는 분인데...... 이디레이아님도 그걸 잘 아실 텐 데 왜 굳이 그러시는 걸까? 그 덕분에 자꾸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 어서 빨리 이곳을 나가서 검은 방의 입구로 가야 할 텐데.’

텔리는 이디레이아에게 재차 물었다.

“빨리 대답해. 너 왜 우릴 여기로 데려와서는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있어. 넌 무슨 목적이 있어. 그렇지?”

이디레이아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목적이요? 목적이야 당연히 있죠.”

“그게 뭔데?”

“바로 당신들을 여기에 잠시 묶어두려는 것. 그것이 내 목적이죠.”

텔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손바닥으로 탁자를 ‘쾅’하고 내리쳤다.

“뭐야?”

이디레이아는 텔리의 행동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왜 화를 내는 거죠? 난 내 일을 하는 것뿐인데요. 당신이 살육의 신이어서 눈만 뜨면 누구든 죽이는 것처럼, 나도 다른 자의 운명을 안내해야 하는 일을 해야지요.”

“뭐야? 다른 자의 운명을 안내한다고? 그건 결국 남의 운명을 바꾼다는 얘기잖아. 넌 다가올 운명에 대해 알려줄 수는 있으되 운명을 ”

“그래요. 원래 운명이란 건 한 번 정해지면 바꾸기 힘든 것이기도 해서 난 최소한의 개입만 하죠. 하지만 이번엔 아니에요. 아주 강하게 개입을 해야지만 가장 좋은 결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러는 거예요.”

“입 닥쳐! 이 요망한 것아!”

“내가 요망한 것이면, 당신은 이 요망한 것에게 고맙다고 해야 해요. 왜냐면 내가 당신을 살려주었으니까.”

“뭐야? 이게 점점...!”

텔리는 일어선 채로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이디레이아는 조금도 지지 않았다.

“당신이 아까 그 길로 계속 걸어갔다면 검은 방의 입구에서 나온 한 무리의 엘리시움인들을 보게 될 것이었고 그럼 큰일이 났을 거예요.”

“한 무리의 엘리시움인들이라고? 그게 누군데?”

“바로 불새군입니다.”

“그게 뭐? 그냥 다 죽여 버리면 되지. 그게 무슨 큰일이야?”

“그들 중엔 불새의 대사제, 솔로우스가 있어요. 그가 검은 방을 통과하면서 검은 방의 법을 어겼어요. 그도 잘 모르고 한 것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로 인해서 검은 방의 질서와 균형이 많이 손상을 입었답니다. 지금 검은 방은 상당히 불안한 상태에요. 나도 절대 바라진 않지만 이대로 가다간 곧 검은 방의 수호자가 나타날 거예요. 당신이 그 자리에 있다면 그건 말할 것도 없지요.”

“검은 방의 수호자......”

텔리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을 했다.

“네. 텔리. 검은 방의 수호자에요. 이제 왜 내가 당신을 여기에 묶어두었는지 알겠어요? 당신이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되니까 그랬던 거예요.”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되었잖아? 왜 얘기를 안 했지?”

“왜냐면 당신은 불안정한 존재니까. 수호자만큼이나 불안정하니까. 당신 둘은 절대 만나면 안돼요.”

“나도 알아. 그건 나도 아는데......”

“봐요. 그렇게 불확실하게 얘기하면 사정을 아는 모두가 다 불안해져요. 그래서 어디 운명을 벗어날 수 있겠어요?”

“나도 안다고 했잖아! 미친년아!”

갑자기 버럭 화를 내는 텔리를 보고 미스터 황과 알렉시스는 깜짝 놀랐다. 어느새 대화는 그들의 이해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왜 텔리가 그 대목에서 화를 내는지 더욱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텔리는 정말 기분이 나빠 보였다. 비록 얼마간이었지만 지금까지 그와 함께한 미스터 황은 한 번도 텔리가 이만큼 화를 낸 적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텔리는 그냥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라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목소리에서 슬픔이 묻어났다.

“그런 것쯤은 나도 알아. 그러니까 그만 말해. 나도 힘들어.”

“일단은 진정해요, 텔리. 나도 당신을 도울 테니까.”

이디레이아는 지금까지 보였던 태도와는 갑자기 정반대가 되어 텔리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텔리는 쉽게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지 계속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아아..... 그래. 네 말이 맞아. 난 절대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돼. 정말 큰일이 날 뻔했군 그래. 솔로우스 그 자식이 엄청난 실수를 했어. 그놈이 도화선이 되어서 검은 방 전체를 날려버릴 뻔 했으니...... 일단 솔로우스 놈은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내가 추수해 버릴 거야. 알고 지었건, 모르고 지었건 죄는 죄야. 내겐 정상참작이란 건 없으니까 말이야. 당연히 그놈은 사형이다. 그리고..... 검은 방의 수호자가 나타났을 때, 난 당연히 피해있어야지. 그래. 그래.”

이디레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텔리가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을 보고 그녀도 조금 안심하는 듯 했다.

“그래요. 검은 방의 수호자, 당신의 아버지를 만나면 절대 안돼요. 당신들 둘은 절대 만나면 안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