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4 부. 예언자들 - 96 화

예언자들 – 96

라볼타 사장은 꿈에 나타난 여자가 자기 소개를 시작하자 기가 막혀서 할 말을 다 잊었다.

“아... 어으으.... 음.”

그가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이디레이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 전개가 너무 갑작스러웠나 보군요. 사실 벌써 당신 꿈속에서는 여러 번 내 소개를 했었답니다. 그런데, 맥스, 당신이 꿈을 깨고 일어나면 자꾸 잊어버리더군요. 방금 전 꿈에서는 날 여신이라고 불렀었는데 말이에요. 그건 기억하나요?”

“여신.....?”

“네, 바로 맞췄어요. 전 다른 세계에서 온 여신입니다. 운명과 예언을 담당하고 있죠.”

“아... 이거 미치겠네. 내가 아직 꿈을 꾸는 건가?”

라볼타 사장은 눈을 꾹 감더니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아직도 꿈을 꾸는 것이라면 제발 깨길 바랐다.

“믿기 어렵겠지만 당신은 지금 꿈을 꾸는 게 절대 아니고요. 내가 여기 온 목적은......”

이디레이아가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라볼타 사장이 핸드폰을 집어 들고 그녀에게로 집어 던졌다. 그런데 핸드폰이 그녀의 몸을 뚫고 그대로 반대편 벽에 부딪히는 것이었다. 이디레이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방금 핸드폰이 지나가서 구멍이 난 그녀의 몸을 살펴보았다. 이미 그녀 몸에 난 구명이 다시 원래의 모양대로 메워지고 있었다.

“화.... 환영? 홀로그램?”

“네, 맞아요. 이건 나의 환영이에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내 자신을 나타낼 수밖에 없답니다. 난 당신처럼 만질 수 있는 육체가 없거든요.”

“으아아악! 귀... 귀신이다! 베.. 베마시! 베마시!”

라볼타 사장은 이디레이아를 귀신으로 착각하고 벌벌 떨면서 애타게 LA에 있는 비서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이역만리 떨어져 있는 그녀가 그의 부름에 응답할 리가 있나. 이디레이아는 입을 꼭 다물고 있으면서 그가 조금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맥스, 차라리 내가 나중에 차근차근 설명을 할 테니 일단은 내 말을 들어보는 게 어때요? 내가 당신의 꿈을 통해서 여러 예언과 계시를 줬어요. 그런데 아마 기억나는 게 별로 없을 거예요.”

“전혀. 아니, 사실 조금은 기억나는 것 같은데 별로 많이는 아니에요.”

“그래요. 당신에게 LA에서부터 많은 계시를 줬었지만 그다지 많이 기억하지는 못하는 것 같더군요. 당신의 뇌세포가 많이 손상되었거든요.”

“내 뇌세포가 손상되었다고요? 저... 전 죽게 되는 건가요? 아니면 치매가 생기나요?”

“아니요. 호호호. 일반인 기준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나의 예언자가 되려면 그보다는 훨씬 많은 뇌의 활동이 필요하답니다. 그런데 이미 많이 손상이 되어서 그 역할이 쉽지 않았죠.”

“자... 잠깐만... 요.”

라볼타 사장은 손을 앞으로 뻗어 잠시 이디레이아가 말하는 것을 멈추게 했다.

“그게 무슨 얘기입니까? 예언자라뇨? 설마 아이제이아(Isaiah)나 일라이자(Elijah) 같은 그런 거요?”

“음... 결은 다르지만 하는 일은 비슷합니다. 그쪽은 이 세계의 사람들이 믿는 종교 중 하나에 나오는 예언자들이잖아요. 난 여신이라고 하지만 이곳의 여러 신들처럼 절대적인 권능을 가진 것은 아니거든요. 아무튼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같다고 해야겠네요.”

“자... 잠깐만요. 내가 다시 정리 좀 해볼게요. 그러니까 당신은 다른 세계에서 넘어 온 여신이고 내가 당신의 예언자가 된다는 겁니까? 왜요? 왜 납니까? 아.... 그런데 좀 살살 말씀해주세요. 사실 지금 제 심장이 마구 쿵쾅거리는데 꼭 터질 것 같거든요.”

“호호호. 그래요. 다 맞는 얘기에요. 왜 당신을 내 예언자로 삼으려고 하냐면 당신이 내가 들어가기에 아주 적합한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와 정신만 연결이 되는 것은 어렵더군요. 방금 얘기한 대로 뇌세포의 손상이 있어서 말이에요.”

“제 몸에 들어온다는 건 채널링(channeling)을 뜻하시는 겁니까? 저더러 당신의 영매가 되라는 거예요?”

“네. 바로 그거에요.”

“마... 말도 안 돼!”

라볼타 사장은 입을 벌리고 어이없어 했다. 발버둥치면서 침대 등받이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니까 여신님 말씀은, 내 몸을 빼앗겠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건 말도 안 돼요!”

이디레이아는 피식 웃었다.

“호호호. 빼앗으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의 몸을 강탈하는 것은 절대 내 방식이 아니에요. 게다가 당신의 몸을 다 빌린다고 해도 내 자신을 다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당신 하나만으로는 내 정신을 다 담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큰 물통에 물이 가득 차있는데 그 물을 옮겨야 돼요. 그런데 구할 수 있는 다른 통이 용량이 작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그렇담 또 다른 통을 이용해야....”

“네, 바로 그거에요. 원래는 당신 몸에 나를 다 담으려고 했는데 당신만으로는 안 되더군요. 그래서 또 적합한 사람을 하나 더 찾았어요. 지금 보여드리죠.”

이디레이아가 허공에 대고 손짓을 했다. 그러자 호텔방의 배경이 사라지고 강원도 아저씨 집에서 누워 자고 있는 신기 할머니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웬 크론(crone)이.....!”

라볼타 사장은 침대에서 일어나 방에 누워있는 할머니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어깨를 건드려 깨우려고 해봤지만 그의 손은 그녀의 몸을 통과할 뿐이었다.

“이것 역시 환영이에요. 그녀는 지금 여기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죠. 그리고 네, 당신 말 그대로 노파입니다만 당신보다 뇌세포 손상이 훨씬 적고 생명의 정수도 깨끗하답니다. 오히려 내가 깃들기엔 당신보다 적합하지요. 그녀라면 내가 온전히 다 들어갈 수 있어요.”

라볼타는 고개를 돌려 이디레이아를 보았다.

“그럼 왜 절 뽑으신 겁니까? 전 자질이 부족하잖아요?”

“체력입니다.”

“체력이요?”

“저 할머니는 이미 90세가 넘었어요. 육체적으로 나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해 맥스, 당신은 그녀에 비해 자질은 떨어져도 나를 오랫동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난 이렇게 할 거에요.”

라볼타 사장은 도대체 이 여신인지 귀신인지 하는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잘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그저 함께 있기엔 너무 무서우니까 제발 빨리 사라져주기만을 원했다. 하지만 이디레이아는 이제야 본론을 꺼내는 것이었다.

“날 둘로 나눌 겁니다. 그래서 절반은 당신에게, 또 다른 절반은 저 할머니에게 들어갈 거예요.”

“마... 말도 안 돼. 내 몸에 또 다른 누군가가 들어온다니! 절대 안 돼!”

라볼타 사장이 저항하자, 이디레이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 이렇게 물어보고 거절당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전에 당신의 꿈속에서도 한 번 물어봤다가 거절당했었죠. 하지만 이번엔 온전히 정신이 있을 때 묻는 것입니다. 왜냐면 내가 좀 당신의 도움이 절실하거든요.”

라볼타 사장은 여신이 자기 같은 보통 사람의 도움을 받을 일이 뭐가 있을까 싶었지만 궁금해져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 도움이라뇨? 제가 도움이 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전 그냥 보통 사람입니다. 건강하고 팔팔한 젊은 사람들 중에서 예언자든 영매든 찾으실 것이지 왜 늙어가는 저를 택하셨나요? 그리고 아무리 예의를 갖춰서 부탁하신다고 해도 제 육체를 당신에게 강탈당하고 싶진 않습니다.”

“강탈이 아닙니다. 잠깐씩 당신의 육체에 대한 제어력을 제가 빌리겠다는 의미지, 당신의 몸을 갖고 싶은 게 절대 아니랍니다. 내가 제어하는 동안에도 당신의 인격과 기억은 멀쩡히 살아 있을 겁니다. 지금 내가 당신과 할머니, 두 사람과 함께 하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당신이 알게 된다면 무턱대고 거절만 하지 않고 어쩌면 조금 달리 생각할 지도 몰라요.”

“그래요. 궁금하네요. 무슨 일을 하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여신님?”

“세계를 구하는 일입니다. 그 안의 사람들도 전부요.”

“세계를 구한다라.....”

그 말을 들은 라볼타 사장은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세상을 구한다니.... 그건 내가 어렸을 때 읽던 만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가 아닌가. 슈퍼 히어로라... 내가 세상을 구하는 슈퍼 히어로가 된다..... 음......’

이디레이아가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그녀가 눈웃음을 치면서 그에게 한 마디 했다.

“세상을 구하는 기회가 언제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요. 호호호.”

라볼타 사장은 그녀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아무 말 없이 자기에게 찾아온 이 이상한 제안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뿐이었다. 몇 분이 흐른 후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걸 공짜로 해드려야 하는 건 아니겠죠?”

“네? 뭐라고요?”

이디레이아는 라볼타의 입에서 너무 의외의 말이 나오자 순간 당황했다.

“내게 돌아오는 이익이 뭐가 있냐는 거예요. 설마 무보수로 내 몸을 빌리시겠다는 건 아니죠?”

“아..... 아.... 음.”

여신의 입장에서 보기에 보통 사람인 라볼타가 자기에게 보수를 바란다는 그의 말이 충격적이었는지 이디레이아는 쉽게 대꾸를 하지 못했다. 맥스 라볼타는 그렇게 뼈 속까지, 아니 영혼의 밑바닥까지 전부 사업가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