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5 부. 만월의 밤 - 61 화

만월의 밤 – 61

베토케로우스는 또 한 번 무시무시한 소리로 울부짖더니 자리를 박차고 곧장 달려 나와 텔리 앞에 섰다. 거대한 덩치의 검은 늑대가 나타나자 남아 있던 부하 늑대들이 모두 뒷걸음치며 먼 곳으로 물러났다. 그를 본 텔리는 속으로는 몹시 긴장했지만,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척 했다.

“하하하.... 오랜만이다. 괴수. 이거 몇천 년만에 이렇게 만나서 반갑기는 한데 오늘이 널 마지막으로 보는 날이니 또 섭섭하네.”

베토케로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커지면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나 역시 오랜 세월동안 널 잊지 않았다. 네게는 돌려줘야 할 큰 빚이 있으니 오늘 다 갚아주겠다.”

“하! 어떻게 오늘 여긴 모인 자들은 서로 빚만 가득 졌구만. 아주 빚잔치만 하다 가겠네. 그나저나 조금만 기다려주면 안될까? 내가 말이야. 여기 이 세상에 와서 아주 희한한 습관이 생겼거든. 이거... 이거야.”

텔리는 품속에서 클로브 담배를 하나 꺼내더니 입에 물었다.

“내가 말이야. 이 세계에서 와서 담배라는 걸 배웠는데, 이게 얼마나 중독성이 강한지, 신도 끊기가 어려워. 하하하. 웃기지? 다행인건 인간들이야 이걸 피우다가 병을 얻어서 죽기도 하는데, 난 그렇지 않다는 거. 다만 돈이 엄청 많이 들어가긴 하지만. 쩝.”

텔리가 자기 앞에서 클로브 담배를 피우며 여유를 보이자, 베토케로우스는 버럭 화를 냈다.

“이 찌꺼기 일이나 도맡은 악신 주제에 감히 내 앞에서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이냐! 그깟 요상한 취미는 내 손에 죽거들랑 네 맘대로 원 없이 하고, 지금은 내게 목숨을 바쳐라!”

베토케로우스는 검은 갈기를 세우고 아가리를 쩌억 벌리더니 그대로 흉포한 송곳니와 어금니를 드러냈다. 텔리는 그걸 보고 찔끔 놀라면서 입에서 클로브 담배를 떨어뜨렸다.

“아이씨. 왜 갑자기 성을 내고 난리야?”

거대한 검은 늑대는 뛰어오르며 텔리의 머리 위에서 그를 덮쳐왔다. 텔리는 비록 타이밍은 조금 늦었지만 급히 힘을 집중하더니 온몸에서 밝은 빛을 뿜어냈다. 베토케로우스가 텔리 머리를 물어뜯으려고 입을 벌렸는데 순식간에 텔리 주위에 붉은 색의 막이 펼쳐지더니 검은 늑대의 큰 덩치를 가까스로 밀어내었다. 텔리가 후후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이런 괴물! 메이크바를 최대 수준으로 발동시켰는데도 이빨이 안으로 밀고 들어오다니! 야! 난 아직 준비도 안 했는데 갑자기 뛰어 들어오면 어떡해!”

쓰러졌던 베토케로우스는 냉큼 다시 일어나 앞발의 발톱을 세우며 텔리에게 날아들었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케르케로우스가 바람같이 달려와 베토케로우스의 목덜미를 물고 함께 쓰러졌다.

“크앙! 컹!”

목덜미가 물린 베토케로우스는 앞발로 케르케로우스의 몸을 끌어안더니 땅바닥을 굴렀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 몸을 격렬하게 흔들며 금색 털의 늑대를 떼어냈다.

“케르케로우스! 네가 감히 날 공격하다니! 좋다. 너희들 전부 덤벼라.”

쓰러진 케르케로우스는 텔리를 보며 외쳤다.

“텔리! 어서 빨리 준비해요!”

아마도 케르케로우스는 텔리가 여유를 부릴 때부터 베토케로우스가 기습할 것을 예측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에게 준비 시간을 벌어주려고 무모하게 검은 괴수를 공격했던 것이다. 케르케로우스가 잠시 시간을 벌어준 틈을 타서 텔리는 서둘러 옷을 전부 벗고 온몸에 힘을 모았다. 그리고 입으로는 주문 같은 것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의 몸이 점점 까맣게 변해갔다. 케르케로우스를 떼어낸 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맣게 변한 텔리를 본 베토케로우스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래.... 네가 드디어 본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바로 몇 천 년 전 나를 쓰러뜨렸던 그 모습 말이다. 내가 그 모습은 절대로 잊지 못하지! 하지만 누가 네놈에게 준비할 시간을 준다고 했더냐! 컹!”

베토케로우스는 다시 텔리를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달려가던 괴수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부딫힌 듯 한쪽으로 밀리다가 쓰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방금 케르케로우스가 물었던 쪽의 반대편 목을 앞발로 마구 긁어 댔다. 갑자기 그의 목 주변에서 피보라가 터지더니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크아아아!”

알고 보니 핏줄기는 베토케로우스의 목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핏줄기는 점점 베토케로우스로부터 멀어져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스라소니 산신령이었다. 그가 위장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의 목덜미와 배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마 그가 투명한 모습으로 인기척을 없애고 베토케로우스에게 가까이 다가가 목덜미를 물었던 것이었던 것 같은데 베토케로우스가 앞발로 반격해서 그의 몸을 많이 손상시킨 것 같았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다가 그만 땅에 쿵하고 쓰러졌다. 그에 반해 베토케로우스는 두 번이나 목덜미를 물렸으면서도 끄떡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목덜미를 두어 바퀴 빙글 돌리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크크크. 약해빠진 것들. 너희 같은 것들이 아무리 내 목덜미를 노려봤자 그 약한 이빨로는 내 두꺼운 살갗은 뚫리지 않는다.”

베토케로우스가 다시 시선을 텔리에게로 돌리자, 그의 온몸에서 내뿜던 흰빛이 점점 어둡게 변해가고 있었다. 아니, 이미 그것은 빛이 아니라 검은 연기같이 변해서 그의 몸 주변에서 아지랑이같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과연 죽음의 자식다운 모습이 되었군. 크크크. 좋다. 네 친구들이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더욱 충실하게 옛 추억에 빠질 수 있게 되었군. 몇 천년 전의 그 모습 그대로 내게 달려들어라. 텔리.”

그때, 텔리의 하얗게 번쩍이던 눈빛마저 완전히 새카만 연기가 피어오르듯 변하더니 텔리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변해 있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몹시 하이 피치의 목소리로, 마치 목에다 쇳가루를 갈아 넣은 듯한 소음이 섞인, 누구나 한번 들으면 소름이 끼칠 만큼 차갑고 음산한 목소리였다.

“베토케로우스, 예전과는 다를 거야. 네가 한 가지 몰랐던 것이 있는데, 그 머저리 신들과 너를 대적했을 때는 이런 어두운 밤이 아니었지. 만약 그때 빛의 신과 불새 같은 훼방꾼들이 사방을 밝게 비추지만 않았더라면, 나와 내 형제들은 훨씬 수월하게 널 상대했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검은 늑대야. 지금은 캄캄한 한밤중이란다. 바로 나의 아버지가 지배하는 시간이지. 지금부터 내 아버지가 내게만 부여한 권한을 풀어버리겠다.”

베토케로우스의 붉은 눈이 타오르듯 번쩍였다. 그리고 그의 온 이마가 밝게 빛을 내었다. 그러자 온 사방에서 검은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런데 그 울음소리가 아까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듯이 울어댔다.

“좋아. 나도 내가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똑똑히 보여주지. 검은 늑대가 무엇인지, 그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겠다. 나 베토케로우스가 검은 늑대의 군대로 세상을 검게 물들였던 그 날의 악몽을 바로 여기서 재현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