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 예언자들 - 101 화
예언자들 – 101
강 소장이 귀신을 본 것 같은 얼굴로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니까 형사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 때,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알렉시스의 여권이 건수의 눈에 들어왔다.
“텔리님, 저건 알렉시스의 여권 같은데요? 왜 저 사람이 저걸 가지고 있을까요?”
“글쎄, 저 놈이 왠지 수상하다. 어디 내가 한 번 알아볼까?”
텔리는 사냥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형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손을 휘젓는 형사를 번개같이 제압하고는 바닥에 눕히고 그의 양 손을 한 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무릎으로 그의 가슴을 눌렀다. 형사는 앉아 있는 상태여서 미처 뒤로 물러날 틈도 없이 꼼짝없이 텔리에게 당해버린 것이었다. 텔리는 형사의 이마에 손을 대고 기억을 읽었다. 아래에 깔린 채로 제압이 된 채로 자신의 이마에서 텔리의 손에서 빛이 새어나오니까 그의 공포심은 극에 달했다.
“뭐... 뭐하는 거야! 이 자식,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너 인마, 내 손! 빨리 안 놔? 콩밥 좀 먹어볼래!”
“음... 음... 그랬군. 야, 건수야. 이 녀석이 알렉시스와 펠리시아의 뒤를 쫓고 있었는데? 오, 그리고 우리가 어제 모텔에서 에뮤니우스를 찾아갔다가 일어난 일도 좀 알고 있군. 우리와도 관련이 있네. 이 녀석, 우리도 잡아들일려고 하고 있군.”
“네? 알렉시스, 펠리시아, 그리고 우리도요? 아니, 왜 우릴 잡아요?”
“야, 이 상황 보면 모르겠어? 디텍티브잖아. 경찰이라구.”
경찰이란 말에 건수는 덜컥 겁이 났다. 그는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경찰아저씨, 죄송합니다. 어제 모텔 일은 정말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닌데, 유괴범에게 잡혀 있는 제 친구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문을 부쉈던 겁니다.”
텔리에게 제압된 채로 기억을 읽히고 있는 형사는 어이없어 했다.
“뭐야? 이 새끼가! 여기가 범죄단의 소굴이었구만! 너, 빨리 네 친구한테 날 풀어달라고 안 할 거야? 이 자식 네 이마에다 손을 대고 뭔 짓을 하는 거야!”
“이 분은 제 친구가 아니고요. 신이십니다. 다른 세계에서 오신 신이시라구요. 제가 어떻게 명령을 내리는 분이 아니고 오로지 부탁만 드릴 수 있어요. 아무튼 전 자수하렵니다. 모텔 일은 정말 잘못했습니다.”
건수의 말을 들은 형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사이비 종교집단의 광신도에게 붙들린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뭐? 다른 세계에서 온 신? 여기 무슨 사이비 종교, 컬트구만. 와.... 이거 제대로 찾아 온 건 맞는데 나 혼자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지원요청을 해야지. 너, 빨리 이 신인지 뭔지 하는 이상한 놈한테 내 위에서 내려오라고 말 안 할 거야!”
그 사이, 텔리는 형사의 기억을 연속으로 읽고 있었다. 이마에 빛나는 손을 갖다 댄 상태로 몇 번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그가 눈을 뜨고 건수를 보자 그가 바닥에 꿇어앉아서 형사에게 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이 놈의 기억은 다 읽었다. 응? 건수, 넌 뭐하고 있는 거냐?”
건수가 착잡한 표정으로 텔리를 바라봤다.
“어제 모텔을 부순 일에 대해 빌고 있었죠. 에뮤니우스로부터 싸이언스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일인데, 어쨌거나 우리가 잘못했으니 용서를 빌어야죠. 텔리님, 그 분한테 그러시면 안 돼요. 밑에 깔려 있는 그 분, 경찰이시라면서요. 제발 놔주세요.”
“뭐? 놔줘?”
텔리는 건수의 말을 듣고 어이없어 했다.
“너, 아무리 답답하게 구는 게 특기라고 해도 이 정도인줄은 몰랐다. 내가 이 세계에 온 이후로 몇 천 년 동안 어떻게 내 정체를 숨겨왔는지 알아? 위협이 될 만한 존재들은 모두 제거했다. 아니,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엘리시움에서 넘어 온 이방인들의 첫 번째 규칙이 그거야. 정체가 탄로 났을 때는 처리하는 것. 아니면 자기 자신을 처리해야 하지. 이 세계에선 어떤 식으로든 증거를 남기면 안 되니까. 여기 이 녀석을 살려둬서 알렉시스와 펠리시아, 그리고 나에 관해 자꾸 캐게 되면 일이 곤란해져.”
텔리의 말을 듣고도 건수는 그에게 사정했다.
“어차피 텔리님은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실 것 아닙니까. 그러니 이 형사님이 뭘 아시게 되었다고 해도 텔리님이 떠나셔서 안 계신 이 세계에선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거예요.”
“흥! 너와 네가 모시는 신수는 둘 다 답답하고 무른 면이 정말 하나같이 닮았구나.”
“제발 부탁드립니다. 형사님의 목숨만 살려주세요.”
텔리는 간곡히 부탁하는 건수로부터 고개를 돌린 후, 형사의 이마에 대었던 손을 떼고 이번엔 그의 뺨을 잡는 것이었다. 억지로 입이 벌려지게 된 형사는 몸부림을 치며 텔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자신을 누르고 있는 자의 힘이 어찌나 강한지 거미줄에 걸린 작은 곤충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으어어... 모야? 느어 무어 하혀고 하흔 거햐?”
텔리의 눈과 입에서 하얀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마치 연기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빛의 연기는 그대로 형사의 눈과 벌린 입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텔리와 형사의 눈과 입이 하얀 빛으로 연결되었다. 몇 초 후, 연결된 빛이 점점 옅어지는가 싶더니 곧 연기처럼 사라졌다. 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텔리는 눈이 따가운 지 껌벅거리면서 형사에게 엘리시움어로 명령했다.
“내 생각을 네 머릿속에 직접 심었다. 자, 이제 너와 함께 온 저 뚱뚱한 경찰과 함께 이곳을 떠나. 그리고 네가 사는 기간 동안엔 다시는 여기 오지 않는다. 알겠지? 그 전에 넌 네가 가지고 온 여권들을 모조리 여기에 놔두고 가야 한다.”
“네......”
형사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순순히 대답했다.
“그리고 일단 이 집에서 나가면 모텔에 관한 일도, 화재가 난 레스토랑에 대해서도 모두 잊는 거야. 아무 것도 기억하지 마.”
“네......”
“직장에 병가를 신청해. 그리고 네 가족에게 돌아가. 파티를 하든, 낚시를 가든 최대한 재밌게 살아라.”
“네......”
엘리시움어로 명령한 텔리의 말을 형사가 어떻게 알아 들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멍한 표정을 하고 텔리에게 고분고분하게 대답을 했다. 텔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그리고 형사도 일어나더니 바닥에 가지고 온 여권들을 순순히 내려놓았다. 건수는 그의 얼굴을 보자 깜짝 놀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도깨비처럼 무서웠던 그의 표정이 그렇게 온화할 수가 없었다. 강 소장도 길길이 날뛰던 형사가 갑자기 180˚ 바뀌게 되니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집에 들어 온 이후로 계속 할머니를 조롱하던 그가 지금 짓고 있는 부처님의 미소를 보니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텔리가 방금 형사에게 사용한 것은 예전에 미국에서 칼라스 저택에 잠입할 때 트럭 운전수 테디에게도 썼던 수법이었다.
“아니, 어떻게 하신 거예요? 형사님이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변하실 수 있나요? 이게 혹시 아침에 텔리님이 말씀하신 제다이 뭐 어쩌고 하는 그 세뇌 기술인건가? 신기하네.”
“보고도 몰라? 문제 해결했잖아. 더 이상은 묻지 마.”
텔리는 뭔가 찜찜한 것이 있는 지 얼굴을 찡그리며 건수에게 즉답을 피했다. 아마도 그것은 일주일 정도 후에 형사가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건수에게 알리기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트럭 운전수 테디 역시 텔리에게 같은 일을 당하고 일주일 뒤에 죽을 운명에 처했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는 일주일이 되기도 전에 릴리카가 열었던 파티에서 에뮤니우스의 흉탄에 맞아 짧아진 생을 더 짧게 마감해야 했지만 말이다.
강 소장이 형사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이봐요. 몸은 괜찮아요?”
“몸이요......? 괜찮아요.......”
“신령님 밑에 깔려 있어서 많이 아팠을 텐데? 정말 괜찮아요?”
“뭘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러나저러나 빨리 돌아가야겠어요. 오늘은 영 몸이 이상하게 무거운 게 조퇴하고 집에 일찍 가야겠네요. 아니다. 이참에 그냥 좀 푹 쉬어야겠다.”
형사는 강 소장에게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치 방금 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말이다. 강 소장은 형사의 반응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자, 소장님, 어서 여기를 떠나시죠......”
“저... 저 여권들은요? 여권들 안 챙겨요?”
“그냥 가시죠. 허허허......”
“아니, 그래도.......”
강 소장은 바닥에 놓인 여권을 다시 주우려고 했지만 그를 째려보는 텔리를 보고는 깜짝 놀라 형사를 데리고 부리나케 아저씨의 집에서 빠져나갔다.
두 경찰관들이 집을 나가자,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잖아. 이미 죽은 놈이라고.... 쯧쯧쯧. 한치 앞도 못 보는 게 무슨.”
할머니는 그 말을 마치고 일어나 양 손으로 더듬거리며 주방으로 걸어갔다. 건수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저렇게 손으로 더듬으시며 걸으시는 걸 보면 분명 앞이 안 보이시는 게 맞는데... 어떨 땐 꼭 앞이 보이시는 것 같단 말이야.’
주방에 걸어가던 할머니가 뒤를 돌아 건수를 찾았다.
“건수야, 건수야. 어디 있니? 주방에서 날 좀 도와야겠다. 좀 있다 손님이 오실 테니 뭐라도 꺼내서 대접해야 한단다.”
“손님이 또 오시는 건가요?”
“그래, 아주 중요한 분이 오시는 구나. 한 시간 내에 오실 테니 뭐라도 준비하자꾸나.”
또 누가 이 집에 찾아온다는 것일까.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상한 일이 잔뜩 이어지니 건수는 오늘 하루도 많은 일이 있을 것을 감지하고 긴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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