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부. 솔로우스 - 27 화
솔로우스 – 27
텔리와 그 일행은 산더미 같은 몸집의 베토케로우스를 지나치며 공터를 빠져나가 숲속으로 들어갔다. 미스터 황은 걸으면서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특히 나무 사이와 눈과 낙엽이 쌓여있는 곳을 유심히 보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는 텔리와 알렉시스와 다르게 사라진 데디쿠스를 계속 찾고 있는 듯 했다. 말로는 ‘불새군 놈’이라고 함부로 불렀지만 그가 함께 같은 편에 서서 케르케로우스를 돕는 것을 알고는 내심 조금은 신경 쓰였나 보다.
“에이, 그 불새군 녀석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혹시... 그 녀석? 텔리님, 아무래도 찝찝해서 안 되겠어요. 아까 건수랑 할머니가 있었던 곳을 잠깐만 들렀다 가요. 불새군 놈이 우리를 기다리다가 거기에 갔을지 모르니까요.”
“무슨 헛소리야? 검은 문에 무슨 일이 있다고 빨리 가보자고 했던 거 아니었어?”
“예, 맞는데요. 어차피 검은 방 입구로 가는 길이잖아요. 바로 저 앞인데요, 뭐. 불새군 녀석이 할머니가 걱정되어서 거길 갔을지 몰라요.”
“할머니? 이디레이아가 들락날락 하는 그 나이든 여자를 말하는 거냐? 그 여자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아까 검은 늑대에게 물려서 크게 부상당했잖아요. 다 알고 계시는 거 아니셨어요? 제가 아까 긴급하게 치료는 하고 텔리님께로 왔는데 지금 상태가 어떤지 확인도 할겸....”
텔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안돼안돼안돼. 시간도 없지만 이디레이아랑 관계된 여자라 재수 없어. 내가 그 운명의 여신이라면 아주 딱 질색한단 말이야. 너도 이제부턴 그 여자에 대해 말하지 마. 알겠지! 그리고 난 아까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어서 그 여자가 늑대한테 물렸는지 어쨌는지 신경도 못썼어. 지금 가뜩이나 바이가 어두운 데서 튀어 나올까 걱정되는데 무슨 쓸데없는데 신경을 쓰는 거야? 불새군 녀석도 신경 쓸 거 없어. 따지고 보면 그 놈들도 다 적이야? 내가 아까 한 놈 후딱 죽이는 거 봤어? 못 봤어?”
미스터 황도 똑같이 입술을 내밀며 대꾸했다.
“아이고, 되게 시끄럽네. 나더러는 조용하라고 뭐라고 하면서 텔리님은 왜 그렇게 말이 많아요?”
“뭐 이 자식아! 이게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아무튼 난 곧 바로 검은 방으로 갈 거야. 그 할머니 있는 덴 재수 없어서 안 가.”
그렇게 말하며 서서히 걸음을 늦추는 텔리와 달리 미스터 황은 더욱 빨리 걸어서 앞으로 치고 나가며 말했다.
“벌써 다 왔잖아요. 보세요. 바로 저 앞이에요. 그냥 이렇게 걸어서 오면 되는데 무슨.....”
텔리는 콧구멍을 넓히더니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야, 이 자식아! 넌 모시는 신의 말을 개똥으로 듣냐? 내가 할머니 있는 데는 안 가겠다고 했잖아! 이디레이아 그 년이 꼴 보기 싫어서 그 년의 예언자라는 할머니도 싫단 말이야. 늑대에게 물려서 죽든지 말든지 내가 알게 뭐야! 안 그래? 알렉시스? 저거 내 사제라는 놈이 왜 저렇게 꼴통이냐?”
알렉시스는 그의 말을 듣고도 딴데를 바라보며 딴청을 피우다가 이내 고개를 다시 돌리더니 대답했다.
“네... 네? 죄송합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야! 알렉시스! 너 지금 내 말 못들은 척 했지? 와.... 얘도 저 꼴통이 하는 짓에 감염됐나 보네.”
사실은 알렉시스도 사라진 데디쿠스가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미스터 황의 예상대로 저 앞에서 그가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기를 바랐다.
셋은 아까 텔리가 베토케로우스에게 물려 큰 상처를 입고 누워있던 곳을 지나쳤다. 텔리는 안력을 집중해서 아까 자기가 누워 있던 풀 위의 희미한 핏자국을 보자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되살아난 것은 기적이다. 아니, 베토케로우스가 부활을 했음에도 힘이 약했던 것부터가 기적이었어. 아니었으면 도저히 나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괴물이 아니니까.”
그의 말을 듣고 미스터 황이 촉새처럼 끼어들었다.
“그리고 겨우 살려드렸더니 이상한 거인의 몸에 들어가시고 또 싸우러 가셔서 한 번 더 돌아가실 뻔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징그럽게 생긴 털북숭이 중년 아저씨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계시니 그 또한 기적이지요. 하지만 제 덕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아....”
텔리가 입을 벌리고 나른한 눈빛으로 미스터 황을 지긋이 바라보자, 위기를 감지한 알렉시스가 재빨리 촉새 같은 사제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는 말했다.
“텔리님께 적당히 까불어. 이 자식아. 넌 목숨이 한 열 개라도 되냐?”
“읍! 읍!”
미스터 황은 아까 건수와 헤어진 곳을 가보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 이상하다? 분명 할머니께서 여기 계셨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분명 여기에 계셨다구.”
그곳은 그가 할머니를 치료하고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마련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녀도 데디쿠스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는 텔리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혹시 늑대들이 할머니를 물어간 것일까요?”
“하아암..... 응? 어라?”
텔리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하품하는 흉내를 내다가 뭔가를 발견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어디론가 걸어가더니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잠깐만. 여기 이 부분이 좀 이상해.”
그는 손가락으로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을 비벼보는 것이었다.
“그래, 바로 여기야. 어디 보자. 그냥 만져서는 잘 벗겨지지 않는군.”
그는 손가락에 힘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손가락에서 하얀 빛이 났다. 그리고는 계속 공기 중에 무슨 물체가 있는 것처럼 계속 문지르며 벗겨내는 시늉을 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붙은 스티커를 떼는 것처럼 말이다. 잠시 후 아무 것도 없던 공간에서 무지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텔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탄성을 질렀다.
“오호, 이거 놀랍군!”
그가 빛나는 손으로 공기 중의 무엇인가를 잡고 얇은 비닐막을 벗기듯 주욱 벗겨내었다. 그러자 그들 앞에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벽이 나타났다.
“아하! 이건 통로구만. 바로 아까 우리가 멧돼지 신수의 공간에서 빠져나왔던 그런 통로야. 다만 지금은 닫혀있을 뿐. 그런데 이런 곳에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네. 아, 그게 아닌가? 조금 전 한 번 열렸다가 지금은 닫힌 것 같은데? 훗훗훗.”
텔리의 눈이 반짝였다. 지금 그의 모습은 둔해 보이는 몸매에 셔츠 위로 가슴에 털이 수북이 삐져나온 중년의 이탈리안 아저씨지만, 그 빛나는 눈동자는 마치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의 것 같았다.
“재밌어. 그런데 칠칠맞게도 문을 닫은 후 흔적을 남겼네? 훗훗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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