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6 부. 솔로우스 - 20 화

솔로우스 – 20

릴리카가 도망쳐 버린 바람에 홀로 남겨진 텔리는 풀 위에 누워 있었다. 치유와 회복을 시켜주는 돌, 메이크바를 지니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큰 부상을 입었고 또 이미 다량의 피를 흘렸기 때문에 지금 그가 살아날 확률은 미미했다. 조용히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그는 머릿속으로 이미 부활 후 과연 어떤 세상을 맞이하게 될지 그것만 상상하고 있었다. 그는 외롭고도 고통스러운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당황함이 없이 꽤 차분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죽음을 초월한 존재인 그에게 죽음은 그리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다만 고통스러운 육체의 죽음 이후 부활하는 과정과 시간을 생각하게 되니 지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견뎌내야 하는 고통이 짜증나고 귀찮을 뿐이었다.

“죽음이라...... 그래, 아프지. 게다가 이렇게 끔찍한 부상을 당해서 죽는 거잖아. 하지만 내 고통은 딱 거기까지야. 어차피 부활할 거니까. 그런데 다시 되살아날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그 때 세상이 잔뜩 바뀌어져 있으면 어떡하지? 또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 아... 귀찮아. 제기랄! 에이, 그래도 뭐 베토케로우스는 해치웠으니까 완전히 손해 보는 건 아니지..... 그럼그럼. 그나저나 내가 죽음을 맞이하는 게 이게 얼마만인가? 적어도 마지막으로 부활했던 게 지금으로부터 몇 천 년은 훨씬 더 된 것 같은데? 아냐, 더 오래되었나? 한 만 년은 넘었을 거야. 아.... 죽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만. 기다리는 시간도 귀찮으니까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난 베토케로우스 놈을 고통 없이 빨리 죽여줬는데, 저 빌어먹을 늑대는 날 이렇게 만들어서 엄청 고통스럽잖아. 젠장!”

그가 그렇게 혼자 넋두리를 하며 죽을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알렉시스가 불편한 다리를 끌면서 나타났다. 그녀는 아까 베토케로우스의 정신 제어 공격을 받은 후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으나 아직도 자유로운 거동은 하지 못 하는 듯 했다. 그녀는 풀밭 위에 누워 있는 거인이 된 텔리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비명을 질렀다.

“아닛! 저게 뭐야? 저... 저건 거인이다! 세상에!”

텔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죽기 전에 마지막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녀를 불렀다.

“아, 알렉시스냐? 이리 좀 와봐라.”

알렉시스는 다 벗고 누워 있는 거인이 엘리시움어로 자기 이름을 말하며 부르자 잔뜩 긴장하게 되었다. 그녀는 힘을 집중하여 두 주먹에 불을 붙인 후 그에게 다가갔다.

“괴물! 네 정체를 밝혀라! 너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하! 이 정신 나간 계집애야. 나다. 텔리. 넌 어떻게 네가 모시는 신도 알아보지 못하냐? 진짜 나의 전사가 맞긴 한 거야?”

“예? 당신이 텔리님이시라고요?”

거인이 스스로를 텔리라고 말하자 릴리카는 깜짝 놀라며 불편한 다리를 끌며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녀가 가까이 가서 보니 거인은 벌거벗은 채 가슴과 배에 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혈색은 창백하기가 백지장 같았고 사지가 축 늘어져 있었다. 징그럽기도 했지만 옷을 모두 벗고 있어서 참으로 민망한 모습이었다. 알렉시스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자 텔리는 눈알을 뒤로 굴리며 난처해했다.

“아우우..... 미안. 이렇게 다 벗고 있어서 너가 깜짝 놀랐구나. 갑자기 이런 육체를 쓰게 된 바람에 옷까지 챙길 겨를이 없었다. 뭐, 예전에 이런 거인들이 땅 위를 거닐 때엔 몸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았었으니까.... 옷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렵지.”

알렉시스는 텔리 옆으로 더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다리가 마비된 것을 알아차린 텔리가 물었다.

“베토케로우스에게 당한 거냐? 다리 말이다.”

“예. 신수가 이상한 마법을 부려서 제 몸의 자유를 빼앗았습니다. 그 후로 느리게 회복이 되고 있습니다만 아직 완전히 다리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래, 그 놈이 무서운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신과 신수를 제외한 모든 생명의 정신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조종하거든. 아주 별나면서도 지독한 능력이지. 그냥 힘만 무지하게 센 녀석이 아니야. 머리가 있는 놈이거든.”

릴리카는 텔리의 말을 들으면서 그 옆에 함께 누워 있는 산더미 같은 덩치의 베토케로우스를 보면서 흠칫 놀랐다. 텔리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설명했다.

“아, 베토케로우스는 죽었어. 조금 전 내가 처리했다. 지독한 놈. 죽여도 죽여도 자꾸 살아나는 바람에 고생 좀 했지. 덕분에 지금 난 이런 꼴이 되었고.”

“텔리님, 많이 부상을 당하셨군요. 제가 무엇을 가져다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냐.”

텔리의 눈꺼풀이 감겼다.

“이미 늦었다. 처음엔 베토케로우스. 그리고 이젠 내 차례가 온 것이다. 난 아무래도 지금 여기서 죽어야 할 것 같다.”

“아......”

알렉시스는 죽어가는 신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몇 십 년 전 뉴욕에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와 그 이후에 그가 자신의 부관이 되었을 때 함께 겪었던 일들이 마치 영화처럼 그녀의 눈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걱정마라. 넌 앞으로 몇 백 년은 살 테니 네가 살아있는 동안엔 내가 돌아올 거다. 하지만 쾅식이는 이곳의 인간이니 앞으로 다신 날 볼 수 없겠지. 걘 너와 달라서 수명이 짧잖아.”

“예.”

“알렉시스, 넌 내가 죽으면 케르케로우스 말대로 검은 방을 통해 다시 엘리시움으로 돌아가. 거기서 내가 다시 올 때를 기다려라. 난 특별히 영토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예전에 나를 따르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지역이 있었다. 거기 가서 편히 살도록 해.”

텔리는 유언처럼 말했다. 알렉시스는 고개를 숙인 채 텔리의 마지막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신이시여. 말씀대로 하겠나이다.”

“쿨럭. 쿨럭. 끄으윽....!”

텔리는 고개를 들더니 입에서 피를 토했다.

“아아.... 진짜 오랜 만에 죽게 되었다. 하하.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 구나.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더 클로브 담배를 피울 수 있었으면 좋겠건만. 하하하.”

“말씀하신 그 물건을 준비해서 텔리님을 다시 뵈올 때 드리겠습니다.”

“아.... 그래... 그래.... 꼭 다시 만나자....하하.... 하....”

텔리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텔리가 눈을 감은 채 죽음을 맞이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두운 숲속에서 두 개의 검은 물체가 튀어나오면서 소리질렀다.

“텔리님! 아니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텔리님!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거예요?”

그 목소리는 미스터 황이었다. 미스터 황과 함께 있었던 데디쿠스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텔리는 잠에 들 것처럼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힘겹게 눈을 떴다.

“아..... 진짜 시끄러워 죽겠네. 쾅식이 넌 인마 내가 죽기 직전까지도 내 귀를 아프게 할 거냐?”

미스터 황은 허겁지겁 텔리에게로 달려오더니 빛나는 손을 거인의 이마에 대더니 그의 상태를 알아보았다.

“와! 이 양반, 또 다 죽어가네! 어쩌다 또 이렇게 됐어요?”

“으으윽.... 시끄러워. 네 목소리 때문에 귀 아파서 죽겠다.”

텔리가 다시 눈을 감고 죽으려는데, 미스터 황이 텔리의 뺨을 찰싹 때리면서 말했다.

“잠들지 마요! 그럼 죽는 거라고요. 텔리님! 텔리님!”

“아... 맞아. 이 자식아. 난 지금 죽으려고 그러는 거라고......”

“아니, 죽긴 왜 죽어요? 옴니테바! 옴니테바, 그거 어디에 뒀어요?”

“아... 그건 내가 원래 사용하던 몸 안에 있잖아.”

“아, 그렇구나. 그것만 있으면 내가 살려드릴 수 있을 텐데. 으으음. 텔리님, 혹시 남는 육체가 더 없어요? 육체만 갈아타면 안 죽어도 되잖아요?”

“육체...? 육체라면 이제 남는 게 더 없는데..... 아, 잠깐만. 하나.... 어쩌면 하나 더 있을 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내 방에 하나 더 있는 것 같다.”

미스터 황과 알렉시스는 서로 얼굴을 쳐다 보았다. 미스터 황이 환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알렉시스! 됐어. 텔리님은 갈아 탈 육체만 있으면 다시 사실 수 있어!”

“사제! 그거 진짜야?”

텔리는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사제와 전사에게 말했다.

“얘들아, 날 좀 일으켜 세워봐라. 생각해보니 내 방에 아직 쓸 수 있는 몸이 하나 남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옛!”

미스터 황과 알렉시스는 거인의 두 팔을 잡고 데디쿠스는 낑낑대며 거대한 머리를 들었다. 텔리의 상체가 들리자 그의 등 뒤로 그림자가 생겼다.

“자, 쾅식이랑 알렉시스는 내 손을 잡아라. 그리고 손을 잡은 채로 날 다시 천천히 내 그림자 위에 눕혀. 너희 둘, 나와 함께 내 방으로 들어가자.”

미스터 황과 알렉시스는 텔리의 손을 잡고 그를 천천히 그림자에 눕혔다. 그러자 그의 몸이 바닷물에 잠수하듯 그림자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의 양손을 잡고 있는 미스터 황과 알렉시스도 함께 그림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