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부. 만월의 밤 - 52 화
만월의 밤 – 52
꼼짝없이 죽는다고 생각했던 릴리카는 의외의 인물에게서 천금 같은 도움을 받게 되자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아니, 에뮤니우스, 방금 무슨 일을 한 거야? 네 입이... 그 모습은 어떻게 된 거야?”
에뮤니우스는 턱이 뻐근한지 자꾸 입을 크게 벌리면서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동안 여러 일이 있었지요. 전부 설명하려면 시간이 모자랍니다. 물론 당신께 다 말씀드릴 이유도 없고 말이죠. 그러나저러나 뭐하십니까? 제가 이렇게까지 도와드렸는데도 적을 바로 앞에 두시고 계속 딴 데 신경을 쓰실 건가요? 아니면 조금 전처럼 계속 살려달라고 빌 건가요?”
“뭐.... 뭐라고? 네 놈이 감히 그따위로 내게 말해?!”
에뮤니우스는 두 팔을 벌리고 주위의 병사들을 둘러보며 여유로운 태도로 대답했다.
“그럼 저도 살려달라고 빌까요? 크크크.”
“뭣이!”
릴리카는 두 눈을 부릅뜨고 에뮤니우스를 노려봤다. 그런데 그 뒤에 서 있는 병사들의 눈빛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경멸의 눈초리였다. 그 눈빛들만 보면 그들은 자신들을 함부로 대하고 윽박지르는 그녀에게 더 이상 충성하지 않는 듯했다.
“뭐... 뭐야? 너희들? 이 자식들이 왜 그런 식으로 나를 보는 거야?”
병사들은 단 한 명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더는 그녀에게서 어떤 명령도 듣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늘 그들에게 ‘불새군은 이렇다, 불새군은 저래야 한다’라고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조금 전엔 적에게 구차하게 생명을 구걸했던 모습에서 그들은 그녀의 밑바닥을 본 것이었다. 다만 그녀가 에피로제로부터 받은 힘이 무서워서 입을 열어 그것을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모두 똑같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어서 그녀는 몹시 당황했다.
“너 이놈들이 감히.....!”
그러자 데디쿠스가 일어나 그녀에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릴리카, 당신은 더 이상 우리를 지휘할 수 없어! 우리 모두 네 진짜 모습을 봤어. 넌 지휘관으로서 실격이야!”
“그... 그건 저놈을 방심시키려고....”
“웃기지 마! 그 모습은 아까 너가 날 죽이려고 들 때 내가 너에게 빌던 모습과 똑같았잖아! 무슨 거짓말을 하려고 들어? 넌 목숨을 구걸한 거야!”
데디쿠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동료들에게 물었다.
“이봐! 너희들은 목숨을 구걸하는 불새군을 본 적이 있나?”
그들은 릴리카를 보며 손가락질하며 소리 질렀다.
“말도 안 돼!”
“당연히 없지! 릴리카, 넌 불새군이 아니야!”
“맞아! 넌 절대 불새의 성전사가 아니야! 가짜!”
릴리카는 크게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이이익! 저 자식들이 네게 감히! 데디쿠스, 네놈이 감히!”
데디쿠스는 마치 조금 전 에뮤니우스처럼 팔을 벌리며 씩씩대는 그녀에게 담대하게 말했다.
“뭐? 날 죽이려면 죽여. 죽이라고! 어서! 그런데, 릴리카. 네가 날 죽이면 여기 있는 모든 병사는 네 목에 칼끝을 겨눌 거야. 이들은 이제 확실히 알게 되었거든. 저기 저 케르케로우스의 사제에게도 목숨을 구걸할 정도로 수세에 몰리는 네가 이끄는 우리 부대는 늑대 신수를 절대 죽일 수 없다는 걸 말이야. 그리고 늑대 신수가 우리에게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줬는데도, 넌 자신의 출세를 위해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어. 우린 실력이 부족해서 늑대 신수를 절대 해칠 수 없어. 하지만 넌 죽일 수 있지!”
데디쿠스는 품에서 칼을 꺼냈다. 그리고 그 끝을 릴리카에게 겨눴다. 그러자 병사들 중 절반 정도가 칼을 꺼내는 것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아직 완전히 결심하지 못한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릴리카는 화가 나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등을 돌려 땅바닥에 주저앉은 건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너 때문이야! 네놈만 아니었으면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어!”
그녀는 주먹을 쥐고 쳐들더니 힘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곧 주먹에서 하얀빛이 나오게 되었다.
“아니지···. 네놈만큼은 온전한 모습으로 죽이지 않겠어! 가장 흉한 모습으로 만들어주마! 이 더러운 늑대의 사제 놈아!”
그녀는 좀 더 주먹에 힘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주먹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이대로 네놈을 산채로 불태워 죽여주마! 최대한 끔찍하게! 지옥의 사자도 네 모습을 보면 고개를 돌릴 정도로 만들어주마! 호호호.”
온몸이 마비된 건수의 눈에 릴리카의 불타는 주먹이 들어왔다. 그는 마비가 심해서 입을 벌려 신음조차 할 수 없었다. 그의 눈빛에 절망감이 가득했다. 그녀는 그를 비웃으며 큰 소리로 소리쳤다.
“흥! 늑대의 사제, 이 멍청한 놈아. 네 신수가 널 이 지경으로 만들었구나. 그놈은 네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아. 왜냐면 그놈은 그냥 겁쟁이거든! 호호호. 케르케로우스! 네놈은 지금도 어디엔가 숨어서 여기서 벌어지는 일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겠지? 이 겁쟁이 늑대 놈아! 네놈은 언제나 혼자 숨어서 네 권솔이 죽어 나가는 걸 보고만 있구나! 비겁하고 더러운 놈! 호호호. 그렇다면, 자, 이제 네 마지막 사제도 우리 불새군에게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을 똑똑히 지켜봐라!”
릴리카는 한 손으로 건수의 목을 잡더니 불타는 주먹을 그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갔다.
“호호호. 에피로제님이 주신 이 성스러운 불꽃에 활활 타 죽어라. 더러운 늑대의 하수인아!”
그때였다. 계곡 너머의 어두운 숲속에서 밝은 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두 마리의 검은 늑대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던져졌다.
‘컹! 컹!’
늑대가 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천둥이 치는 소리와 함께 빛이 덩어리가 눈 깜짝할 새에 튀어 올라오는 것이었다. 릴리카는 병사들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외쳤다.
“케르케로우스다! 불새군의 전사들아. 늑대가 온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건수를 보며 불타는 주먹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쉬익-’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더니 빛의 덩어리가 릴리카의 측면을 강타하고 바닥에 내려왔다.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였다.
“아아악!”
릴리카는 빛의 덩어리를 맞고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몸이 붕 떠오르더니 함께 몇 m 나 떨어진 곳까지 날아갔다.
“크르르르르.... 컹! 컹!”
빛의 덩어리는 착지한 후, 건수의 주위를 빙빙 돌며 그를 보호했다. 시간이 지나자 점점 그 빛이 사라졌는데, 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보게 된 것은 금색 털을 가진 한 마리의 어린 늑대였다. 그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탄성을 질렀다.
“아! 케르케로우스다! 드디어 검은 방의 늑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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