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부. 만월의 밤 - 27 화
만월의 밤 – 27
검은 늑대들을 피해 무지갯빛 통로를 빠져나온 스라소니 산신령과 인간들은 멧돼지 산신령의 비밀 공간으로 발을 들이게 되었다. 강원도 아저씨, 할머니, 텔리와 미스터 황은 예전에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어서 이곳이 낯설지 않았지만, 그 외 사람들은 처음 와보는 이곳이 그렇게 신비로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인간이 만든 어떤 건물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 풍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텔리는 무지갯빛 통로를 빠져나올 때도 그 출입구를 직접 손으로 만져보면서 큰 관심을 보였다.
“놀라워. 한 마디로 이 출입구라는 게 말이야. 내가 나의 접힌 공간에 들어갈 때 내 그림자를 통해서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검은 방의 입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사람들이 통로에서 나와서 아무 방향으로 무작정 걸어가기 시작했다. 스라소니 산신령이 아저씨에게 말했다.
“이보게, 오다리, 여기 왔으니 네 주머니에서 멧돼지를 나오게 해줘라. 여긴 그의 집인데 적어도 집주인이 안내를 해줘야 하지 않겠나.”
“아, 제가 깜박했습니다. 그렇죠. 손님들이 방문했는데 당연히 집주인이 있어야죠.”
강원도 아저씨는 그가 입고 있는 외투의 주머니를 벌리더니 거기에 대고 말했다.
“산신령님, 이제 나오세요. 댁에 오셨으니 제 옷 주머니 안에 계실 필요가 없으시겠네요.”
강원도 아저씨가 외투를 벗더니 땅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그 옷의 작은 주머니에서 거의 버스만 한 크기의 거대한 멧돼지 산신령이 나왔다. 그가 큰 코를 공중에 쳐들고 공기를 잔뜩 들이마시며 말했다.
“오, 이 냄새... 내 집에 왔다. 오랜만이다.”
멧돼지 산신령은 겨우 며칠 만에 자신의 돌아왔지만, 밖에 나가 있는 동안 거의 옷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어서 그랬는지 오래간만에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이 났는지 넓은 판 위에서 펄쩍펄쩍 뛰고 달렸다.
멧돼지 산신령의 공간에 발을 들인 인간 중 건수의 두 친구가 가장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둘은 서로 꼭 붙어서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걸었다. 그런 모습을 본 미스터 황이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그들에게 다가왔다.
“건수 친구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여긴 진짜 안전한 곳이야.”
“아, 예.”
건성으로 대답하는 도원광에게 미스터 황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자는 친구를 업고 있었는데 무겁지 않아? 내가 도와줄게. 내가 대신 그 친구를 업을 테니 잠깐만 쉬어.”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괜찮긴. 너, 이마에서 땀을 꽤 흘리는데. 그러지 말고 내가 대신 업을게. 난 신에게서 힘을 받은 몸이라 보통 사람보다는 힘이 센 편이야.”
미스터 황은 거의 반강제로 도원광의 등에서 싸이언스를 떼어내더니 자신의 등 뒤에 업었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도원광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여기는 참 희한한 장소지? 그래도 지금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장소일 거야.”
“여기가 가장 안전한 장소.... 그렇군요.”
“이곳이 왜 안전하냐면, 여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니까 그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요? 그럼 여긴 혹시 저승인가요? 설마 우리가 다 죽은 건가요?”
미스터 황의 말에 도원광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미스터 황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하하. 저승이라..... 내가 여기 처음 왔었을 때는 내 몸이 아주 아팠기 때문에 죽을 만큼 힘들었었지. 그래서 꼭 저승에 가는 기분이긴 했어. 하지만 저승은 아니야.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듣자 하니 이곳은 ‘접힌 공간’이라고 하더라고.”
“접힌 공간이요? 그건 또 뭔가요?”
“세상과 맞닿아 있기는 한데 세상이 아닌 공간이라고 하더라고. 나에게 힘을 주신 저기 뒤에 보이는 신께서도 비슷한 걸 가지고 계시는데, 저분 말씀이, 이 정도 규모면 상당히 크고 잘 만든 곳이라고 하시더라.”
“자... 잠시만요.”
도원광은 너무 황당한 얘기라 손바닥을 앞쪽으로 뻗으며 미스터 황을 잠시 멈추게 했다.
“제가 오늘 너무 황당한 일들을 시리즈로 겪게 되니까 정신이 나갈 것 같은데요. 저희는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총을 쏴도 죽지 않는 사람들을 보았고요. 그러다가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에게 구출됐어요. 그리고 갑자기 신령님이라고 불리는 집채만 한 동물이 사는 집에 왔단 말입니다. 하아......”
“그렇지. 잘 따라오고 있네. 이해력이 좋은 편인가 봐?”
도원광은 잠시 멈춰서서 미스터 황의 반응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멈춰선 좐슨의 표정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어휴.... 잘 따라오고 있다뇨? 그리고 이해력이 좋긴 뭐가 좋아요? 이런 황당한 일이 세상에 또 어디서 일어나겠어요? 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고요! 후우우......”
“하하하.”
미스터 황은 한숨을 쉬는 도원광을 보고 한 번 크게 웃으면서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도 한 번 길게 한숨을 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야, 넌 황당의 황자도 모르는 거다. 너희들이 내 사연을 들으면 둘 다 뒤로 뒤집힐 거다.”
그러면서 미스터 황은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처음 텔리를 만났을 때부터 그의 얘기를 간략하게 두 사람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 * *
멧돼지 산신령이 일행을 이끌고 걷기 시작한 지 한 30 분은 되었을까? 숲으로 둘러싸인 공터로 왔다. 그곳은 건수와 인간들이 그를 처음 만났던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전에처럼 땅바닥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뒹굴었다. 첫 방문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이미 그 흙장난의 의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에게 신경 쓰지 않고 짐을 풀기 시작했다. 미스터 황은 싸이언스를 땅바닥에 눕혀놓고는 건수의 친구들도 바닥에 앉으라고 말해줬다. 도원광과 좐슨은 드디어 다리를 쉴 수 있게 되자 입에서 ‘끄응’ 소리를 내며 땅에 털썩 앉았다.
“그런데, 형. 광식이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그럼. 건수도 날 그렇게 불러.”
“형이 얘기한 거 말이에요. 그거 진짜 다 사실이에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요. 건수와 함께 불새군 녀석들에게 며칠 동안 잡혀 있었을 때도 희한한 얘기를 들었는데 그때도 정말 믿기 어려웠거든요.”
“어. 다 사실이지. 너도 지금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잖아?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 어디 정상인 게 하나라도 있냐?”
“그럼 건수도 외계에서 온 짐승 모습을 한 신의 사제가 된 거고, 형도 그런 거네요. 특별한 힘도 생긴 거고요.”
그때, 좐슨도 대화에 껴들었다.
“그래서 건수가 좀 이상했던 거야. 내 말은 좋은 쪽으로 이상했다고. 8 년 동안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있었는데도 키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커졌던 것도, 힘이 그렇게 셌던 것도, 길 가다가 갑자기 기절했던 것도, 또 우리가 불새군에게 잡혀 있을 때 그 사람들과 이상한 언어로 대화할 수 있었던 것 모두 다 말이야.”
미스터 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건수는 케르케로우스라는 신수의 사제가 되어서 그에게서 힘을 받았는데 그래도 조금은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지. 난 텔리님께 우연히 힘을 받고도 거의 조금도 쓸 줄 몰라서 이런 거고.”
도원광은 주먹을 불끈 쥐고 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젠장! 내게 건수가 가진 힘이 있었다면 난 지금이라도 당장 불새군 놈들에게 달려가서 다 죽여버리고 그 녀석을 구해올 수 있었을 텐데!”
미스터 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서라. 넌 너가 뭘 원하는 게 뭔지 몰라서 그래. 지금 저기 텔리님과 대화하고 있는 알렉시스 좀 봐봐. 난 자세히는 모르지만, 저 여자도 사연이 보통 많은 게 아니야. 저 여자가 신이나 신수와 관계없는 삶을 살았었다면 이 고생을 하겠냐?”
도원광은 알렉시스를 한 번 보더니 인상을 구겼다.
“우리 앞에서 저 여자 얘기는 하지도 마세요. 우리는 불새군이라면 아주 치를 떱니다.”
미스터 황은 대충 알아듣겠다는 듯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런데 그도 알렉시스와 대화하고 있는 텔리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튼 난 다시 과거로만 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 텔리님의 한국 가이드 역할을 맡지 않았을 거야.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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