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부. 만월의 밤 - 36 화
만월의 밤 – 36
케르케로우스는 강하게 부정하는 건수를 보고 시무룩해져서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난 또...... 네가 그곳에 가보고 싶어 하는 줄 알았지.”
“아뇨. 절대 아니고요! 그런데 왜 갑자기 기운이 빠지신 거예요? 제가 거기 안 가는 게 그렇게 속상하신 일인가요?”
“어휴. 나도 모르겠다. 난 그냥 운명의 어머니한테서 들은 게 좀 있어서 말이야.”
“네? 이디레이아님한테서요? 무슨 얘기인데요? 저에 관한 일인가요?”
“으...응. 그런데 나도 잘 모르겠어.”
건수는 왠지 마음이 꺼림칙해져서 재차 물었다.
“무슨 얘기인데요? 그분이 저에 대해서 무슨 얘기를 하셨는데요?”
“정말 나도 모르겠어. 그 여자가 여기 찾아와서 이것저것 얘기해줬어. 원래 그 여자가 예언을 하잖아. 그러니까 말도 많고......”
“여기에 찾아왔다고요? 여신님이요? 검은 방에요?”
케르케로우스는 눈알을 한 바퀴 돌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순간 그의 황금색 털이 햇빛을 받은 황금처럼 번쩍하고 빛을 내었다.
“하아..... 그래. 원래는 여긴 아무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인데 내가 육체를 잃은 지금은 이 장소에 대한 장악력이 약해져서 그런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단다. 그래서 내가 빨리 성장해야 하는데 말이야.”
늑대는 뒷다리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운동하는 시늉 했다. 그런데 건수는 이미 마음이 조급해져 있는 상태였다.
“진짜로 말씀해주세요. 케르케로우스님. 여신님이 오셔서 무슨 예언을 하신 거예요?”
케르케로우스는 고개를 들어 건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건수야. 네가 불새군에게 잡혀 지하창고에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이디레이아가 그런 사실을 몰랐겠니? 아니면 텔리가 힘이 모자라서 널 구하러 오지 않았겠니?”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왜 구하러 오지 않으셨을까요?”
“알았어도 가지 않았던 거야. 아마 텔리는 이디레이아로부터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예언을 들었을 거다. 그래서 널 구하러 가지 않았던 걸 거야. 잘못하면 미래를 바꾸게 되니까. 우리 세계에서는 예언을 듣게 되면 아무리 신이라도 함부로 미래를 바꾸지 않는단다. 그리고 이디레이아는 앞으로 일어날 여러 가지 미래 중 가장 도움이 될만한 것을 추천해주곤 하지.”
“마... 말도 안 돼요. 그럼 그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거잖아요. 그건 마치.....”
“그래. 운명처럼 말이야.”
“그래서 운명과 예언의 어머니.....”
케르케로우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도무지 수긍할 수 없네요. 제가 왜 이디레이아님의 예언을 따라야 하냔 말입니다!”
“아냐. 아냐. 절대로 그럴 필요는 없지. 그녀는 그저 가장 좋은 방향과 길을 추천해주는 거니까. 여전히 네 맘대로 결정해도 된단다. 이미 텔리는 그렇게 하고 있잖아. 그는 늘 운명의 어머니를 자기 손으로 제거하겠다고 여러 번이나 말했지. 그건 너희 인간들이 화가 나서 누굴 ‘죽여버리겠어!’라고 하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거야. 아까 내가 얘기한 대로 그는 신이니까 반드시 자기가 한 말을 지킬 거라고.”
“그럼 정말 이디레이아님은 텔리님의 손에 당하시게 되나요?”
“글쎄.... 아마 미래를 미리 내다볼 수 있는 이디레이아라면 그런 운명이 다가올 때마다 피해가지 않을까?”
“잠깐만요..... 저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었잖아요.”
건수는 다시 자신에 관한 이야기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집요하게 케르케로우스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이디레이아님이 저에 관한 예언을 하신 거군요? 여기 검은 방에 오셨을 때 말이에요.”
케르케로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에 관한 예언이 분명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뭔지....”
건수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케르케로우스는 말을 끊고 대답했다.
“네겐 말해줄 수 없는 예언이었기 때문에 지금 말해줄 수 없는 거야. 함부로 예언의 내용을 발설해서 미래를 바꿀 수 없는 내 입장을 이해해줘. 내가 날 죽였던 텔리의 입장을 이해했듯이 말이야.”
“아니...! 그걸 저더러 어떻게 이해해달라고 하시는 건지...”
건수는 기가 막혔다. 그는 계속 질문하려고 했지만 케르케로우스는 앞발을 들어 주둥이에 갖다 대더니 마치 입에 지퍼를 채우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음음음.... 난.... 이데 입을 봉인해더 마모테... 음음음!”
“예? 입을 봉인하셔서 말을 못 하신다고요? 헛!”
케르케로우스는 고개를 빨리 몇 번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건수는 이제 더 물어본다고 해도 소용없을 것을 깨달았다. 그가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신은 자신이 한 말을 지켜야 한다고. 또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말이다. 케르케로우스가 자신의 입을 봉인하겠다고 했으니 아무리 졸라도 그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알겠어요. 케르케님은 절대 제게 그 예언을 말씀해주시지 않을 걸 잘 압니다. 그런데 좋은 예언이었다면... 아니, 제게 유리한 예언이었다면 케르케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실 이유가 없죠. 분명 제게 안 좋은 예언이었을 거예요.”
“.......”
건수는 침묵을 지키는 케르케로우스에게서 시선을 뗀 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듯 검은 방의 위를 쳐다보았다. 그곳엔 하늘 대신 끝을 모르는 암흑만이 있었다. 마치 자신의 미래도 그렇게 새카맣게 변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전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엘리시움에 가지 않을 거예요. 전 몇 년이나 침대 위에서 의식을 잃고서 이곳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어요. 그리고 겨우 부모님을 다시 만나고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는데, 제가 어딜 또 가겠어요? 케르케님, 얼마나 속상할지 제 마음도 이해하시죠?”
“음음......”
케르케로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건수는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쉬더니 힘없이 말했다.
“케르케님, 전 제가 얘기를 다 전해드렸으니까 이제 다시 제 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케르케로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밝게 빛나더니 그들이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밝은 빛이 나는 출구가 나타났다.
“저 빛이 나는 곳으로 가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그 불새군 반역자들에게 내가 그들의 뜻을 잘 알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렴. 네 몸을 묶고 있는 그 성가신 붉은 밧줄은 곧 풀어줄게.”
“예. 케르케님, 감사합니다. 또 뵈어요.”
건수는 케르케로우스와 나눴던 대화 때문에 기분이 영 개운하지 않았지만 일단 내일 있을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는 억지로 힘을 내서 빛이 나는 출구 쪽으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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