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5 부. 만월의 밤 - 66 화

만월의 밤 – 66

베토케로우스가 텔리의 환영의 기습을 받아 쓰러지기 전의 일이었다. 에뮤니우스는 애꾸눈 늑대 카베쿠스를 따라 케르케로우스를 죽이려고 그에게 다가가려던 참이었다. 케르케로우스는 옴니테바를 몸에 이식한 늑대들에게 둘러싸여 악전고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가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카베쿠스와 에뮤니우스를 보고 잠시 한눈을 팔았을 때였다. 여러 마리의 검은 늑대가 그를 공격하는 바람에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텔리와 스라소니 산신령이 나타나 늑대들을 해치우고는 그를 위기에서 건져냈다. 텔리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카베쿠스는 놀라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저건 살육의 신. 그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지?”

애꾸눈 늑대 뒤를 따라 이동하던 에뮤니우스가 그에게 물었다.

“카베쿠스님, 왜 걸음을 멈추십니까? 케르케로우스님을 빨리 해치워야 하잖습니까?”

“쉿. 잠시만. 살육의 신, 텔로토마가 나타났다. 저 녀석은 우리 힘으로는 쉽게 해치울 수가 없어. 일단은 뒤로 물러나자.”

“예? 누가요?”

에뮤니우스가 다시 눈을 들어 케르케로우스가 있던 곳을 보자, 텔리와 스라소니 산신령이 순식간에 늑대들을 제압하고 도륙하고 있었다.

“아니, 저놈은 텔리! 이이익!”

에뮤니우스는 얼마 전 숙소에서 자기를 습격했던 텔리를 보고 자신의 어깨를 손으로 만졌다. 이미 회복되었지만, 어깨에 남은 상처가 욱신거리는 듯한 느낌이 났다.

“텔리, 저놈은 제가 꼭 죽여야 하는 놈입니다.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놈이라고요.”

카베쿠스는 고개를 돌려 베토케로우스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검은 괴수는 그의 숙적 텔리의 등장에 이성을 잃었는지 부하 늑대들을 잡아먹고 있었다. 카베쿠스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낮은 목소리로 그르렁거렸다.

“잠깐 기다려. 아무래도 주인님께서 직접 나서시려는가 보다. 주인님께서는 이 세계로 오신 후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하셔서 몸이 많이 약해지셨는데, 지금 힘을 보충하고 계셔. 저 살육의 신이 나타나서 그런 것 같다.”

“그럼 이제 어쩌죠?”

“케르케로우스는 겁쟁이니까 아마 누구보다도 빨리 이 전장에서 벗어나려고 할 거야. 그가 원하는 건 자기 사제의 안전과 검은 방을 방어하려는 것뿐일 테니까. 이제 곧 검은 문 쪽으로 달아날 게 분명해. 이미 살육의 신이 나타난 이상, 우리가 저놈을 상대할 방법은 없다. 이곳은 주인님께 맡기고 우리는 미리 그곳으로 가서 매복해 있다가 겁쟁이 늑대 놈이 나타나면 그때 해치우는 게 좋겠다. 자, 어서 날 따라와.”

“검은 문이 어디 있습니까?”

“그곳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저쪽 부근이었다. 아까 케르케로우스가 힘을 모으고 있을 때 발산한 빛을 보았거든.”

카베쿠스는 아까 계곡 너머 산 중턱에서 케르케로우스가 빛을 내뿜었던 장소를 대충 기억해내더니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전장을 빠져나가려고 뒷걸음질을 쳤다. 에뮤니우스 역시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며 조심히 그 뒤를 따랐다.

아무도 모르게 전장을 빠져나가 숲속에 숨어든 후 카베쿠스가 에뮤니우스에게 제안했다.

“크르르... 아무리 내 부하 중 일부가 메이크바의 힘을 빌려서 케르케로우스의 공격을 막아낸다고 해도 그들에겐 그를 죽일 수 있을 만큼 능력이 안 될 거다. 아무래도 그 역시 신수가 아니더냐. 그나마 베토케로우스님의 은총을 받은 내가 그를 죽일 수 있는 확률이 더 높겠지. 숲에서 나와 같이 그를 기다리다가 네가 먼저 그에게 모습을 드러내라. 케르케로우스가 너를 보고 잠시 방심한 틈을 타서 내가 달려들어 그의 목덜미를 뜯어버리겠다.”

“좋은 생각입니다.”

에뮤니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는 예전에 자신이 모시던 신을 직접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때였다.

‘크아아앙-!’

엄청나게 큰 소리로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베쿠스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더니 귀를 쫑긋 세웠다.

“드디어 주인님께서 나서신 모양이다. 비록 내 부하들은 아쉽게 희생되었을지 몰라도 방금 그 포효를 들어보니 주인님께서 기력을 많이 되찾으신 것 같다. 케르케로우스 역시 검은 방을 지키려고 도망칠 게 분명하다. 자, 주인님은 살육의 신을, 우린 겁쟁이 늑대 신수를 잡는다. 어서 서두르자!”

따지고 보면, 검은 방의 주인인 케르케로우스만 잡자는 카베쿠스의 전략은 이치에 맞는 것이었다. 어느 체스판에서도 왕만 잡으면 게임이 끝나는 것 아니겠는가. 여기서는 케르케로우스가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으니 그를 잡기만 하면 베토케로우스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기는 것이었다. 에뮤니우스는 묵묵히 애꾸눈 늑대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불행한 사건은 몇 분 뒤에 터졌다.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던 카베쿠스가 또 멈춰선 것이었다.

“아니, 또 뭡니까? 왜 가다가 멈춰요?”

또 한 번 멈춰선 카베쿠스 때문에 짜증 났는지 에뮤니우스가 따지듯이 물었다. 그런데 카베쿠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에뮤니우스가 애꾸눈 늑대의 앞으로 가서 그의 얼굴을 쳐다보니, 그의 상태가 예사롭지 않았다. 눈이 뒤집힌 채로 입에는 거품을 물고 있는데, 아무래도 발작을 일으키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 있어요? 어디 몸이 안 좋아요?”

‘크르르르르....’

카베쿠스는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더니,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고는 ‘컹!’ 하고 한 번 날카롭게 짖었다. 그리고는 몸을 뒤로 돌려 다시 전장으로 쏜살같이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의 이상한 행동을 본 에뮤니우스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뭐야? 검은 문 쪽으로 먼저 가서 매복하자더니 왜 다시 저쪽으로 돌아가는 거야?”

베토케로우스가 모든 검은 늑대의 정신을 조종해 그들을 불러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에뮤니우스는 영문도 모른 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계곡 쪽으로 달려가는 카베쿠스의 뒤를 쫓았다.

“헉헉... 인간들이고 신이고 짐승들이고 전부 멍청한 것투성이야. 아니, 그나마 매복하자는 전략은 그나마 좀 그럴듯해 보이더구먼. 갑자기 한마디 말도 없이 저기로 돌아가는 건 무슨 생각인 거지? 혹시... 베토케로우스님께 무슨 일이 생겼나? 그래서 다시 돌아가는 것 아냐? 그렇다면 텔리가 일을 저지른 것 아냐? 이거 예감이 영 안 좋은걸. 헉헉헉....”

고령의 에뮤니우스는 카베쿠스의 빠른 발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지만, 부지런히 그의 뒤를 쫓았다. 숨이 턱에까지 찰 정도로 힘겹게 계곡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의 눈앞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