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6 부. 솔로우스 - 11 화

솔로우스 – 11

알렉시스는 입으로는 분노를 쏟아냈지만 생각만큼 쉽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지 못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이미 다리에 힘이 풀려 있었다.

‘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베토케로우스는 음흉한 미소를 띠며 알렉시스를 보고 말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이상한 기분이 들겠지.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없다. 내가 네 다리 힘을 풀어버렸다. 조금 전 제어를 풀었다고 해서 너가 자유롭게 움직인다면 내가 곤란하니까 말이야.”

그 말은 즉 베토케로우스가 그녀의 다리 힘을 빼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알렉시스는 분한 마음에 저절로 거친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 이런 쳐죽일 놈!”

“내가 이미 말했잖아. 내가 네 정신을 지배하면서부터 네 몸은 내 것이 되었다고. 네 정신이 내 제어를 벗어날 만큼 강하지 못한 것을 탓하거라. 크크크.”

하지만 언제까지 그녀는 그렇게 주저앉아 있어야 하는 것일까? 베토케로우스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데, 그녀는 마치 덫에 걸린 산짐승이 다가오는 사냥꾼을 바라보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 이런. 이러다가 꼼짝없이 저 괴수에게 잡아먹히겠군.’

그녀가 절망적인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을 그 때, 릴리카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주저 앉아 있는 알렉시스를 보며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다.

“약해빠진 것 같으니. 적이 다가오는데 뭐하고 앉아 있냐? 가만히 있다가 당할 생각이냐?”

“다리가.... 마치 마비된 것처럼 되어버렸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쳇. 핑계는!”

아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에뮤니우스로부터 기습당해서 전신이 마비 상태에 있던 릴리카는 누구보다도 알렉시스가 지금 느끼고 있는 절망감을 잘 헤아릴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팔에 힘을 모으며 화염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렉시스를 대신해서 베토케로우스를 대적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릴리카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알렉시스는 놀라며 릴리카에게 말했다.

“안 돼! 릴리카. 날 놔두고 도망가. 너가 상대할만한 상대가 아니야.”

“뭐? 그럼 너는 저 녀석을 상대할 수 있기라도 한단 말이냐? 그리고 착각하지 마. 널 구하려고 이러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저자는 신수다. 너나 나 같은 신전 전사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아무리 텔리님께 한 번 패해서 많이 지쳤다고는 하지만.....”

그러자 릴리카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알렉시스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웃기지 마. 어차피 케르케로우스를 잡으려고 여기까지 온 우리다. 저놈이나 케르케로우스나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이냐? 둘 다 똑같은 늑대일 뿐이지. 도망가려거든 너나 땅바닥을 기어서 여기를 빠져나가보든가!”

그렇게 말하면서 릴리카는 베토케로우스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것을 본 베토케로우스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릴리카가 당연히 도망갈 줄 알았는데 죽기를 각오하는 것을 보고 의외라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다시 여유 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제 자리에 멈춰 서서 그녀가 자기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검은 늑대들은 엎드려 있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가 조금 더 가까이 오면 공격할 준비를 했다. 릴리카의 행동을 본 불새군 위병들은 서로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릴리카의 뒤를 이어 뛰어나갔다. 그들은 자기들이 베토케로우스에게 목숨을 잃을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릴리카의 앞을 가로 막운 검은 늑대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릴리카의 무모한 행동에 놀란 알렉시스는 뒤에서 릴리카를 부르면서 도망치라고 외쳤다.

“릴리카! 도망쳐. 왜 다들 굳이 죽으려고 애쓰는 거야?”

그녀가 아무리 외치면서 말려도 릴리카와 그녀의 부하들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 *

한 편, 텔리를 구해주고 있었던 귀신들은 신기 할머니가 늑대에게 물린 것을 보고, 다시 그녀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번엔 그녀를 구하기 위해 늑대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핑!’

강하게 당겼던 활시위가 손에서 튕기는 소리가 나더니 그녀와 건수 주변에 몰려있던 늑대 중 한 마리의 몸통에 큰 구멍을 만들었다.

‘켕!’

또 한 쪽에서는 다른 귀신이 공격하는 것인지, 다른 늑대를 위에서 강한 압력으로 짓누르는 것이었다. 이번에 공격을 받은 늑대는 아예 입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면서 그대로 짓이겨지면서 죽고 말았다. 하지만 늑대들의 상태가 이상했다. 이미 그들 중 두 마리가 보이지 않는 적에게 당해 쓰러지는 것을 보았는데도, 곁에 있던 늑대들은 시뻘개진 눈을 번뜩이며 사방을 살폈다. 아까 같았으면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해 본능적으로 겁을 먹고 도망갔을 녀석들인데 지금은 그저 살기만 등등할 뿐이었다. 그리고 할머니를 입에 물고 있는 녀석은 공격을 받자 턱을 움직여 한 두 번 할머니의 몸을 으적으적 씹으며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할머니는 크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건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들에게 외쳤다.

“저, 할머니의 친구분들. 잠시만요! 여러분이 늑대들을 함부로 공격하시면 저놈들이 할머니를 살해할 거에요. 그러니 잠시만... 잠시만요. 제가 얘기해 볼께요.”

할머니를 입에 물고 있는 늑대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다른 늑대들의 눈에서는 살벌한 붉은 안광이 비쳤다. 설혹 할머니를 물고 있는 늑대가 공격을 받아 쓰러진다고 해도 옆에 있는 늑대들이 할머니를 공격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건수의 말을 들은 것일까? 늑대 주위에 불고 있던 강한 돌풍도, 또 활시위를 튕기는 소리도 모두 멈췄다. 귀신들이 건수의 말을 듣고 잠시 공격을 멈춘 것이었다. 건수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엘리시움어로 늑대들에게 빌었다.

“제발 할머니를 놔줘. 이렇게 항복했잖아! 차라리 날....”

그가 늑대들에게 빌면서 사정하고 있을 때였다.

“콰아아앙!”

눈에 보이지 않는 검은 방의 입구에서 큰 폭발음이 나면서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아까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나는 소리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충격파와 더불어 열기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웃!”

순간 몸이 움찔거린 건수와 늑대들은 동시에 화염으로 빛이 번쩍이는 검은 방의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검은 방 안에서 아까보다 더 큰 폭발이 일어났을 때였다. 죽은 듯이 축 늘어져 있던 케르케로우스가 순간 번쩍하고 눈을 떴다.

“검은 방! 검은 방이 나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는 마치 잠꼬대를 하다가 덜 깬 상태로 일어난 사람처럼 아직 졸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검은 방이 수호자를 불러내려고 하고 있다. 아아... 안 돼! 검은 방이 내 허락도 없이 수호자를 부르다니! 일어나야 돼. 검은 방을 지켜야 해!”

그는 방금까지 무기력하게 기절해 있었던 것과는 딴 판으로 재빨리 일어나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주변에 있었던 늑대들은 모두 할머니를 공격한 늑대와 건수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니, 베토케로우스의 늑대가 할머니를.... 그리고 건수는 저런 꼴로 앉아 있다니! 이... 이런! 이 일을 어쩌지?”

케르케로우스는 번갈아가며 검은 방의 입구와 늑대에게 물려 기력을 잃어가는 할머니를 보았다. 그리고는 서둘러 정신을 집중해서 힘을 끌어올렸다. 곧 그의 몸에서 밝은 빛이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